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아- 이제 가진 것을 다 내놓으시지.”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키가 큰 데다 적당한 몸매, 햇볕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 정열이 흘러넘치는 녹색의 눈동자 거기다 더할 나위 없는 당당함. 레스휘나는 그가 참으로 잘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하기로 생각했다.
“싫어.”
소녀답다면 소녀 다울 예쁜 목소리가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는 그 잘생긴 얼굴을 돌려 레스휘나를 쳐다보았다. 레스휘나는 그가 자신을 쳐다보건 쳐다보지 않건 신경 쓰지 않고 새우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는 레스휘나를 쳐다보다가 주변에 앉아 있는 두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조심스러운 추리력으로 그들의 관계를 짐작해 보고는 크게 웃었다.
시링크스는 혼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서 호탕하게 웃고 있는 저분이 아까 앞에 나설 때부터 불안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감은 적중했고, 이젠 호탕하게 웃고 계시는 저분을 보고 있자니 불안감과 더불어 삶의 무상감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다리를 꼬고 ‘나 지금 화나기 41초 전이예요.’라는 표정으로 가만히 저분을 바라보고 있는 여동생, 레스휘나를 쳐다보았다. 절대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는 과거를 되짚어 보기로 생각했다.
땡볕이 내리쬐고 있는 여름이었다. 짧은 검은 머리의 소년이 비틀비틀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시링크스 가드리안. 가드리안가의 차남이다. 흑단 같은 새까만 그리고 삐죽삐죽 삐쳐버린 짧은 머리, 상아빛의 매끈한 피부, 햇빛에 비쳐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보라색이 묻어나는 파란 눈, 전체적으로 말랐지만 살은 적당한 편이랄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소년의 인상은 참 ‘귀엽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외양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누가 말했었던가. 연약해 보이는 그는 실은 전설 속에서나 전해 내려오는 드래곤이라는 존재였다. 단지 생활의 편리성(?)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그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다니는 편이었기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귀여운 꼬마’ 정도로 인식되어있지만, 그들은 이 ‘귀여운 꼬마’가 절대 조금도 늙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검은 머리의 소년, 시링크스는 문득 자신이 땀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굵은 땀방울들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입고 있던 재킷 하나를 벗었다. 그래도 별로 더움이 가시질 않자 부채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나무 그늘에 털썩 앉아버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서 그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이 참에 확 짧게 잘라버릴까?’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니 고민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의 고민은 시작도 되기 전에 중단되어 버렸다.
“시스. 시스.”
시링크스를 부른 사람은 바로 그의 형 세르시우스였다. 그는 큰 키에 하얀 피부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건장한 남자였다. 그의 왼쪽 눈은 흑갈색 안대로 가려져 있고 그 안대의 아래쪽 뺨에는 검붉은 흉터가 깊게 패여 있었다. 아마 그의 안대는 그 흉터를 가리기 위함이리라. 그는 그 상처를 흑요석 같은 검은 머리카락으로 반쯤 덮어 두었다. 날카롭지만 무섭지는 않은 매끄러운 눈매의 오른쪽 눈동자는 청금색으로 햇빛 아래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하얀 얼굴 역시 더위에 젖어 있었다. 세르시우스 역시 드래곤으로서 실제로 시링크스보다 얼마나 먼저 태어났는지는 모른다. 그저 겉보기엔 많아봤자 8살 정도라는 것이다.
“좋은 소식이 있어.”
세르시우스가 싱글싱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시링크스에게 백황색의 봉투를 건넸다. 봉투는 고급스러운 빳빳한 종이로 만들어져 있고 역시 고급스러운 금빛을 반짝이는 잉크로 ‘하즈엘 카민 아소반’이라고 보내는 사람 편에 쓰여 있었다. 시링크스의 얼굴에 잠시 반가운 기색이 흘렀다. 그는 아소반 가문의 문장이 찍힌 붉은 밀랍을 뜯어 속에 들어있는 딱딱한 카드를 꺼내 보았다. 카드의 겉에는 ‘초대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얀 속지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가드리안가의 나의 자랑스러운 벗, 시링크스에게.
오랜만에 네게 편지를 부친다.
이번에 내 생일을 맞이해서 간소한 파티를 열까 생각하고 있는데,
시간이 난다면 놀러와 주지 않겠어?
날짜는 내 생일 당일이고, 우리 집에서 파티를 할 생각인데,
올 수 있다면 답장으로 여부를 알려줘.
