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둘째주] 암스테르담 여행
어쩌다 보니, 네덜란드에 온지 거의 두 달이 되어 가는데 정작 암스테르담을 가본 적이 없다.
소문으로만 듣던 암스테르담.
유럽 친구들 파티 하러 간다고 할 때 한국에서 손톱 뜯으며 부러워 하던 그 암스테르담.
유럽에서도 집 구하기 힘들고 집세,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그 암스테르담.
유럽에서도 국제도시로 인정받는 (현지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는) 그 암스테르담.
운하를 중심으로 동화책에 나올 것 같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는 그 암스테르담.
커피샵이 있는 골목마다 마리화나 냄새가 가득하다는 그 암스테르담.
고흐와 베르메르 미술관이 있다는 그 암스테르담!
아마 예전 같았으면 네덜란드로 올 생각을 했을 때 무조건 암스테르담에 살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대도시가 부담스러워졌다.
도시에서 살면, 나는 나도 모르게 대도시의 다이내믹함과 편리함, 눈부신 야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탄하는 법을 잊는다. 사람들이 너무 많음에 치여서 밖에 나가기가 싫고, 소음과 매연, 쓰레기과 불야성이 피곤하다.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항상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도 싫고, 모든 것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싫다. 택시비와 외식비 및 ‘문화생활’ (이라고 쓰고 술값이라고 읽는다, 물론 진짜 문화생활 비용도 포함된다. 전시회, 공연 등을 보기 쉬우니 더 자주 가게 된다) 비용으로 생활비 지출은 엄청나다. 거기에 집도 비싸고, 예산에 맞추다 보면 그만큼 주거 환경도 열악해진다.
그래서 사실 네덜란드 유학을 결정했을 때, 물론 암스테르담 대학교도 알아보긴 했지만 내가 가고 싶은 곳이 틸부르흐에 있어서 내심 만족했다. 암스테르담에 있으면 나는 공부도 덜 하고, 더 놀러다니면서 돈은 엄청나게 쓸 것 같았다. 틸부르흐는 대학교 도시(?)답게 상대적으로 물가도 조금 더 저렴하고 도시가 작고 소소하니, (놀 것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집에서 공부만 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결정한 틸부르흐 행은 만족스럽다.
옆 나라 벨기에나 독일, 암스테르담도 기차타고 한시간 반 정도라, 거의 수도권에서 지하철타고 서울 가는 수준이다. 그 말은 곧 내가 놀러가고 싶으면 어디로든 언제든 놀러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기차 값이 비싸다) 암스테르담에 사는 친구들도 있지만, 이번에는 누군가를 만나기보다 나 혼자 가서 마음껏 여행자 느낌을 내보고 싶었다.
일찍 아침 먹고 출발하려 했는데 미적거리다보니 기차 시간을 놓치고 다음 기차를 타게 되었다. 시작부터 삐끗해서 괜히 오늘이 날이 아닌가, 별로 혼자 여행가고 싶은 기분도 아닌데, 하면서 주저하던 마음은 암스테르담 역에 내리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랫만에 대도시에 온 이 기분. 사람들 무리에 섞여 밖으로 나오니 눈앞에 암스테르담이 펼쳐졌다.
암스테르담 역 감상을 좀 하고, 운하와 건물들에 우와, 하면서 역 에서부터 시내를 따라 걸어 들어가는데 마치 강남 대로같은 느낌이다. 차와 버스와 트램이 뒤섞여서 지나가고 관광객과 현지인 무리들이 구경하고 쇼핑하느라 정신 없는 거리.
강남대로에서도 뒷길이 흥미롭듯이, 뒷골목에 뭔가 더 있지 않을까 하고 가보니 샵들이 이어져있는 쇼핑거리였다. 하지만 길이 좁아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쇼핑 거리, 다이애건 앨리를 연상하게 했다. 나는 쇼핑을 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기에 가게에는 들어가지 않고(어차피 대부분 옷가게였다) 요르단 지구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 쪽에 안네의 집도 있는데, 뮤지엄 패스가 있으면 뭐하니, 예약이 다 차있는데.
아쉽게 다음을 기약하고, 반드시 다음에 암스테르담에 올때는 일 이주 전에 예약하기로 결심했다.
암스테르담에는 뮤지엄도 정말 많아 어딜 가야 할지 정하는 것도 일이다.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은 국립 박물관, 시립 박물관, 안네의 집, 고흐 박물관, 렘브란트 박물관,
이만큼만 해도 벌써 입장료가 비싸지길래 뮤지엄 패스를 미리 구매했다. 나를 더 화나게 하는건 학생 할인에도 심지어 나이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30살 이하 학생만 학생 할인을 해준다는데 늙은 학생은 학생 취급도 안 해준 한다는 건가! 너무하다.
