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월 넷째주]
엘은 뉴질랜드에서 같이 일을 했던 동갑내기 더치 친구다.
코로나 전에 한국에도 놀러와서 우리집에서 자고 간 적이 있다.
뉴질랜드에서부터 네덜란드로 유학 간다고, 간다고 몇년째 노래만 부르던 내가,
드디어 비행기 표를 샀다고 하니
너무 흥분해서 당장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엘이 사는 곳은 흐로닝언으로, 흐로닝언 대학교로 유학도 많이 가는,
나름 네덜란드에서 큰 도시이긴 하지만,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내가 갈 틸부르흐나 다른 도시들과 참으로 동떨어져 있는 곳이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기차 타고 가면 두시간 쯤 걸리는 먼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나라에서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 감격해서 양손에 이민가방을 끌고 스키폴에서 흐로닝언으로 직행했다.
지금까지 이민 다니면서 누구 아는 사람 있는 곳에 가 본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참 용감했네.
엘은 플랜카드까지 만들어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엘이 사는 곳은 흐로닝언 시내고,
엘네 부모님은 시내에서 자전거 타고 40분쯤 걸리는 외곽의 하우스에 사신다.
부모님 집은 장기 임대 주택이다.
네덜란드 장기 임대 주택은 월세도 함부로 못 올리고, 쫓겨날 염려도 없고,
주택 임대 회사가 타운 하우스들을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어 사실 세입자 입장에서는 마음 편한 곳이다.
다만 부모님이 나중에 우리에게 물려줄 집이 없는거지 뭐,
하면서 엘은 그래도 상관 없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엘이 어렸을 때 부터 살았던 만큼 차곡차곡 쌓아온 추억이 가득한 집이었다.
손때묻은 가구들과 피아노, 벌집까지 있는 제법 넓은 뒷마당,
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2층, 3층에 자리한 작은 서재와 침실들.
엘네 가족들과 함께 sjoelen도 하고, 소박한 집밥도 먹고, 차를 마시고, 카드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나라에 비해 확실히 외국에서는 보드게임이나 카드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익숙한 것 같다.
특히 도시에 살지 않는 경우, 한국처럼 '불태우는 일'이 거의 없다.
한국에서는 다같이 왁자지껄하게 먹고 마시고, 2차 3차 그리고 노래방 그렇게 음주가무가 곁들여지거나
본격적으로 화투판(?)까지 깔아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노는 편이다.
그리고 그렇게 놀 수 있도록 인프라도 잘 되어 있다.
24시간 편의점 이라던지, 심야 영업하는 음식점, 술집, 노래방,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
외국은 대부분 집에 초대해서 같이 밥을 먹고 약간의 술을 곁들이고, 게임을 하고 수다를 떠는 소소한 파티들이 대부분이다. 바베큐 파티도 그렇고, 생일 파티들도 그렇다.
그래서 한국 사람 입장에서 외국 생활이 심심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다.
나는 뭐, 둘 다 좋아하는 편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운 사람들끼리 소소하게 즐기는 하우스 파티가 좋다.
나이가 드는 걸까.
엘을 따라 흐로닝언 시내를 구경했다.
네덜란드의 첫인상은, 의외로 낯설지 않음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자전거가 사람 수보다 많은 건 이미 상해에서 많이 봤다.
유럽풍의 건물과 도로는 이미 프랑스에서 살 때, 여행 다니면서 많이 봤다.
산이 없어서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은, 호주에서 많이 봤다.
오히려 나에게 낯설게 다가온 것은 정말 잘 정돈된 자전거 길, 그리고 경차들이었다.
한국에서 너무 큰 차들을 많이 봐서 작은 도로에 작은 차들이 졸졸 다니는 것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네덜란드에서 중형차만 되도 세금이 훌쩍 뛰어버린다고 한다.
그런데도 대형suv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지.
하루 이틀 시간을 내어 둘이 차를 몰고 근교 여행도 다녀왔다.
Bourtange 라는 곳은 별 모양으로 된 정말 작은 독일과 근접한 관광 마을이다.
내 인생 첫 유태인 캠프도 방문했다. 숲 가운데 있었는데 너무 조용하고 아름다운 숲과 대조되어 그 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루는 특별한 걸 보여준대서 기대했는데 무슨 고인돌을 보여줬다.
야, 한국에도 고인돌 있거든!
엄청 많거든!
그런데 화순에서 매일 보던 고인돌을 여기에서 보니 기분이 묘하긴 했다.
여기 드렌테에 고인돌을 만들었던 사람들과 화순에 고인돌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수천년이 지나 자신의 후손들이 이렇게 만날 걸 상상이나 했을까.
가장 좋았던 건 둘이 오래된 요트까지 몰고 나가서 호수에서 세일링 하고 바람과 싸우다가 돌아왔던 것이다.
관광객으로서는 할 수 없는,
여기 사는 친구가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경험이었달까.
일주일간 마음껏 엘과 수다를 떨면서 지난 2년간,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쌓여왔던 응어리들을 풀었다.
엘도 나와 마찬가지로 뉴질랜드를 떠나고 나서 다른 일을 했고, 그리고 나서야 어렴풋이 자신이 원하는 커리어로 방향을 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살아온 문화적 배경이 달라도,
우리는 성격도 비슷하고 현재 위치해 있는 인생의 지점도 비슷하다.
둘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싱글에, 커리어를 고민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다 커플이고, 애도 낳기 시작하고, 거의 다 정착했다.
여행도 많이 다녀본 우리는, 이제 어딘가 나의 '집' 이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커지기 시작하고 있고
대체 우리 인생의 파트너를 찾을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고민도 하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 나와 비슷한 사람이 없어서 참 외롭다고 느낀 적이 있다.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여행자의 길에서 오히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처럼 정착을 고민하는 사람들, 나이를 고민하는 사람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누구와 살아야 제일 행복할지 끊임없이 묻고 시도해보는 사람들.
그렇게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 사이에서 있었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나와는 너무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같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렇게 나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어쩌면 그런 만남과 인연들이,
나를 혼자서도 씩씩하게 새로운 모험을 떠날 수 있도록 하는 지지대가 되어 주는 건지도 모른다.
괜찮아,
나만 이렇게 헤매고 있는게 아니야.
내가 봤을 때 엘이 잘 해나가고 있는 것 만큼
엘이 봤을 때 나도 잘 해나가고 있겠지.
그러니 엘에게 내가 너그러운 것처럼
나 자신에게도 너그러워지자.
너무 초조해하거나 조급해 하지 말고.
궁금하다.
과연 일년 후, 이년 후, 오년 후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