밥 : 서른
가족이건 친구건 연인이건, 밥 먹었냐고 누군가 물어봐 주는 걸 대답하는 것도 귀찮고, 내가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것도 귀찮을 때가 있었다.
이십대 중반,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어버리고 싶었고, 피곤했고, 아무도 없는 곳이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나 혼자 (가능하면 개나 고양이 한 마리랑) 살고 싶었다.
그렇게 극단적으로까지 생각했던 건,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휘둘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밥 먹었냐고 물어보면 대답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먹으러 갔고,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상대방이 먹고 싶은 것 아무거나 먹었다.
나는 거절도 잘 하지 못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혼자이기보다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길 원했다.
하지만 외로움을 회피하면 회피할수록, 혼자 있는 시간을 미루면 미룰수록, 내 인생의 조정키를 내가 놓쳐버리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
그래서 나는 떠남을 택했다.
정착하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시간들을 보냈다.
인간관계의 책임감에서 벗어나 다른 어느 누구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은 무척이나 자유롭고 마음 편한 일이다. 나를 휩쓸리게 하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서 오롯이 나 혼자 여행하는 것.
오롯이 내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것.
그런데 나를 옭아매고 있던 거미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사실은 나를 보호해 주고 있던 보호막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있었다.
바로 무지무지 지쳤을 때나 서럽게 아플 때, 손가락 까딱할 에너지조차 없는데,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스스로 음식을 입에 넣을 때다. 어느 누구도 내가 안 먹는다는데 옆에 와서 억지로 먹어야 한다고 밀어넣지 않는다.
독립적이고, 주도적으로 자유롭게 혼자 살기? 좋은 이야기다. 대신 감수해야 할 대가가 있다. 이 세상에 진정으로 나를 챙길 사람은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밖에 없다는 차가운 현실이다.
물론 나는 용감하고 의연하게 눈물콧물 빼면서(?) 내 스스로 나를 이끌고 이십대를 보냈다.
그런데 혼자 살면서, 시간이 지날 수록 다른 사람에게 어리광 부리는 것이 어느정도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아아, 나도 누가 밥 먹었냐고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나도 누가 많이 먹으라고 먹기 싫어도 더 먹어야 한다고 잔소리 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세끼를 굶든 세끼를 과식하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무관심이 때로는 나를 몹시 외롭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걸. 인간이 어느정도 안정감을 느끼고 행복하려면 최소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렇게 밥 먹으라는 관심이 너무나 감사해질 때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막상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 먹으라는 소리를 듣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처음에는 무조건 아침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고 해서 정말 많이 싸웠다. 나는 저녁형 인간이고, 지난 10년간 아침밥을 제대로 안 먹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아침밥을 먹을 수가 있는가. 거기다 밥이건 뭐건 나는 아침에는 아예 사람들과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싫다. 기숙사에서 살 때도, 쉐어하우스에서 살 때도 나는 아침에 사람들을 피했다. 굿모닝이라는 말조차 하기가 싫고 완전히 짜증이 난 상태다. 그러다가 30분-한시간쯤 지나 샤워하고 커피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 좀 기분이 나아지는데, 방문을 열고 나오자 마자 다른 사람들과 말을 해야 한다는 것조차(심지어 그게 가족이라 할 지라도) 익숙하지가 않았다. 거기다 우리가 할 대화도 전혀 행복한 대화는 아니다.
"오늘도 집에만 있을 거니?"
"그렇죠 뭐"
"휴..."
모두가 다 출근하고 난 다음 아무도 없는 거실로 나오고 싶었다.
물론 엄마, 아빠, 할머니에게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라, 요즘 세대의 이기적이고 버르장머리 없는(?) 작태를 비난하셨다.
그렇게 나의 아침 스케줄과 아침 밥에 대한 잔소리가 이어지고, 그리고 나면 내가 '뭘 챙겨 먹었냐'에 대한 잔소리가 이어진다.
우리집에서 ‘밥’은 공기밥과 함께하는 한 차림 식탁이다.
식빵 쪼가리, 주스, 샐러드, 시리얼, 밀가루 음식은 제대로 된 ‘밥’이 아니다. 그러니 부모님 눈에 나는 하루에 밥 한끼도 제대로 안 먹는 아주 ‘한심한’ 인간이 되고 만다.
엄마, 할머니 모두 나에 대한 모든 걱정이 밥에서 시작해서 밥으로 끝난다.
왜 그렇게 '밥'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밥 먹었냐’ 와 ‘밥 먹어야지’ 밖에 할머니는 나에게 할 말이 없는 걸까?
그런데 내가 관찰해 본 결과, 할머니는 우리 엄마에게도 밥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신다.
엄마의 엄마는 자기 딸에게 밥 먹으라고 하고, 엄마도 딸인 나에게 밥 먹으라고 하고.
아무래도 내리사랑은 밥 먹으라는 말을 따라 이어져내려가나보다.
밥, 밥, 밥 그 놈의 밥타령이 지겨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오히려 잔소리가 그리워지던 때도 있었음을 생각한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아침식사 시간에 내가 문을 열고 나와 식탁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밥 타령과 함께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돌이켜보니 어쩌면 내가 나 혼자서도 밥을 챙겨 먹으면서 잘 살아낼 수 있었던 까닭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밥 먹었냐, 밥 먹어야지’ 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나에게 해준 엄마와 할머니가 있어서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