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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오 애증의 영어

[11월 넷째주]

by ClaraSue


유학생활에서 아무래도 가장 큰 장애물은, 언어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뜻 유학을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도 언어가 아닐까.

나는 운이 좋게 영어에 대한 장벽이 좀 덜 한 편인데, 아마 멋모르고 16살에 떠난 미국 공립 고등학교 교환학생 생활에서 얻은 소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 누군가 같은 방법을 쓰겠다고 하면 아마 말릴 것 같다.ㅋㅋㅋㅋ

나는 무지 어렸고(그 당시에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들뜬 마음만 가득해서 닥쳐올 어려움을 잘 몰랐다.

그래서 가겠다고 할 수 있었지.

사춘기였고, 난생처음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과 살았고, 의사소통도 안됐다.

진짜 울면서 짐싸서 돌아오겠다고 엄마에게 전화한게 몇번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늘었던 것은,

첫번째로 호스트 패밀리와 살았고, 주변에 한국인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강제로 모든 의사소통을 일년간 영어로만 했고, 그래도 끝까지 입이 트이지는 않았다.


두번째로 우리 가족이 전형적인 미국인 가족이라 티비를 엄청 봤다.

물론 미국 티비니까 자막도 없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그냥 봤다. 과학용어가 난무하는 CSI, 완전 옛날식 미국 코미디인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MASH(하나도 안웃김), 그나마 쉬운 디즈니 채널까지.


세번째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학교 교과서를,

전자사전으로 한국어 뜻 찾아가면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생물이랑 화학은 진짜...한국어로 번역을 해도 모르겠는데.

내가 꽃혔던 것은 영문학 교과서였다. 단편 소설과 시, '이야기'들이었으니까. 처음으로 에드거 엘런 포의 시를 읽었었다. 단어를 모르니까 정말 천천히 한장한장 읽었는데, 나중에는 점점 속도가 붙었다. 처음으로 원서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네번째로, '내'가 아주 간절히 가고 싶어한 미국이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도 포기하는 사람도 많고, 인터넷으로 한국과 연락만 하고 돌아갈 때까지 버틸 수도 있다. 만약 우리 부모님이 가라고 해서 갔다면 나는 진작 울면서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절실하게 원해서 갔기에 결국 현지에 적응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토종 한국인이면서 영어를 잘 하냐, 라는 식으로 물을 때

어렸을 때, 미국에 1년 갔다 왔다고 하면 그래서 잘 하는구나,라고 쉽게 치부해 버린다.

살아보면 알겠지만, 영어권 국가에서 1년 살았다고 영어가 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24시간 영어에만 노출되는게 쉽지 않다.

한국인 가족이나 친구가 있으면 한국어를 쓰게 된다. 특히나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은 몸은 외국에 있어도 정신은 한국에 있기가 아주 쉽다. 영어권 국가로 워홀와서도 이런 이유로 영어 실력은 많이 못느는 경우가 많다.



혼자 있어도 마찬가지. 외국인 하우스메이트들이나 호스트 패밀리와 살지 않는 이상, 고요한 방을 계속해서 영어 팟캐스트나 라디오 등으로 채우지 않으면 한국에서 자취하는 것과 똑같다.ㅋㅋㅋ

한국 노래 듣고, 한국 티비 보면서 밥먹고.

밖에 나가서 가끔 영어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으로는 참 쉽지 않다. 그것도 친구와 대화하는 것이나 학교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면 숍에서 생활 영어밖에 못한다.


두번째로 외국에 있어 영어로 말할 기회가 좀 더 많다 뿐이지,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그냥 의사소통 되는 수준의 영어에서 머무르기 십상이다. 어휘도 계속 늘려야 하고, 표현법도 외우고 대화에서 써먹어야 한다.

아니면 똑같은 수준의 영어 수준으로만 대화하다 거기서 끝난다.


암스테르담 뮤지엄 도서관


나는 미국이 아니라 오히려 대학교 때 혼자 공부하면서 영어가 늘었다.

