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슬아슬하게 시험보기 대회가 있다면 나는 우승할 자신이 있다.
소싯적때부터 나는 무신경과 부주의로 인한 의도치 않은 스릴을 즐겨왔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마감 시간 5분 남기고 대학 원서 내기, 비행기 이륙 1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기, 친구가 주선해 준 소개팅 자리에 45분 늦기 등이 있다. 시간을 겨우 겨우 맞췄다 하더라도 직후 몰려오는 후회와 현타는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학습이 느린 내 두뇌는 그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또는 '이 정도면 되겠지' 같은 안일한 근자감에 기대 내게 주어진 기회들을, 포텐셜들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놓치는 행위는 어느 순간 꿉꿉하게 눌러붙은 습관이 되었다.
11월 엘셋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11월 초에 봤던 엘셋을 운좋게 retake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첫 번째 섹션을 거의 다 풀어갈 때 즈음 컴퓨터가 꺼지는 바람에 시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는데 고도의 집중력과 그에 상응하는 체력을 요하는 엘셋에 있어서 이러한 기술적인 에러는 치명적이다. 나는 감독관들에게 이러한 상황을 바로 보고했고 그들 역시 LSAC에 이 문제에 대해서 보고한다고 했다. 나는 집에 가자마자 lsac에 온라인 컴플레인을 넣었고 재시험을 요청했다. 다행히 열흘 후인 11월 18일에 재시험이 잡혔고 나는 이것이 내게 큰 advantage로 작용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아슬아슬하게 살기의 달인이 아닌가!
열흘이란 시간 동안 엘셋에 손 끝, 털 끝 하나 대지 않았다. 기출 문제를 달달 풀어도 모자랄 판에 아예 손을 놓은 셈이다. 긴장이 좀 풀린 것도 있었고 2주간의 휴가가 끝나면서 다시 근무를 시작해야했기에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열흘은 눈 깜짝 할 새에 흘렀고 시험 날이 왔다. 심지어 11월 18일은 화요일, 평일이었는데, 휴가조차 쓰지 않았다. 테스트 센터가 회사로부터 도보 5분 거리 밖에 되지 않아 그냥 시험 마치고 바로 출근해버리지 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엘셋을 무슨 출근 전 삼각김밥이랑 바나나 우유 사러 들리는 편의점 정도로 치부했나 싶기도 하다.
심지어 나는 DC의 출근길 러쉬 아워를 반영하지 못한 채 우버를 불렀고 예상 도착 시간에 1분씩 추가될때마다, 빨간 불에 차례가 걸릴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8시 시험인데 8시 1분에 테스트 센터에 도착해버린 나는 오히려 9층으로 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는 "안 들여보내주면 그냥 박박 우겨버리자"하는 쿨내나는 결단을 내렸다. 다행히 감독관은 묻지도 따지지도 꼽주지도 않고 나를 순수히 들여보내줬다. 신분증 체크를 하고 형식적인 몸 수색을 하고 읽지도 않은 서약서에 서명을 하는 데 걸린 시간은 총 5분. 심지어 scratch paper는 규정 상 6장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감독관이 제대로 체크하지 않아서 7페이지나 줬다 (물론 다 쓰지는 않았다). 여차저차 하여 나는 8시 6분에 내 인생 두 번 째 엘셋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재시험은 인터페이스가 좀 더 구린걸까? 원래 컴퓨터로 보는 엘셋에는 오답이라고 생각되는 답안을 grey out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그런데 재시험에는 그런 기능이 보이지 않았다. 또, 문장에 밑줄을 칠 때마다 1초 정도 랙이 걸렸다. 신경이 조금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재시험의 재시험은 없기 때문에 컴플레인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대한 정신줄을 잡고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근래에 practice test를 풀어보지 않은 탓일까, 시간 분배의 감을 살짝 망각해버렸다. 마지막 logical reasoning 섹션을 풀 때는 초반에 너무 여유를 부린 탓에 마지막 다섯 문제 정도는 시간에 쫓기며 풀었는데, 마지막 한 두 문제는 논리 보다는 상상력에 의거해 풀었다. 대충 읽은 문제에 대한 대충 읽은 답안을 골랐는데 내가 읽었던 문제가, 내가 읽었던 답안이 그게 맞기는 한건지 알 길은 없다. 시험이 끝나고 나는 못내 아쉬운 마음에 자리를 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 logical reasoning이 앞보다 뒤로 갈 수록 난이도가 올라간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앞에 15문제 정도는 막힘 없이 술술 풀었어야 했는데, 괜히 꼼꼼함을 고집하다가 뒤에 시간이 더 소요되는 문제들을 풀 때 얼마 남지 않은 타이머를 보며 약간의 패닉이 와버렸다. 이건 연습을 많이 한 자들은 분명 피할 수 있는 아마추어 실수인데도 나는 그만큼의 연습조차 안 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허무한 마음 반, 홀가분한 마음 반을 안고 11월 엘셋을 끝냈다. 당장 일주일 후에 시험 결과가 나오는데, 미루기의 대마왕인 나는 엘셋 Writing 마저도 미루고 미루다 이 글을 쓰기 한 시간 전에 끝냈다. LSAT Writing을 봐야 시험 결과가 나오고 Writing은 프로세스하는데 최대 3주가 걸림으로 사실은 훨씬 더 일찍 봤어야 했는데 레딧에서 아무개씨가 최대 3일이면 승인이 난다고 해서, 또 이런 아슬아슬한 스케줄을 짜버렸다. Writing 때에는 심지어 Scratch Notes라는 노트 테이킹 기능이 있는데 복붙 기능을 쓸 수 없다는 문구를 무시하고 Control C+V를 시전하려다가 내 아웃라인을 실수로 다 지워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Ctrl C+V가 통하지 않으니 Ctrl+Z도 당연히 안 먹혔다. 영상에 녹화된 나의 벙찐 표정을 보고 감독관들이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까 싶다.
요약하자면, 11월 엘셋은 미흡함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스트레스 받아서 도중에 공부를 놔버리기도 했고, 시험 당일에는 테스트 센터에 늦게 도착하기도 했고, 시간 분배도 능숙하지 못 했고, 쉬울 것 같았던 라이팅에서도 절 뻔 했으니 말이다. 내게 천운이 따른다면, 일주일 후에 나올 11월 엘셋 결과를 추가 시험 없이 그대로 쓸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지금으로써 희박해 보인다. 그래서 1월 엘셋을 신청했다. 정 안되면 2월 엘셋을 봐야할 수도 있다. 다행히 2월 28일 또는 3월 초가 원서 마감일인 학교들이 6개나 있어서 아직 내게 최대 두달 반이란 시간이 남았다. 나는 다시 심기일전할 마음으로 오늘 저녁에 공부 플랜을 짰다. 12월엔 친구들도 좀 보고, 운동도 하고, 연말 분위기도 즐기고 싶었는데 9월, 10월에 했던 것처럼 다시 공부 모드로 돌입해야겠다. 땡스기빙에 크리스마스에 새해까지, 공휴일이 많으니 어쩌면 잘 된 거일 수도 있다. 휴가를 쓰지 않고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니까. 뭐 애초에 남은 휴가도 없지만.
엘셋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주변 지인들한테 털어놓을 때마다 나는 겁이 났다. 내가 엘셋을 준비한다고 할 수 있을만큼 열심히 임하고 있는 걸까?라는 물음에 당당히 예스!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은 시간 동안은 정말 효율적으로,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싶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두 숟갈, 세 숟갈 째에는 아쉬움 없이 허기 정도는 달랠 수도 있는 거니까. 아자아자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