세르시우스님과 레스휘나 님께도 안부를 전해줘.
너의 벗, 하즈엘 카민 아소반으로부터
“대체 이게 어딜 봐서 초대장이야.”
시링크스가 투덜투덜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즈엘의 초대장은 초대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짧은 편지라고 부르기에 알맞았다. 세르시우스는 시링크스로부터 초대장을 건네받아 내용을 훑어보았다.
“아아, 하즈엘의 생일이구나.”
세르시우스는 혼자서 몇 마디 중얼거렸다. 시링크스는 가만히 하즈엘의 생일을 손으로 꼽아 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깐! 한 달도 안 남았잖아? 여기서 아소반 공작 영지에 가려면 최소한 34일이라고!”
그의 생일을 생각해서는 답장을 보낼 시간도 없이 당장 채비를 갖추고 떠나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대체 이 초대장은 언제 써서 붙인 거람?”
그는 불평을 내뱉으며 초대장을 봉투에 집어넣었다.
“세스형은 갈 거야? 나는 오랜만에 하즈를 만나보기도 할 겸 생일에 늦더라도 갈 건데.”
시링크스가 세르시우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세르시우스는 나무에 기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아아- 글쎄. 하즈엘의 파티라면 역시 맛있는 건 많겠지?”
세르시우스다운 물음이었다. 시링크스는 ‘그럴 것 같았다’는 듯이 하하 웃더니 문득 여동생을 떠올렸다.
“레스는 어떨까? 그 녀석이라면 좋아할 텐데.”
시링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르시우스는 그의 의견에 동감한다는 듯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말하는 레스란 바로 세 남매의 막내이자 두 사람의 여동생인 레스휘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얼마 전에 ‘놀러 갔다 올게’라는 쪽지 한 장만 식탁 위에 남겨두고 사라져 버려 두 사람은 그녀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근처에 있지 않을까. 집에서 나간 것도 얼마 전이고.”
세르시우스는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뭐 가다가 만나면 데려가자. ‘자는 사람 몫은 있어도 나간 사람 몫은 없다.’잖아.”
“…….”
세르시우스는 굳이 시링크스의 말을 꼬집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로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시링크스는 그런 형의 표정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었다. 그는 땀에 젖은 재킷을 손에 들고 천천히 집을 향해 발을 옮겼다. 세르시우스도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좀 더 하늘 높이 떠오른 햇살이 그들의 등을 뜨겁게 비추고 있었다.
귀족의 별장이라고 생각할 만큼 손질 잘된 정원의 나무들이 그들을 먼저 맞이했다. 여름이기 때문인지 짙푸른 녹색이 더위를 한결 가시게 하는 것 같았다. 세르시우스와 시링크스는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가면서 ‘후우-’하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푸른 정원의 안쪽에는 새하얀 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르시우스와 시링크스, 그리고 그들의 여동생인 레스휘나 이 세 사람이 살기에는 상당히 큰 저택이었다. 보통의 저택이라면 하인이나 집사라도 두는 법이지만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용하지 않았다. 시링크스가 단단한 재질의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문의 금색 손잡이를 힘껏 열자 시원한 바람이 살짝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집 안은 밖에 비해 상당히 시원한 편이었다. 시링크스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욕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시스! 세스 오빠!”
집에 돌아온 두 사람에게 반가운 인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긴 검은 머리의 소녀가 생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긴 검은 머리는 허리를 넘어 엉덩이까지 길게 내려오고, 끝은 크게 웨이브 져있었다. 두 눈은 파란 밤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깊은 파란색이었고, 이지적이고 약간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몸은 허약해 보일 정도로 말랐지만 혈색이 잘 도는 복숭앗빛 피부에 전혀 허약해 보이지 않았다. 바디라인을 적당히 드러내는 짧은 재킷에 과감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모습에는 자신감과 건강함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다름 아닌 그들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레스휘나였다.
“어머, 어디 갔다 왔기에 땀투성이야?”
레스휘나가 땀에 절여지다 못해 빨갛게 달아오른 두 사람을 보고 키득키득 웃으며 욕실에서 수건을 꺼내 왔다.
“하하 둘 다 명란젓 같아.”
그녀는 계속 까르르 웃으면서 시링크스의 얼굴을 마른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수건으로 세르시우스의 얼굴―그는 키가 컸기 때문에 그녀의 편의를 위해 약간 다리를 굽혀주었다―도 닦아주었다.