요르단 지구 쪽으로 가니 드디어 사진에서 보던 암스테르담의 풍경이 나오기 시작한다. 운하와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유럽 구도심의 돌길과 떨어지는 낙엽들이 어우러져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났다. 지금도 참 여행하기 좋은 시즌인 것 같다. 너무 덥지 않고, 너무 추워지기 전. 오늘따라 비도 안 오고 하늘도 푸르다. 걷기 좋은 날을 선택했다. 내가 사는 틸부르흐는 네덜란드 도시답지 않게 운하가 도심을 가로지르지 않아 아쉽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에 사람들이 와글 와글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부모님 손 잡고 온 아이들은 귀여운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신터클라스 오신 날 이벤트인가!
이 행사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산타 클로스와는 다른 네덜란드만의 신터클라스인데, 다른 점은 크리마스 이브에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이고, 스페인에서 ‘배’를 타고 오는 스토리라는 것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포인트는 블랙 피트 라는 도우미가 옆 있다는 것인데, ‘블랙’ 피트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얼굴을 까맣게 칠한다. 전통적인 이미지를 보면 얼굴은 까맣고 입술은 두껍게 강조해서 사실 누가 봐도 흑인 노예를 상징화 한 것 같은데, 이걸 또 백인들이 분장해서 역할을 하면서 더 모욕적이게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아시아계 노동자 역할 한답시고 백인들이 얼굴을 노랗게 칠하고 검은 아이라이너를 이용해 눈을 쫙 옆으로 빼는 분장을 한 후 ‘백인’역할을 하는 사람 옆에 세워두면 안 모욕적이겠냐고.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렇게 오픈 마인드라는 네덜란드에서 아직까지 이런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전통은 폐지해야 한다, 그냥 도우미 피트가 있으면 되지 왜 굳이 ‘블랙’ 피트여야 하냐고 묻는다. 반면 이것은 우리 전통이고, 노예제도나 블랙페이스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검은 얼굴도 ‘굴뚝’에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검은 것이라고 말한다.(그럼 왜 신터클라스는 얼굴이 하얀거죠)
아직까지 뜨거운 감자인 이슈라, 내가 보는 퍼레이드에서는 어떻게 피트가 등장할까 궁금했다. 운하를 따라 경찰 보트들이 먼저 오고 드디어 신터클라스의 도착을 알리는 아저씨가 작은 배를 타고 와서 캐롤같은 노래를 연주했다.
뒤이어 신터클라스와 피트들이 탄 제일 큰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암스테르담에서 신터클라스를 만날 줄이야!
이후에는 선물이 바로 여기 들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커다란 리본을 단 보트들이 피트들을 태우고 뒤따르고 마지막에는 본인 배로 이 행렬에 참여하고 싶은 개인들이 직접 보트를 몰고 따라갔다. 피트들은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풀 메이크업은 하지 않았지만 검댕을 묻힌 듯한 느낌으로 얼굴을 칠했고, 칠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젊은 더치들은 말도 안되는 전통이라 말하고, 곧 사라질거라고 하는데 요즘 워낙 ‘네덜란드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위기감을 느끼는 더치들이 많다 보니 논란은 한동안 계속 될 것 같다.
신터클라스를 보내고 요르단 지구의 쇼핑 거리와, 레스토랑들을 구경했다. 브런치 집들이 많이 있길래 기웃거려보고, 야심차게 국립박물관 레익스 뮤지엄으로 향했다. 여기도 갑자기 예약 했냐고 물어보길래 설마 못들어가나 싶었는데 그 자리에서 예약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백신 접종 여부 확인하고 들여보내 주긴 하지만 내부에서는 다 마스크를 벗고 있어서 안전성에 의심이 조금 들었다.
몇년만에 오는 미술관에 감동 받아 버렸다. 아니 암스테르담에서 돌아다니면서 갑자기 여행자 기분을 다시 느꼈고,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상상만 하던 곳에 내가 오다니. 직접 고흐의 초상화, 미술사 책에서만 보던 렘브란트의 야경을 내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네덜란드에서도 일상은 평범하게 흘러가지만, 가끔 과거의 내가 꿈꾸던 막연한 미래 속에 현재의 내가 있다, 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미술관을 나오니 어느새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고, 야외 스케이트장이 개장해 있다. 벌써 겨울,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기 시작한다.
트램타고 암스텔빈쪽으로 이동했는데 도심을 벗어날 수록 풍경은 삭막해졌다.
저녁은 교회를 브루어리로 개조한 레스토랑에 가서 근사하게 먹었다. 며칠 전 우리 수업에서 종교 시설의 새로운 변화에 관련해 이야기했었는데, 우연의 일치가 있나.
전통적으로 크리스천(구교든 신교든)이던 더치 문화에서 점점 종교와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면서 교회들이 슈퍼마켓이나 레스토랑 등으로 개조된다. 한편으로 무슬림 이민자들로 인해 일반 건물들이 모스크로 쓰인다. 건물 용도의 변경은 어디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특히나 이것이 종교와 관련된 문제라면.
이 이야기는 긴 이야기라 다른 주제로 쓰도록 하고, 나의 암스테르담 홀로 여행은 느지막이 기차타고 틸부르흐로 돌아오면서 끝났다. 갔다오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