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밭길 생일파티 #6

#6

by Clare Kang

“그러니까 하즈엘 공의 집에 가고 계신 거군요.”


자신을 이샤라고 소개한 큰 저택의 주인 소녀는 방긋 웃으며 찻잔을 시링크스의 앞에 내려두었다. 시링크스는 비누 2호의 흔적을 날달걀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응접실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앉아 이샤가 끓여온 차를 마시며 그녀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샤는 긴 귤색 머리카락에 오닉스처럼 검은 눈의 누가 봐도 예쁘다고 할 만한 예쁜 소녀였다.


“그보다 혼자 계시면서 이렇게 불을 다 켜놓으면 돈이 많이 들지 않나요?”


세르시우스가 물었다.


“혼자 있으니까 어두우면 무섭거든요.”


이샤가 찻숟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대답했다.


‘그 비누 던지는 솜씨만 있어도 절대 위험하진 않을 거예요, 이샤.’


세르시우스는 미소 지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나저나 굉장하네요. 검은 수리의 경호를 받는 분들이라니. 엄청난 가문인가 봐요.”


이샤가 한쪽에서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차를 마시고 있는 홀리를 힐끗 쳐다보면서 감탄을 내뱉었다.


“아뇨. 홀리 경은 그냥 우연히 동행해 주시는 겁니다.”


세르시우스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희는 별 볼일 없는 조그만 가문인걸요.”

“에? 하지만 하즈엘 공의 초대도 받았는데요? 하즈엘 공이 이름 없는 가문을 초대 할리는 없을 테고.”


이샤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르시우스가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시링크스는 말없이 레스휘나를 쳐다보았지만 ‘뭘 봐?’라고 말하는 듯 한 그녀의 표정에 다시 고개를 돌려 세르시우스를 쳐다보았다.


“하즈엘 공과는 예전에 어떤 일을 계기로 조금 친분이 생겼습니다. 뭐 이렇게 세심하게 챙겨주시니 저희는 고마울 따름이죠.”


그는 영업용 어색한 스마일을 날리며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분위기가 착잡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낀 레스휘나가 발랄하게 입을 열었다.


“이샤. 갑자기 죄송하지만 지금 욕실을 좀 빌려 써도 괜찮아요?”


이샤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레스휘나는 이샤의 한쪽 팔을 붙잡고 소파에서 끌어내렸다.


“아, 같이 하고 싶으시다고요? 뭐 상관은 없지만 좀 놀랄지도 몰라요.”


레스휘나는 혼자 신나게 떠들면서 입을 뻐끔뻐끔하는 이샤를 데리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레스휘나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응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찻잔을 비우면서 시링크스가 침묵을 깼다.


“하즈 말이야, 실은 굉장한 사람인가 봐?”

“그러게.”


세르시우스가 고개를 뒤로 젖혀 소파에 몸을 푹 기대면서 대답했다. 푹신한 느낌이 싫지 않다. 어떤 짐승의 가죽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급스럽게 잘 무두질되어 맞닿아 있는 살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것 같았다.


“하즈엘 공은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젊은데 부자가 됐다는 의미인가요?”


시링크스가 물었다.


“그런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분은 개국 공신이 아니니까요.”


시링크스가 조금 더 설명해 달라는 듯 한 표정을 짓자 홀리눈 두 손을 깍지 껴서 바르게 무릎 위에 올린 뒤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이 제국은 황제의 피가 이루어낸 거죠?”

“아, 네에.”

“그때 황제와 같이 피를 흘린 사람들에겐 당연히 그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겠죠. 자신이 흘린 피의 양만큼 말이죠. 하지만 하즈엘 공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는 홀연히 황제폐하의 곁에 나타난 사람이죠.”


