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흐아암”
새까만 머리가 형편없이 헝클어진 소년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밤새 따뜻하게 자신을 덮어준 이불을 옆에서 계속 자고 있는 검은머리의 소녀에게 적당히 덮어주고 침대 옆의 푹신한 슬리퍼를 신고 일어섰다. 그는 잠시 옆에 잠들어있는 소녀의 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방 밖으로 나왔다.
“레스가 언제부터 내 옆에서 잤지?”
소년, 시링크스는 의문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걸어 나온 방문을 흘낏 쳐다보았다. 분명 어젯밤 이샤가 안내해 준 방이 틀림없었다. '뭐, 레스가 추웠나 보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팔을 쭉 뻗어 휘두르면서 복도의 창문 하나를 활짝 열었다. 해가 막 뜨고 있는 새벽이라 그런지 꽤 차가운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시링크스는 깊이 호흡을 하며 느릿하게 떠오르는 해를 쳐다보았다. 파란하늘이 햇빛에 섞여 눈부신 보라색 물감이 되어 흰 구름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새벽의 하늘을 가로질러 새 몇 마리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상쾌해진 기분으로 그는 창문을 다시닫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계단으로 내려갔다.
“어머, 일찍 일어나셨네요.”
이샤가 귀여운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그를 맞이했다. 시링크스도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샤. 좋은 아침이죠?”
“아침은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금 준비 중이니까요. 오랜만의 손님들이라 그런지 조금 걱정되네요.”
그녀는 발랄하게 말하며 능숙하게 삶은 계란 세 개를 으깼다.
“도와드릴까요?”
시링크스가 물었다.
“아뇨, 음. 굳이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하지만……. 하하”
이샤는 귀엽게 웃으면서 계란을 으깨던 그릇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시링크스는 나무숟가락으로 계란을 으깨기 시작했다.
“이샤, 굉장해요. 언제 이런 음식들을 다 마련하신 거예요?”
레스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커다란 테이블이 부러지도록 잔뜩 차려진 음식들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솜씨발휘라도 할까 해서요. 손님이 오신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그녀는 자리를 권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시링크스도 도와주셨구요.”
“흐응. 시스가?”
레스휘나가 의외라는 듯이 한 쪽에서 감자샐러드를 포크로 쑤셔대고 있는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자아, 음식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모처럼만에 마련한 만찬이 다 식어버리겠네. 오늘 아침의 주 메뉴는 훈제연어 스테이크랍니다. 여행자들을 위한 이샤의 서비스랄까요, 후훗.”
커다랗고 둥근 테이블에 동그랗게 모두 둘러앉자 이샤는 자랑스럽게 몇 마디 한 후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샤, 잘 먹을게요.”
“저도요.”
그들은 각자 이샤에게 감사를 표하고 포크를 손에 쥐었다. 단 한사람 홀리만이 어느 것에도 손을 대지 않고 멀뚱히 앉아있었다.
“뭔가 안 맞으세요?”
이샤가 홀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홀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잠시 떠오르는 게 있어서요.”
그녀는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몇 번 흔들고는 포크를 손에 쥐었다. 홀리가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베어 무는 것을 지켜본 다음에야 이샤는 편안히 자신의 식사를 시작했다. 그릇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아침식사가 끝나갈 무렵 갑작스럽게 시링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레스. 내 방엔 언제 온거야?”
“응? 뭐가?”
레스휘나는 샐러리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시링크스는 눈썹을 약간 움직였다.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왔잖아.”
“아, 그거. 어제 기억 안나?”
레스휘나가 포크로 경쾌하게 감자튀김을 찍으면서 물었다. 시링크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레스휘나는 ‘그럴 거 같았어’ 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자기 전에 춥다 그랬잖아.”
“그래서?”
“나도 추웠거든. 그래서 같이 잔건데 왜?”
“…….”
테이블이 갑자기 침묵게 빠졌다. 시링크스는 조용히 세르시우스를 쳐다보았다. 세르시우스는 그의 표정이 뭘 말하는지 금세 이해했다. 그들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하던 식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해도 너무 주의력이 없는 여동생, 레스휘나가 걱정이 되는 두 오빠였다.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홀리가 조심스럽게 레스휘나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레스휘나는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시스를 조심해요?”
“아뇨,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하, 괜찮아요. 세스오빠는 착하고 다정하고, 시스는 소심해서 별거 못하니까.”
