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이자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보스턴 백베이의 심장 코플리 스퀘어에서 서쪽으로 걸으면 펜웨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미국 문화와 예술의 아이콘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미국 보스턴 야구팀 레드 삭스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이다. 다른 한 곳은 한 번 보면 잊지 못하는 이자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이 있다. 사실 펜웨이에 있는 헌팅턴 애비뉴는 예술의 거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심포니 홀과 미국의 3대 미술관중 하나인 보스턴 미술관도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보스턴은 다른 도시에 비해서 녹지 조성이 잘 되어 있는데 펜웨이 파크는 보스턴의 에멀랄드 넥클리스(Emerald Necklace)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보스턴 시민의 삶과 예술, 문화, 사회 이 모든 게 어우러져 하나의 공원이 탄생했다.
(에멜랄드 넥클리스는 9.6㎞의 선형의 녹지공원을 보스턴 시민들은 에메랄드 목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의 설계가인 옴스테드가 보스턴에 남긴 또 하나의 녹색 보석을 남겼다고 하네요. )
이자벨라 스튜어트 가드너는 원래 뉴욕 유복한 집안 출신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보스턴 출신인 존 가드너와 결혼을 하고 보스턴에서 살기 시작한다. 3년 만에 첫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2살이 되던 해에 폐렴으로 죽게 된다. 그 이후 유산의 아픔이 있었고 부부는 의사의 권고대로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 유럽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그곳에서 이자벨라는 스튜어트는 삶에 대한 열정을 다시 회복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예술가와 문학인을 후원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 같다.
비컨힐에서 살았던 그녀는 그녀의 집으로 예술가를 초대해서 강연을 하게 하고 하나의 사교장도 되면서 후원을 마다하지 않는다. 1891년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후 그녀는 예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1898년 남편인 존 가드너가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게 된다.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얻은 자식, 자신을 보호해주고 사랑했던 아버지, 언제나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남편까지 죽게 되자, 이자벨라 스튜어트는 예술품을 미친 듯이 사들이기 시작했고 바로 그때 지금 이자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의 부지를 사게 되면서 남긴 유산으로 미술관을 건립하게 된다. life is short, art is long 이란 표현이 어찌 보면 그녀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막대한 유산을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닌 보스턴 시민도 함께 즐기고 볼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그녀의 집념과 취향이 고스란히 미술관에 드러났다. 이젠 전 세계 사람도 즐길 수 있는 미술관도 되었다. 2500점이 넘는 책, 그림, 가구, 소품, 그 숫자만으로도 개인 미술관의 규모로는 대단하다.
가드너 미술관은 작지만
수많은 보스턴 중 백미로 꼽힌다.
가드너 미술관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혼자 남아
거대한 슬픔을 이기고
오랜 시간에 걸쳐 맺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 건축으로 본 보스턴 이야기 (이중원 지음)
가드너 미술관에 들어서면 중앙에 ㅁ자 모양의 우아한 정원을 만나게 된다. 4층 높이의 유리 천장 아래 햇볕이 정원 중앙으로 들어오고 계절마다 바뀌는 화단은 매 시즌마다 우리에게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탈리에서 건너온 기둥, 회랑, 창틀 덕분에 보스턴에서 15세기 이탈리아를 만난듯한 느낌이 든다. 가드너 미술관에서 5분 정도를 걸어가면 보스턴 미술관이 있다. 크기와 작품 수로 비하면 가드너 미술관은 견줄 수 없을 만큼 작, 두 시간이면 다 볼 수 있는 크기이다. 그러나 가드너 미술관 정원에서 푸릇푸릇한 나무 냄새와 꽃 냄새를 맡으며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을 쬐고 있으면 현실의 고민은 다 없어지는 듯했다. 이것만으로도 미술관에 온 이유는 충분했다. 이자벨 스튜어트를 살게 한 것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만났던 건축과 예술 덕분이었다는 미숙관 가이드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이자벨 스튜어트는 자신을 치유해 주었던 이탈리아의 건축과 예술품을 자신의 미술관에 그대로 옮겨오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던 그 예술을 보스턴 사람들과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 같다. 가드너 미술관 정원에 앉아 있노라면 삶을 통해서 드러난 그녀의 모토 "C'est mon plaisir" (It's my pleasure)가 고스란히 전해져 내 마음도 한 결 더 따뜻해진 것 같았다.
영어에서 '고맙습니다'라고 하면 'It's my pleasure'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천만에요'라는 'You're welcome' 보다 섬세하고 자신을 내려놓은 마음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 일은 '저의 기쁨인걸요. 그래서 당신이 두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고운 마음씨가 드러나는 것 같아서 이 표현을 들을 때마다 내 입꼬리는 올라가는 걸 느낀다.
작년 봄, 나의 그림을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가드너 미술관 정원 오른편에 스패니쉬 갤러리에 한 벽면을 다 차지하는 그림 하나가 있다. 집시 여자로 보이는 무희가 혼자서 열정적인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이 춤을 완성하겠다는 열정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이자벨 스튜어트 가드너는 사랑하는 남자 셋 전부를 잃었지만 기필코 미술관을 완성시키겠다는 집념을 예술품을 수집하는 열정으로 재 탄생되었다. 그녀는 존 싱거 사전트의 엘 할레오 그림 앞에서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힘을 얻곤 하지 않았을까? 그녀와 같이 컬렉터가 되어서 인생 그림 하나를 소장하지 못하더라도 여행을 하면서 나의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지고 싶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사항
존 싱거 사전트 John Singer Sargent 풍경화와 초상화로 유명한 미국 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