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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Oct 25. 2020

2. 대학만 보내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집 : 예순


효녀냐 불효녀냐 그것이 문제로다


우리 엄마는 굉장히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인 분이셨다, 라고 생각한다. 

불우한 가정환경을 딛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신 분이시고, 딸이든 아들이든 절대 차별한 적이 없었다. 외모나 결혼보다는 언제나 너 스스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라, 고 가르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결혼에 대한 로망이 없었던 것 같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공주같은 내 모습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대신 나의 로망은,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모험을 하는 것이었다. 공주보다는 해적이랄까. 


어렸을 때부터 일찍 결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나뿐 아니라 여동생, 남동생 모두 서른 넘어 결혼 할 것을 당연히 생각했다.  아빠는 엄마의 영향이라고 가끔 엄마를 탓하는데 따지고 보면 조금이라도 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  엄마의 우선순위는 '결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엄마도, 무의식중에는 자식들이 20대에는 자신의 길을 찾고, 적어도 20대 후반에는 만나는 사람이 생겨, 늦어도 30대 초반에는 결혼해서 온전히 새 가정을 꾸리겠지,라는 생각이 있었었던 같다. 결혼에 올인하지 말라는 말이었을 뿐, 결혼을 하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왠걸, 장녀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20대 후반이 되어도 만나는 남자는 커녕, 한번도 짝꿍을 소개받은 적도 없고, 정착조차 하지않고 떠돌아 다니는 나를 보고 엄마 아빠 다 걱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뭐 그것까지도 내겐 그냥 한 귀로 듣고 대강 넘길 수 있는 문제다.

엄마 아빠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수 있는거고, 애초에 충분히 각오하고 퇴사한 거니까. 



라고, 내가 멀리 살면서 가끔 전화할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도 안하고, 할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로.



예순, 왜 이렇게 결혼식장에 갈 일이 많은 것인가.

툭하면 엄친딸, 엄친아가 결혼한다는 청첩장이 날아온다. 



나는 사실 현재 엄청나게 결혼을 하고 싶은게 아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청첩장 돌리고 하나둘 씩 결혼 해도 별 생각이 없다. 

그런데 아빠는 청첩장을 받는 순간부터 얼굴 색이 어두워지고 휴..하고 한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내가 인생을 헛살았지, 손주를 볼 나인데 어쩌고...를 시전한다.

엄마는 두명있는 자식을 여의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우리는 4명인데 한명도 시작을 안해서 대체 언제 그 홀가분함을 누릴 수 있으려나 한탄을 시작한다.




내가 만나는 어른들은 모두, 빨리 시집가서 부모님 시름(?)을 덜어주라는 조언을 하고, 엄마 아빠에게는 대강 짝지어서 보내버리라(?)는 조언을 한다. 

시름을 덜어주라니? 결혼을 안하고 부모님을 미리부터 모시는 게 그렇게 '골칫덩이'이란 말인가?

대강 짝지어서 보내라니? 그랬다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잔소리에 왁, 하고 화를 냈다가도, 설거지를 하러 돌아선 엄마의 작아진 등을 보면 마음이 아파진다. 엄마의 등에는 육십평생,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몇년간은 내려놓지 못할 '책임감'이 지워져 있다.  

워킹 맘으로 시작해 두 살 터울의 4명 남매를 키우면서,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자영업을 하면서, 엄마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강철같은 '책임감'으로 해냈다. 

'너희 대학만 졸업시키면...'이라는 말은 엄마아빠에게는 등에 짊어진 책임감을 드디어 하나씩 내려놓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휴학의 휴도 못 꺼내고 졸업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왠걸, 대학 졸업장은 곧 취직 그리고 안정적인 삶의 시작과 동일한 것인 줄 알았는데, 세상이 변했고, 자식들이 변했다. 곧바로 취직을 안하고 자격증 공부를 한단다. 대기업 취직을 해놓고 때려친단다.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단순히 자식들의 대학 졸업이 목표가 아니었다. 자식이 편안하게 가정을 꾸려, 정착하는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보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책임감을 어느정도 내려 놓을 수 있는 마지노선 이었던 것이다. 





나는 자식 넷이 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도 책임감을 짊어지고, 거기다 가게에 외할머니라는 또 다른 책임감까지 여전히 이고 있는 엄마가 안쓰러워, 자식들은 독립해서 알아서 살테니 그만 책임감을 내려놓으라 소리쳤다. (물론 그렇게 구구절절히 설명한 건 아니고, 그냥 나를 내버려 두라고 소리쳤다.)



책임감을 내려놓으라고?

서른에 캐리어 끌고 집으로 들어와서 엄마아빠에게 책임감을 내려놓으라 하다니. 용돈도 못드리고 간신히 나혼자 먹고 살 정도면서 왜 날 못 믿냐고 큰소리 치다니.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효녀로 손가락질 받는 건 내가 선택한 길이니 상관이 없는데

나의 선택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자식을 시집도 제대로 못 보낼만큼 잘 못 키웠다는 소리를 들어야 할까. 


이미 회사를 관둘때 나는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의 길을 버릴 수밖에 없다고 다짐했건만 여전히 엄마가 자신의 자식 교육관에 회의를 느끼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책임감과 죄책감이 뒤얽혀 몇번이나 서로에게 소리치고 눈물 콧물 빼면서 울고 불고 

몇번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나는 나대로 죄책감과 자아실현 속에서 중도를 찾아 가고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예전의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의 사이에서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기기로 결정했다.

내가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결국 나는 독립할 것이고

내가 엄마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말거니까.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어쩌다 얻게 된 선물같은 시간이니까.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부모님과 같이 살든 살지 않든

어떤 것이 맞는 선택인지 어떤 것이 옳은 인생인지는

나도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모른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고는 항상 뒤돌아보며 후회한다는 것. 

그 때, 왜 더 사랑하면서 살지 못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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