레스휘나는 킬킬거리면서 소시지를 경단처럼 나이프에 꽂기 시작했다. 홀리는 무언가 제대로 된 충고를 하려고 하다가 생각을 바꾸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뭐라고 하더라도 레스휘나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아래에서의 행동이었다. 이샤는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레스휘나님은 아무나 덥석덥석 잘 믿으셔서 부럽네요.”
“아아 별 칭찬의 말씀을.”
누가 들어도 칭찬의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레스휘나는 스스럼없이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고 소시지들을 입에 베어 물었다.
해가 중천에 떠 느릿느릿 뜨거운 볕들을 마당에 뿌릴 무렵에야 세르시우스들은 이샤의 집에서 나왔다.
“이거 자꾸 신세만 져서 죄송해요.”
이샤가 그들을 위해 정성껏 만들어준 도시락을 받으며 세르시우스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아뇨. 저도 모처럼 즐거웠으니까요. 다음에도 시간이 나면 한번 들려서 놀다 가세요.”
이샤는 해맑게 웃어보였다. 네 사람은 다시 말에 올랐다.
“이샤, 담엔 같이 목욕해요.”
레스휘나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샤는 그런 농담에도 밝게 웃으며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그녀의 정원에서 벗어났다. 그들이 숲의 어둠사이로 사라질 무렵 이샤의 옆에는 한 소년이 서있었다. 갸름한 체구는 지난밤 희미한 달빛아래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그의 짙은 초록색머리카락은 햇빛에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두꺼운 책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왠지 재밌는 사람들 이었어.”
이샤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 거렸다. 소년은 책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수고했어, 아이샤.”
이샤는 활짝 웃으면서 소년의 손을 잡았다.
“가자 리히토. 밥 먹어야지.”
소년은 이샤가 이끄는 대로 따라 저택의 안으로 발을 옮겼다. 참새처럼 이샤가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이샤가 싫지 않은 듯 소년, 리히토는 입가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느릿한 말발굽소리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나무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산새 몇 마리인가만 그 소리에 관심을 가질 뿐 전체적으로 숲은 고요했다. 그 고요함을 견디지 못한 시링크스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아아, 졌다!”
“와하하 시스가 졌다!”
레스휘나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레스, 가만히 있어. 방해돼.”
그녀가 들썩들썩하자 시야에 방해가 되는지 아니면 진 게 분해서 인지 시링크스가 툴툴거렸다. 레스휘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하하, 시스 지금 졌다고 그러는 거지?”
시링크스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의 고삐를 조금 단단히 쥐었다. 레스휘나가 한 번 더 움직였다간 나란히 말에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의 고민을 모르는 레스휘나는 혼자 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면서 스스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녀가 이렇게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샤의 집을 떠나고 얼마 후 홀리를 제외한 세 사람은 심심함이 극도에 달했다. 홀리가 그녀의 친구인 샤우키처럼 말을 많이 한다면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을지도 몰랐지만, 이야기하는 데는 흥미도, 재주도 없는 그녀였기에 그들은 그런 선택지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말을 타고 있기 때문에 경주라도 하면 재밌을지도 모른다고 시링크스가 제안했지만 사방팔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숲이어서 경주는 고사하고 길이나 잃지 않기를 바래야 하는 입장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들은 홀리가 제안한 ‘침묵’이라는 것을 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기사들 사이에서 하는 훈련의 일종이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듯, 기사들에게 있어 필요이상의 말은 쓰레기에 불과했다. 또한 제국기사의 경우 나라 안의 중요한 사항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칫 실수로라도 그런 기밀을 누설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침묵훈련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홀리는 포로로 잡혀갔을 때를 대비한 훈련이라고도 덧붙였다.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단지 입만 다물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사들과는 달리 목적이 없는 그들이었기에 내기사항을 하나 걸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레스휘나의 일일 하인이 되기.’ 어떻게 보면 누가 될지 뻔 한 내기였는지도 모른다. 레스휘나는 그 짧은 시간 못 다한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면서 시스에게 뭘 시킬지 여부를 세르시우스와 정답게 주고받았다. 홀리는 시링크스에게 약간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아! 보인다!”
세르시우스를 선두로 네 사람은 모두 말을 멈췄다. 숲의 끝자락, 그들이 서 있는 언덕 아래로 커다란 도시가 보였다. 저녁 무렵이어서 인지 밥 짓는 연기가 굴뚝마다 피어나고 있는 집들 사이로 개미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샤에게 듣긴 했지만 생각보다 큰 마을이네.”
레스휘나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자자 어서 가자고! 걱정 마 시스. 내일부터 사용할 거니까.”
그녀는 염려 말라는 듯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시링크스는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고삐를 당겼다. 멈춰 섰던 말이 다시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