“이렇게 말썽만 부릴까 봐 두 오빠만 남기고 놀러 가기가 걱정됐었는데.”
그녀가 작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하지만 ‘놀러 갔다 올게.’라는 쪽지 달랑 하나만 남기고 놀러 갔었던 그녀의 행동을 떠올려보면 걱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고 세르시우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인상을 약간 찌푸릴 뿐 딱히 말하거나 하지 않았다. 시링크스는 입고 있는 셔츠를 훌렁 벗어버렸다. 땀내와 함께 그의 매끈한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꺅. 나 이래 봬도 여자야 시스. 훌렁훌렁 벗지 마!”
레스휘나가 시링크스에게 소리쳤다.
“하루 이틀 본사이도 아닌데 뭐 어때. 어렸을 땐 같이 목욕도 했잖아.”
시링크스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 레스휘나의 손에서 수건을 뺏어 땀투성이인 몸을 닦기 시작했다.
“닦아서 말릴 생각이라면 당장 포기해.”
레스휘나가 두 눈에 힘을 주며 시링크스에게 말했다. 시링크스는 입을 좀 더 내밀고는 웅얼웅얼 불평을 입에 담으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세르시우스는 닫힌 욕실문과 레스휘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땀을 마저 닦았다.
“아앗! 하즈엘의 편지잖아!”
세르시우스의 손에 들린 백황색의 고급스러운 봉투를 발견한 레스휘나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봉투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봉투를 열어 초대장을 꺼내 까만 글씨들을 좇기 시작했다. 그 짧은 편지글을 다 읽은 레스휘나는 만족한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어머, 곧 하즈엘의 생일이구나. 파티라니, 즐겁겠는걸!”
그녀는 ‘어떤 옷이 좋을까?’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넓은 홀에 남겨진 세르시우스는 시링크스의 샤워가 끝날 때를 기다리지 않고 다른 욕실을 찾아 발을 옮겼다.
잠시 후, 세 남매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응접실에 모여 앉아 있었다. 먼저 샤워를 마친 시링크스는 가방을 벌써 챙기고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면서 책을 읽고 있었고, 레스휘나는 가방에 채 못 들어간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쑤셔 넣고 있었다. 그리고 세르시우스는 다 잠그지 않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잠가가며 생각하고 있었다.
‘집을 오래 비우면 역시 안 좋겠지?’
세 남매가 동시에 집을 떠나는 경우는 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하나 해야 할 것을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재산이야 금고에 안전하게 들어있을 테니 누가 손대지 못할 것이고, 세 사람이 사는 집이다 보니 집의 크기에 비하면 가져갈 것이 턱도 없이 부족한 편이랄까.
“하긴 이런 변방에 있는 집에 누가 오기나 하겠어?”
집으로 오는 바른 길 하나조차 나지 않은 외진 곳이니 멧돼지의 공격에도 무사할 사람이 아닌 이상 이 곳에 위험을 무릅쓰고 도둑질을 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후련해지는 세르시우스였다.
“세스 오빠. 준비 안 해?”
옷 쑤셔 넣기를 완료했는지 레스휘나가 손을 탁탁 털면서 세르시우스에게 물었다. 세르시우스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리다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작은 가방에 간단한 옷가지와 여비를 챙겨 넣었다. 그가 다시 응접실로 돌아오자 레스휘나는 ‘출발!’이라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시링크스는 읽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하얀 저택을 나서며 세르시우스는 검은 문을 닫았다. 찰칵하고 돌아가는 문손잡이의 소리가 왠지 그들을 배웅해주는 것 같아 그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무 정원을 지나자 뜨거운 햇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레스휘나는 레이스가 달린 흰색 양산을 우아하게 펼쳐 보였다.
“한 사람 정도는 같이 있어도 괜찮은데.”
그녀가 생긋 웃으면서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그거 들어달라고 할 셈이겠지. 됐어, 사양할래.”
시링크스가 레스휘나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그러나 레스휘나는 싫은 기색을 보이기보다는 ‘흐응’하고 코웃음을 쳤다. 분명 십 분이 지나면 그가 ‘제발 들어줄 테니까 같이 써.’라고 말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세르시우스는 귀여운 두 동생의 재롱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출발은 좋았다.’고 시링크스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