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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집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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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Feb 04. 2022

우리의 세 번째 전셋집

집의 기억

-장가 안 간 아들을 위해 사 둔 집 (집의 기억 2)에 이어-


 급하게 다음 세입자를 구하고 복비를 물고 짐을 싸 친정으로 내려왔다. 우리가 살게 될 세 번째 집은 타지에 있는 우리 대신 친정 엄마가 보고 계약한 집이었다. 엄마가 집을 보러 가 동영상을 찍어 보내줬고 나는 동영상 속에 담긴 엄마의 짧은 멘트들을 들으며 집을 결정했다. 여긴 화장실, 새로 고쳐서 깨끗하다. 여긴 작은방, 붙박이 장이 있어서 이걸 창고처럼 쓰면 되겠다. 여긴 작은방, 벽지가 파란색으로 새로 해서 우리 손주방 해주면 좋겠다. 뭐 그런 멘트들이었다.


 남편은 갑자기 발령을 받아 새롭게 적응하느라 바쁜 상태였고 나는 이제 백일이 넘은 아이를 친정집으로 데려와 약 한 달 동안 더부살이를 했기에 우린 새롭게 이사 갈 집에 신경을 쓸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이사를 앞둔 주말 남편과 처음 집에 가봤는데 동영상으로 본 것과는 조금 다른 집이었다. 세를 주기 위해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고 했는데 하얗고 깨끗하게 보였던 문이나 몰딩은 하얀 페인트를 칠한 것이었고 역시나 이건 우리가 사는 2년 동안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기도 했다.


 이 집은 30년 나이를 훌쩍 먹었던 두 번째 우리 집보다는 조금 나이를 덜 먹은 약 20살 정도가 된 아파트였다. 방이 하나 더 늘었고 그 대신 어쩐지 거실이나 부엌이 조금 좁아진 집이었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는데 바로 옆에 있는 중학교가 내가 전학 와서 다녔던 학교라는 사실이었다. 


 잠시 집 이야기를 하다가 그 시절로 빠지자면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왔는데 영어 수업조차도 사투리를 쓰는 선생님과 험한 욕을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아마도 나는 너희와 달라, 하는 마음으로 적응을 못하고 속으로는 끙끙 앓으며 매일 학교를 오고 갔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내 성적은 거의 말도 안 될 만큼 곤두박질쳤고 부모님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참 많이 힘들었던 인생의 어느 지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 그래서 그럴 건데 나는 거의 이 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없다. 매일 4층이었나, 복도 끝 도서관에 가서 낡은 책을 괜히 만지작 거리며 그 소란스러운 아이들 틈을 피했던 기억밖에는.



 무튼 다시 돌아와 우리의 세 번째 집에서 아이가 돌을 맞고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하고 뛰어다니고 어린이집을 다닐 만큼 자랐다. 아쉽게도 세 번째 집은 집에 대한 기억보다는 그곳에서 하루가 다르게 크던 아이의 모습과 늘 종종 대고 힘들어하고 매일 밤 거실에 나와 울거나 베란다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슴을 치거나 우리 이혼을 하는 게 어떻겠냐며 울고 불고 하던, 하루가 다르게 늙고 마음이 말라가던 내 모습만 남겨있는 곳이다.


 그 시기에 그곳에 살게 돼서 그렇겠지만 벗어나고 싶었던 공간, 도망치고 싶었던 곳, 복도 끝 쪽에 마주한 방은 겨울이면 곰팡이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곳.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집주인, 그러나 사모님이라고 칭하는 분께 괜히 죄스러워졌던, 아침이면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던... 그래서 미안하고 고마웠던 세 번째 우리 집과 조금 이른 이별을 했다.


그리고 집 사진을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아이 이유식을 만들고 삼시 세 끼를 챙겨 먹이는데 급급했던 모습들 뿐이라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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