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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싱글 유학 그리고 겨울

[12월 첫째주]

by ClaraSue


네덜란드에서 맞는 가을의 정취를 느낄 새도 없이,

학교 공부와 코로나 때문에 혼란스러운 와중에 악명높은 북유럽의 겨울이 찾아왔다.

11월 말까지만 해도,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이 정도면 충분히 겨울도 버틸만 하겠는데? 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

5도 이하로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슬슬 밖에 나가기가 싫어졌다.



안그래도 추운 날에는 꼼짝 못하는 사람인데 날씨까지 축축하다.

여기는 겨울이 '우기'이기도 한건지, 비가 시도때도 없이 내리고 더 추우면 눈비까지 온다.

아침부터 비가 오면 해가 떴는지 안떴는지도 모르게 우중충한 하루가 시작되고,

구름이 잔뜩 껴 햇빛 자체를 아예 보지 못하는 날도 일주일에 절반은 되는 것 같다.

해는 또 왜이렇게 짧은지, 오전 7시 반이 되어야 동이 트기 시작하고 그나마 회색빛이던 하늘도

오후 5시가 넘어가면 온전히 어둠으로 변해 버린다.

어두컴컴하다 어두컴컴해.



그러다 가끔 푸른 하늘이 보이면 추운 날씨고 뭐고 너무 반가워서

밖에 따뜻한 음료를 들고 앉아 자연광을 즐기고 싶다.

겨울이 참 우울할 거라는 각오는 하고 왔지만 이렇게 빛이 없을 줄이야.

시계를 보지 않으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겠고,

추적추적 시도때도 없이 내리는 비는 사람을 더 우울하게 만든다.

가을 탄다는 말처럼, 여긴 겨울 탄다는 말이 있는데

가을 타는 것보다 훨씬 음울한 뜻으로 겨울에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겨울 되면 비타민 챙기기, 테라피스트랑 상담하기 등을 지원해서 겨울 자살률을 낮춰가고있다고 한다.

사실 날씨가 내가 네덜란드에 오래 정착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더 밝고 따뜻한 곳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한번 경험해보고도 싶었다. 얼마나 어둡고 추운 기간인지.

극도로 '밝고 따뜻한' 호주 퀸즐랜드를 그 날씨가 지긋지긋해질 만큼 누려보고 나니 정반대에도 호기심이 생겼달까.



점점 어둡고 차가운 네덜란드의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어째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gezellig' (흐젤른) 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다.

gezellig은 한국어로 직역하면 '아늑한'이라고 나오는데, 영어로는 'cozy' or 'inviting' 으로밖에 번역이 안되는 단어다. 이 단어가 바로 네덜란드 문화를 한마디로 표현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 하는데, 어떤 장소나 이벤트가 정말 아늑하고 포근할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분위기를 말한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갬성'이 넘치는 분위기,

친한 친구끼리 오손도손 둘러 앉아 수다 떨면서 귤 까먹는 것 같은 분위기,

할머니 손때가 곳곳에 묻은 할머니 집같은 분위기.

인더스트리얼리즘, 모더니즘과는 정반대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gezellig의 가장 큰 포인트는 바로 조명인데, 우리나라 편의점에 설치된 것 같은 낮인지 밤인지 모르게 환한 LED 조명은 절대 안된다. (먼지가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도 않아서)마음이 편한 낮은 채도의 조명.

직접 조명보다는 간접 조명, 흔들리는 촛불과 줄줄이 엮인 파티라이트 감성 조명이 핵심이다.




나는 형광등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인'인지라,

이 집에 이사오자마자 천장에 환한 등을 달아달라 집주인에게 요구했었다.

이미 천장 등과 연결된 스위치가 있어 쉽게 해결되긴 했지만, 집주인과 더치 친구들은 굳이 필요하냐는 반응이었다. 나는 당연한 요구라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천장 등이 없이 산다고 천장 등 달아달라는 사람은 내가 몇년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등이 없이 어두컴컴하게 산다고? 동굴에 사는 사람처럼?!

그건 아니고, 램프를 켜고 산다.



여튼 나도 방을 gezellig 스타일로 아늑하게 꾸몄는데,

겨울이 되면서 아침부터 어두컴컴한 날에는 너무 답답해서 등을 있는대로 다 켜고 대낮처럼 밝게 해 버린다. 어둠속에서 촛불과 간접조명으로 내내 산다고 생각해 보라!

그놈의 '분위기' 있는 것도 한 두번이지,

그렇게 계속 어두컴컴하면, 내 속에서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다.

새벽 감성, 빗소리 감성, 한겨울 감성 말고,

한 낮 감성, 쨍한 피크닉 감성, 녹음이 우거진 한여름 감성이 그립단 말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이 보일 만큼의 밝음을 원한다고!