무자막으로 미드를 정말 엄청 많이 봤고(인생을 참 아깝게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었었지...공부로 본게 아니라 취미 혹은 집착으로 본 거라)

영어 자격증 시험 공부를 이것저것 끊임없이 했었다. 그것도 나에게는 좀 취미같은 거였다.

스트레스 받기보다는 재미있는 챌린지. 토익, 토플, 토익 스피킹, 아이엘츠, GRE...

물론 정말 점수가 꼭 필요하고, 비싼 시험은 압박감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두번 다시 쓰지 않을 지식을 시험 점수 때문에 억지로 공부하는 반면, 나는 시험과 상관없이, 두고두고 써먹을 내 영어실력이 느는 거라 생각했기에 그나마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반대로 나에게는 수학이나 경제, 통계같은 숫자 관련된 과목이 그렇다.ㅠ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과목을 억지로 꾸역꾸역 공부할 때 정말 힘들다.)



어쨌든 영어에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기에

큰 부담없이 해외취직을 하겠다, 유학을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한계를 느꼈다.

한국어로 하면 이겨버릴 수 있는 말싸움을 이기지 못할 때, 한국어로 하면 더 논리적일 수 있는 주장을 토론에서 펼치지 못할 때, 상황에 맞는 완벽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대강 넘어가야 할 때, 농담 따먹기를 자유롭게 하지 못할 때.


유학생활을 하면서는 수업시간에 하고 싶은 발언을 속 시원히 하지 못할 때, 논문을 읽는 것이 몇시간이 걸릴 때, 영어로 아카데믹한 글을 쓰는게 너무나 힘겨울 때, 추가로 내 영어의 한계를 느낀다.


아, 영어여, 대체 언제까지 너를 공부해야 하는 것이냐.



그나마 '개인' 과제면 괜찮은데, 영어로 '팀' 프로젝트를 해야 하면

영어에 대한 압박감이 좀 더 심해진다.


온통 원어민인 애들 틈바구니에서는 내가 더 자신감을 잃을 것 같아서 사실 북유럽을 선택한 것도 있다.

영어를 잘 하지만 그나마 얘네는 원어민은 아니니까 그렇게 기죽지 말자, 하고.

확실히 영어권 국가보다 학생들의 영어 수준이 좀 더 다양하다.



그런데 한편 이게 또 팀 프로젝트를 할 때 영향을 끼친다.

한 팀내에 사람마다 다른 학문적 이해도와 공부에 대한 열정 뿐 아니라, 영어 실력 차이가 공존하다 보니

서로 결과에 대한 기대치가 충돌하기 마련이다.


한국에서 팀 프로젝트를 할 때는 문제만 대강 이해하고 첫 미팅에서 만나서 브레인스토밍부터 시작했다.

그래도 충분히 나의 주장과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어'로 팀 프로젝트를 할 때는, 첫 미팅부터 내가 생각한 바를 미리 연구해서 정리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게 되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자고 주장하는 다른 팀원을 따라가야 한다. 나중에 내 생각대로 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라는 후회를 가지고 마무리하느니 내 의견을 본격적으로 내는게 낫다.

그리고 버벅거리면서 내 의견을 말해봤자 무시당하니까 미리 준비를 해 가지고 가는 것이다.

또 그놈의 '아시안 애들은 조용하고 말도 안한다' 는 이야기도 듣기 싫기도 하다.



그래서 나름 팀 프로젝트를 할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열심히 준비를 해 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이 항상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팀 프로젝트는 내가 (준비를 해 왔으니까) 끌고 가다시피 하는 느낌을 받는다.

얘들아, 안 그래도 나도 내 실력에 자신이 없는데 누가 뒷받침해 줘야 할 것 아니니. 그렇게 두손 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하염없이 스몰토크만 하거나, 진전 없는 아이디어만 계속 던진다.

얘들아, 우리 결정을 내려서 구체화를 시켜야 할 것 아니야....

결국 내가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방향을 제시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그래 하고 내가 분배해주는 역할을 받겠다는 팀원들.

