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셋째주] 브뤼셀 여행
틸부르흐는 암스테르담보다 벨기에 안트베르펜과 더 가깝다.
벨기에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한번도 본격적으로 벨기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벨기에, 하면 내가 아는 것이라곤 오줌싸개 동상, 감자튀김과 와플, 맥주, 다언어 그리고 나름 악명높은 인종 차별…?
참 나도 스테레오 타입에 얽매여 있구나.
작년에 온라인으로 프리마스터 공부를 하면서는 안트베르펜의 문화적 다양성에 대해 많이 배웠었다.
우리 교수님 중 한 분이 거기 살면서 다문화 연구를 하고 페이퍼를 많이 쓰셨다. 그래서 벨기에의 다문화성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게 작은 나라에서 기본 3개 국어가 통용되고(불어,네덜란드어, 영어),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도 그렇게 많고, 그러고 보니 내가 만난 벨기에 사람들은 다 다언어를 쓴다.
대체 어떤 나라길래 그렇지.
몰리가 브뤼셀에 있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그렇게 나와 가까운 곳에서 공부하게 될 줄 몰랐고, 내가 벨기에에 방문할 친구를 가지게 될 줄 몰랐다. 몰리는 호주에서 나와 함께 살고, 일했고, 여행했던 나의 아이리쉬 베스트프렌드다. 호주에 있을 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에라스무스 석사과정에 대해 이야기했고, 몰리도 관심을 보였는데, 나는 결국 에라스무스가 아닌 틸부르흐로 석사를 시작하고 정작 몰리가 에라스무스에 합격했다. 공부 기간도 코로나때문에 둘이 겹치게 된 것이다!
오전에 기차타고 브레다로 갔는데, 플랫폼을 변경할 필요도 없이 바로 국제기차(?)로 갈아탈 수 있었다. 당황스러운 것은 기차표 끊는 곳이 없어서 헤매다가 얼렁뚱땅 기차를 탔다는 것이다. 기차는 사람들로 가득 차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를 느끼게 해줬다.
대부분 안트베르펜에서 내리고, 나는 브뤼셀 센트럴까지 쭉 기차를 타고 갔다.
기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보니 확실히 네덜란드와 비교하면 브뤼셀은 좀 더 난장판 느낌이긴 하다. 좀 더 더럽고, 좀 더 정돈 안된 느낌. 네덜란드 친구들의 평에 의하면, 덴마크는 살 만 한데, 벨기에는 도로도 시설도 구리고 다 구리다고 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만 같다.
브뤼셀 센트럴은 암스테르담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코카시언이 아닌 사람이 더 많고, 노숙자도 진짜 많았다. 역 스타벅스에서 나를 기다리던 몰리와 드디어 재회했다! 몰리를 못 만난지도 2년이 넘어서 브뤼셀에 놀러간다는 기대감 못지않게 오랫만에 친구를 만난다는 기대가 더 컸다. 이것도 그나마 코로나때문에 몇번 미뤄져서 겨우 날짜를 확정짓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하필 이번 주말, 몰리네 집주인이 빈으로 놀러간다고 해서 우리는 몰리가 사는 집 전체를 마음껏 쓰게 되었다.
벨기에도 네덜란드 못지않게 주거 문제로 학생들이 집을 구하기 어려웠는데, 몰리는 우연찮게 같은 아일랜드 출신의 집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조건은 다만 친구들을 데려와서 파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는데, 몰리에게 그건 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파티는 나가서 하면 되니까. 그런데 이 집주인이 유엔에서 일하는, 상당히 좋은 커리어를 가진 분이라 브뤼셀 시내 중심가 건물 맨 위층 옥상 파티오까지 쓸 수 있는 펜트하우스에 사시는 분이다. 거실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다.
벨기에 집에서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집에 세탁기가 없다는 것이다.
세탁기가 없으면 어떡하냐고 물어봤더니 그래서 곳곳에 빨래방이 많다고 한다.
집에 식기세척기는 있는데 세탁기가 없어? 이건 또 다른 문화다.
브뤼셀은 좀 더 현대가 공존하는 파리 정도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기도 한 도시. 너무 작은 오줌싸개 동상과 왕실, 예술의 언덕, 공원, 숨겨진 맥주집과 까페들, 그리고 앤티크 가게들. kg 당 돈을 받는 빈티지 옷가게들에서 쇼핑하다 돈 다 쓸 뻔 했다.
아스팔트나 시멘트가 아닌 돌로 만들어진 도로를 가진 도시.
모던함과 르네상스 건물, 아프리카와 아랍 문화가 뜬금없이 뒤섞인 불어 쓰는 도시.
브뤼셀에 머무르면서 정작 벨기에 음식을 먹은게 아니라 아프리카 레스토랑, 아시아 레스토랑만 들락거렸다.
아쉽게 아직 광장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설치되지 않아 그냥 트리만 보고 돌아섰다.
벨기에 맥주는 알콜도수가 엄청 높아서 하루 저녁 파티 후 다음날 하릴 없이 집에서 몰리와 크리스마스 영화만 보면서 뒹굴거렸다. 이렇게 펜트하우스를 즐기는 것만 해도 행복했다. 음식 시켜먹으면서.
그래도 벨기에 왕립 미술관은 꼭 가고 싶은 곳이라, 몰리를 끌고 갔다. 여기도 학생 할인에 나이 제한이 있었는데 그냥 학생증 보여주면서 나이 말 안했더니 학생 요금으로 표를 내 주었다. 예쓰!
여기도 멋진 작품들이 있었지만 네덜란드 미술관이 더 좋았다. 옆의 마그리트 뮤지엄도 기대했는데 가장 유명한 마그리트 작품들은 없었다. 한국에서 아이들에게 윌리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마그리트를 설명해 주었었는데, 내가 마그리트를 실제로 보러 오다니. 올해 초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브뤼셀 여행은 좋았으나 막상 집으로 돌아올때 기차 잘못타서 한시간 넘게 헤맸다. 심지어 데이터가 떨어졌다고 폰으로 인터넷도 안됐는데 어찌어찌 갈아타고 왔다. 잘못 타면 갈아타면 되지…하는 이 배짱…헤맨 김에 유명하다는 안트베르펜 역도 구경했다.
이번 여행에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소설을 완파했다. 한국어는 왤케 술술 읽히는지 몰라.
내가 살아보지 못한 다른 삶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많은 삶 중에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어떤 삶이 제일인가. 어떤 삶이 최선일까.
여기저기 가보니 결국 정답은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삶은 없고, 그나마 행복해 보이는 삶이 있을 뿐이며, 후회했던 일들은 나중에 가서 보니, 그렇게 후회하지 않아도 될 선택들이었다는거.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다.
직장도 잃고, 사랑도 잃고, 고양이도 잃고, 집도 잃고.그렇게 되서라도,
멈춰서 있다가 숨을 고르고 한숨 자고 내일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물론 우울증은 약의 힘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리고 살고 싶지 않을 때도 참으로 많지만(피곤하니까)
이왕 죽지 못해 사는 거 재밌게 살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되고 싶은 거 되면서.
그러다 보면 이렇게 예상치도 못했던 깜짝 선물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상상도 못했던, 브뤼셀 펜트하우스에서 머물다 오는 선물같은 나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