홀리는 시선을 두 사람에서 창밖으로 천천히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분의 이름이 알려질 때는 저도 어렸기 때문에 기억은 잘 안 납니다. 하지만 그분이 나타나고 나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건 분명히 기억합니다. 제국 티아아를 보면 주변국에 비해 역사가 짧은 편입니다. 물론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긴 하지만요. 제국은 가지가 많은 큰 나무입니다. 끊임없이 주변국과의 전쟁에 시달려야 했고, 수많은 백성의 원망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제국은 말라비틀어져 언젠가 곧 그 수명의 끝이 곧 찾아올 거라고 모두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그랬던 제국이 어느 날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주변국들의 침략이 줄어들고 백성의 원망이 잦아들었습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하즈엘 공이 서 있었습니다. 제국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물론 아직도 몇몇 주변국의 침략을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때만큼은 아닙니다. 하즈엘 공을 직접 만나보셨으면 아시겠지만, 그에게서는 우리와는 다른 분위기가 흐릅니다. 지금 나라에 있어 하즈엘 공은 폐하 다음으로 중요한 위인이니까요.”


홀리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하하. 위인… 이라니까 왠지 엄청나게 굉장한 사람 같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걸 왜 신기해하는 건지 이제 좀 이해가 가네요.”


시링크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홀리는 생긋 웃어 보였다.




“아- 저어 죄송하지만 목욕은 레스휘나님 혼자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샤는 대단히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앞서 억지로 그녀의 팔을 끌고 가던 레스휘나가 그녀의 팔목을 붙잡은 손을 놓으면서 돌아섰다.


“왜요? 같이 하면 등도 밀어주고 좋잖아요.”


레스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샤는 머뭇머뭇거리다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실은 저 커다란 흉터가 있어서요.”

“그런 건 괜찮아요.”

“아뇨 제가 안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역시 혼자 하세요.”


미간을 약간 찌푸린 레스휘나의 표정을 못 본채 하며 이샤는 그녀를 억지로 욕실에 밀어 넣었다.


“편하고 느긋하게 하셔요.”


그리고 이샤는 문을 닫았다. 혹시 레스휘나가 문을 열고 나올까 잠시 기다렸지만 그녀가 나오지 않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다가 서재에 들어갔다.


“제 용품을 그렇게 허락하시면 곤란해요.”

“하아- 어쩔 수 없다고.”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나온 소리에 이샤는 놀라지도 않고 대꾸했다. 먼지 쌓인 책들이 가득 올려져 있는 낡은 책상에 걸터앉아 그녀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보다 미안해. 괜히 그 시간에 목욕 같은 걸 해서…….”

“아냐, 괜찮아.”


책장이 만들어낸 그늘 속에서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창백한 달빛에 그의 외모는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아직 성인이 채 되지 못한 소년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왠지 슬퍼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책이 한 권 들려있었다. 그는 이샤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짚어 주며 말했다.


“그래서 이 야심한 시간에 찾아온 사람들은 누구?”

“그게 좀 이상해. 하즈엘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인데, 자기들 가문은 알려지지 않았대. 그런데 또 제국 기사가 호위해 주는 거 있지? 자기들 말로는 ‘어쩌다 만났어요.’라는데, 솔직히 그게 말이나 되는 것 같아?”

“흐음. 하긴 하즈엘정도를 만나려면 하다못해 지방 영주 급이라도 돼야 하긴 하겠지.”

“그러니까. 그래서 좀 더 물어보려고 했더니 어물쩍 화제를 돌려버리는 것 같고. 뭔가 비밀이 있어.”


이샤는 탐정이 사건을 수사하듯 갸름한 오른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소년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빈 책장에 꽂으면서 웃었다.


“그러면 난 뭘 할까?”


이샤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소년은 쿡쿡 웃었다. 그는 책장에서 또 다른 책을 한 권 꺼내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그들에게 실례가 될 거야. 얼른 돌아가 봐. 난 여기서 내가 할 일을 할게.”

“으응.”


이샤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옷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낸 후 그녀는 소년에게 인사하고 서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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