거기다 찾은 자료나 쓴 드래프트를 보면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결국 내가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그나마 손봐주다보면 80% 이상은 내가 쓰는 느낌이다.

거기에 시간 관념 없거나 딱히 동기 부여 안된 애들은 심지어 스케줄에 맞춰서 자기 파트를 다 쓰지도 않는다. 그러면 또 푸시까지 해야 한다. 한번은 12시 최종 제출인데 11시 30분까지 본인 파트를 안써서 영상통화 하면서 마감 시킨 적도 있다!

왜 나만 일하고 있지 팀.



어떤 팀에서는 그래도 나 말고도 다른 리더가 있어서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여전히 50% 이상은 내가 하는 느낌이고, 시간 없다고 팀 미팅 잡기조차 어려울 때 더 열받는다.

대부분 이런 무임 승차자들은 성적도 간신히 패스할 정도만 받아서 졸업하기만을 목표로 두고 있기에 과제 퀄리티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하긴 이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반대인 팀도 있다.

나빼고 천재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 수준에 맞추려고 전전긍긍하는 팀.

무조건 졸업할 때 우수성적자로 졸업하겠다라는 목표도 뚜렷한데다 완벽주의까지 있는 팀원들이면.

정말 피곤하다.

이 정도면 됐지 대체 왜 이 과제 하나에 목을 매서 거의 저널에 기고할 수준으로,

어디까지 완벽하게 하려는 거야.....ㅠㅠㅠ

물론 좋다. 점수가 좋을 거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내 시간을 이 팀 프로젝트 하나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점점 시키는 일만 하게 되고 자신감도 떨어진다.

내가 해 봤자 팀에서 다 고쳐버리니까.

스스로가 무능력하게 느껴지고 이러다가 나중에 팀원 피드백에서 '도움 안됐음'이라고 평가 받을까봐 또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한번은 영어실력이 톱인 둘이서(원어민과 원어민 수준) 영어 실력이 안되는 애들이 어떻게 이 프로그램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내 앞에서 막 뒷담화(..)를 하길래

내가 '혹시 너희들 내 얘기 하는 거니 찔리잖아'라고 말 한 적이 있다.

뒷담화 당할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애들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는게 사실이라 영어 공부에 자극이 되긴 했다.



자괴감을 느낄 것인가 소처럼 일할 것인가

어느 팀이 나은 것인가



그런데 이번 학기, 운이 좋게 지금까지 했던 팀 중에서 가장 마음이 맞는 팀을 만났다.

에이프와 로미 그리고 나는 영어 실력도 비슷하고, 셋 다 비슷한 수준의 열정을 가지고 있고(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수준), 무엇보다 행동파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하는 모든 팀 프로젝트들이 술술 풀린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다른 팀들에서는 잡음이 들리고 팀원들 간 불화가 클래스 내에서 가십처럼 돌아다닌다.

그럴 수록 우리 팀은 서로에게 너무 만족한다.

각자 다른 팀에서 다들 고생한 적이 있어서 이번 팀원들이 얼마나 모든 면에서 '괜찮은' 수준인지 알고 있다.

서로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교수님이 임의로 맺어준 팀인데 이런 팀을 만날 줄 몰랐다.


신기하게도 우리 팀과 대화하면 내 스스로 내뱉는 영어가 어리버리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설사 애매모호하게 나오는 말이라도 로미와 에이프는 내 말을 주의깊게 듣고 무슨말인지 정확히 이해해 준다.


그래서 나의 자신감이 더 상승하고, 나의 마음이 더 편해지고, 더 자유롭게 영어가 나오는지도 모른다.

팀 프로젝트 결과도 항상 좋고 말이다.

마음 잘 맞는 팀에서 나오는 시너지 효과를 확실히 느끼고 있다.


사실 영어때문에 브런치에 한동안 글을 쓰지 않고, 쓸까 말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한국어로 글을 쓰면 나도 모르게 한국어에 풍덩 빠지게 되어 영어는 뒷전이 되고 만다. (네덜란드어는 커녕...)

bilingual 이중언어로 사는게 쉽지 않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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