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가엾은 강지훈 팀장님, 부디 굳세소서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부하직원이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낸다면 어떨까? 오늘의 주인공은 우리의 가엾은 팀장님이다. 그의 이름을 '강지훈'이라고 하자.
최멋고(최멋진고먐미)가 답지 않게 면담 신청이라니. 팀장 강지훈이는 어딘가 위화감을 느끼면서, 모니터에 시선을 반쯤 걸친 채 대답한다.
"어.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릴래?"
"네, 회의실에서 기다릴게요."
강지훈이는 뭔가 모를 흉흉하고도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긴다.
올해 마흔셋이 되는 우리의 강지훈이는 약 13년을 이 조직에 헌신했다. 그는 입사하자마자 갖은 고초를 겪었다. 매일같이 회식에 끌려가 새벽까지 토하도록 술을 마셔야 했고, 무능한 선배들 사이에서 끝없는 갈굼을 당하며 몇 년이고 분을 삭였다.
그래도 그는 언제나 꾹 참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이 취업난에 내가 어떻게 들어왔는데. 원래 사회생활이란 게 이런 거 아니겠어. 월급도 괜찮고 정년도 무조건 보장되는 이런 직장이 어디 있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신입사원 강지훈이는 갖은 말로 스스로를 달래며 악착같이 버텼다.
과연, 독하게 10여 년을 버티니 '좋은 날'은 왔다. 어느덧 악랄한 자들은 모두 정년을 채우고 회사를 떠났고, 회식문화도 점잖아졌으며, 그는 어느덧 부서에서 2인자가 되어 있다. 이제 위에 남은 유일한 상사는 허영미 부장 한 명뿐.
최근에 들어온 MZ세대 후배들은 한결같이 허부장이 비겁하고 무능한 최악의 상사라고 욕을 해대는 모양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종류의 인간쓰레기를 다 겪어 왔던 우리의 강지훈이가 생각하기엔, 그래도 우리 부장 정도면 괜찮은 편이지 싶다. 그가 적어도 쌍욕을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지지는 않지 않은가.
물론 강지훈이라고 허영미 부장이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허부장 특유의 변덕과 감정기복, 불평불만, 우물쭈물함, 앙칼진 어투의 책임전가를 당하고 있자면, 강지훈이처럼 인내심 강한 남자도 가끔은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럼에도 강지훈이는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10년 전만 해도 얼마나 징그럽고 끔찍한 놈들이 부장 자리를 꿰차고 있었던가. 허부장 정도면 정말 양반인 거다. 요즘 젊은 애들도 그들이 복 받은 거라는 걸 알면 좋을 텐데.
줄곧 다른 팀에 있던 최멋고라는 녀석이 올해엔 지훈의 직속부하로 들어왔다. 멋고가 햇수로 이제 6년 차였던가. 처음 입사할 때만 해도 그의 스펙이 대단하다며 다들 수군수군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세월이 참 빠르다.
스펙이 그리도 뛰어나다니 얼마나 콧대 높은 녀석일까 긴장했는데, 막상 보니 의외로 수더분하고 덜렁대는 성격인 데다가 예의도 발랐다. 처음엔 일하는 것도 사회생활도 영 어설프다 싶더니 이내 최멋고는 적응을 마치고 조직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멋고의 프로젝트가 인정받아서 상을 받아왔는데, 그 포상금으로 소고기 회식도 했다. 만년 꼴찌에 천대받는 우리 부서가 회사에서 이렇게 인정받은 건 역사상 처음이었다.
강지훈이는 최멋고처럼 싹싹하고 실력 좋은 후배가 들어와서 기뻤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그는 최멋고가 우리 업계의 세미나에서 발표를 해서 전국에서 인정받고, 겸사겸사 우리 회사의 명성도 날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머리가 크더니 최멋고는 상사들이 조금씩 탐탁잖아하는 존재가 되어 갔다. 특히 작년 연말쯤이었나, 최멋고가 허영미 부장에게 눈을 부라리며 정면으로 들이받은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멋고 녀석이 제아무리 잘났고 허부장이 무능한 리더십의 상징이라지만, 위계가 엄격한 우리 직장에서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지훈이는 멋고를 심정적으로는 이해했지만 그래도 직장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최멋고 역시 그건 동의하는 듯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무례한 언행은 반성한다며, 얘기를 들어주시고 제 입장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강지훈이에게 거듭 인사하는 걸 보면, 역시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감정에 못 이겨서 그랬을 뿐인 모양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최멋고는 올초에 팀을 이동하여 강지훈이의 직속 부하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 사건 때문인가, 강지훈이는 그를 대하기가 조금 버겁다고 느꼈다. 이 녀석에게 뭔가 하나를 지시를 하려 치면 왠지 모르게 납득을 시켜 줘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든달까.
분명히 대놓고 '싫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멋고는 종종 강지훈이의 지시를 듣고 나면 "아..." 하고 약간 뜸을 들인 후, "그러니까, 팀장님이 생각하시는 방향성은 이러이러한 건가요?" 하고 되묻는다.
분명 그 태도는 공손한데, 질문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한 기분이 든다. 하라고 하면 군말 없이 "네!" 하고 그냥 할 것이지, 저런 건 도대체 왜 묻는단 말인가.
'내 일 쳐내면서 부장의 지랄 맞은 성격 맞춰주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방향성은 무슨 놈의 방향성.'
강지훈이는 솔직히 일을 하면서 방향성이니 비전이니 그런 건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벅찬 게 회사생활 아닌가.
멋고가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강지훈이는 즉석에서 '방향성'이라는 놈을 급조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다 보면 종종 대답에 일관성이 없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럴 때마다 최멋고 녀석은 딱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듣는 표정이 썩 시원스럽지 않았다. 그럴 때면 강지훈이는 가슴 속에서 왠지 모를 울컥함을 느끼곤 했다.
급한 일을 마무리한 지훈이 회의실로 합류한다. 한껏 긴장한 자세로 앉아 있던 멋고가 일어나는 시늉을 한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아냐. 가끔 이렇게 차 한 잔 하는 거지. 무슨 일인데? 별로 오래 걸리는 얘기는 아니지?"
"네, 아마도요..."
말끝을 흐리면서 떨떠름하게 웃는 모양새가 뭔가 수상하다. 그러고 보니 멋고의 손에 수상한 흰 종이가 접힌 채로 들려 있다. 그 새하얀 종이에 시선이 머무는 순간, 강지훈이는 등골에서 오싹함을 느꼈다.
"뭔데? 나 조금 불안하다."
이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고, 강지훈이는 최멋고만큼이나 꺼림칙하고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본다. 어서 해맑게 웃으면서 '불안하긴요! 대체 무슨 상상을 하신 거예요?'라고 말해 줘.
하지만 멋고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강지훈이는 충격을 받아 뒤로 넘어갈 뻔하고 만다.
"저, 회사 그만두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