우리나라 백화점, 쇼핑몰처럼 구석구석 밝게 해 달란 말이야!



어찌됐든, 나에게 흐젤링한 분위기는 늦은 오후부터 저녁, 밤, 새벽이면 충분하다.

하루 종일 그렇게는 못 살겠다.

비가 오고 추우니까 그나마 할 수 있는 야외 활동이 스포츠 센터 가거나 도서관 가는 건데,

그것도 코로나때문에 5시까지밖에 열지 않는다.

날씨와 어두컴컴함이 코로나로 외부 출입도 삼가는 상황과 더불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특히나 다른 사람과의 교류도 없이 나 혼자 집에 있을 때는 더 그렇다.

우울한 기분은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으로 번져간다.

객관적으로 보면 나는 돈도 없고 제대로 된 경력도 없는, 늦깎이 싱글 유학생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모두 결혼하고, 임신은 물론 이미 애가 돌이 지났다.

sns는 온통 결혼 소식, 임신 소식.

내가 간절하게 바라던 것인데 못한게 아니라, 나의 선택으로 하지 않은 일이기에 부러움과 열등감에 휩싸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가끔 의구심은 든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나중에 내가 애를 낳고 싶을 때는 이미 늦어버리는 걸까?


삼십이 넘어 대학원 유학을 오는 사람들은 대개 직장 지원을 받아 가족과 함께 온다.

혹은 부부 둘이 함께 뜻을 맞춰 유학을 온다.

왜 나는 아직껏 함께 할 파트너도 만나지 못했는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차라리 결혼해서 남편 따라 해외로 나가는 삶을 목표로 하는 게 나았을까.



남편까진 아니더라도 남자친구를 사귀라고 하는데,

코시국에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나말고 다른 사람들은 네덜란드 파트너도 잘 만나는 것 같네.

내가 너무 몸을 사리는 걸까.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나.

하지만 어디까지 연애를 위해 나의 시간과 감정을 투자할 수 있나.



함께 수업을 듣는 미국인 친구가 1월부터 인턴십을 시작한다고 한다.

그 친구는 네덜란드에 머물고 싶어서 학위를 시작한 것이고, 공부보다 취직이 우선이기에 훨씬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알아보긴 했지만,

그래도 갑자기 그 말을 들으니 초조해진다.

나도 하루빨리 취업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야?



아직 한 학기도 안끝냈는데 벌써부터 이력서를 제출하기 시작해야 하다니.

내가 일을 하면서 논문을 쓸 수 있을까.

논문을 쓰고 일을 구하기 시작하면 너무 늦는 걸까.

학위 말고 이쪽 분야에서 아무런 경력도 없는 내가, 서른이 넘은 나이에 취직 할 수 있을까.



유튜브를 보니 투자를 하고 컨텐츠를 만들고 쇼핑몰을 운영해서

내 나이 또래에 '경제적 자유'를 얻었다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이런 젠장. 나는 sns도 못하고, 영상도 못 찍고, (열정만 많은) 똥손이다.

내가 기껏 하는 혼자 글 끄적이기나 영화보기, 영어 논문 읽기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서 생각해봐도

돈이 될 일이 없다.


나는 언제 '내 집'이라는 걸 가질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정착이라도 할 수 있을까.

차도 사고, 고양이도 기르고, 일년에 한두번씩 장거리 여행도 갈 수 있을까.



천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데, 대체 나는 얼마나 더 흔들려야 되는 걸까.






코로나는 아닌데 며칠동안 목이 간질간질 해서 몸을 사린다고 방에만 있다가

드디어 분위기 전환도 할 겸 산책을 나섰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진다.

크리스마스 기간이 다가오니 가게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껏 난다.

갖가지 선물들, 반짝거리는 조명, 트리, 산타, 초콜릿, 캐롤, 엘프들...




자칫하다간 네덜란드에서 방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게 생겼다.

학교 과제 하고, 페이퍼 읽고, 글 쓰고, 영화보고....현대인들의 삶이 그렇다.

어디에 있든 상관 없이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는 삶.

한국에 있든, 네덜란드에 있든, 취직을 했든, 학생이든, 백수든

여전히 나는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그러다 또 이렇게 소소한 것들-크리스마스 기간의 산책같은 것들-로 흔들림을 흥겨움으로 바꾸어 나가면서

그렇게 다 각자 살아나가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더라.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고충을 가지고 흔들리고, 그러면서도 또 간간히 행복해 하면서 살고 있더라.



가족들에게 보낼 크리스마스 선물과

크리스마스 장식을 대신할 포인세티아 화분을 2유로도 안되는 가격에 사 왔다.

빨간 색깔이 방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느낌.

12월의 우울함을 이겨내게 해주는 gezellig한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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