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은 나를 먹고 자란다.

우울증을 죽여버리기 위한 여정의 서막

by 클래식 영업사원



솔직히 말하자면, 글 쓰는 것도 힘들다. 글을 읽는 것도 힘들고, 생각하는 것도 힘들다. 외우는 것도 힘들고, 기억도 잘 못한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이 나에게서 사라졌다. 예전의 나는 죽었다.



집중하는 행위도 나에겐 어렵다. 이런 증상들이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였는데, 덕분에 전공실기 성적과 내신 성적의 하락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혼란스러웠다. 피아노도 안 쳐지고(피아노를 갓 배운 초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공부를 하기 위해 책을 들여다봐도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 이 수준이 되어버렸다.

매일매일 자책했다. 내가 게을러진 걸까. 이 정도 집중도 못하다니. 곧 있으면 대학 입시인데, 나는 정신이 엉망인 상태로 학교만 겨우 다니고 있었다. 예고 선생님들과 전공 선생님들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분들도 의아해했다. 잘하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지, 참 이상하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우울하진 않았느냐고? 물론 우울했다. 하지만 예고에 다닐 땐 너무 바빠서 그런 감정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예중 예고는 벽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 재능과 달란트가 넘치는 아이들을 나는 넘을 수 없다. 그 아이들은 학교의 사랑을 받는다. 학교의 자랑이 되어 무대에 수없이 오르고 박수를 받는다. 나는 절대 그들이 될 수 없었다. '피아노 잘 치는 아이'는 많다. 학교는 그 아이들이 모여 진흙탕 싸움을 하는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능력이 떨어진 나의 몸뚱이를 이끌고 대학 입시에 도전했다. 이 악물고 하루 종일 연습했고, 입시 평가회(수능으로 치면 일종의 모의고사다.)와 레슨을 전전했다. 선생님들의 평은 좋았다. 입시 평가회에서도 거의 최고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을 정도. 의지력으로 우울증을 이겨낸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행을 나는 해냈다. 하지만...

서울대 2차까지 가서 떨어졌다. 불합격 글자를 본 순간 나는 울고 또 울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는데. 나의 망가진 정신을 이끌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는데. 입시장에서도 하던 대로 연주했다. 아쉬운 것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정신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우울증이 경증에서 중증으로 진화해 버렸다. 중증 우울증 환자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증상이 다 나타났다. 나는 폐인이 되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일어나 봤자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입시에 든 비용의 대부분을 조부모님이 대 주셨는데, 그분들께 보답은커녕 아무런 소식도 전해 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노력한 만큼 대가가 오지 않으니 살아갈 의욕이 사라졌다. 동시에 나에 대한 혐오도 심해졌다. 도대체 어째서.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왜 나에게서 능력들을 빼앗아 가고, 나의 고등학교 생활을 고통스럽게 한 걸까.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예전의 나, 죽어버린 나는 과거의 영광이 되어 나의 기억 저편에서 빛나고 있다. 그뿐이다. 절대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병원에 다니고 있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항우울제는 차선책일 뿐, 죽은 과거의 나를 다시 부활시키는 약은 아니다.)



우울증의 문제는 바로 의지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30분 후에 외출을 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 한들, 귀찮아서 미루다가도 어떻게든 준비해서 외출을 한다 (설령 예정시간보다 늦게 집에서 나간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우울증 환자는 누워있거나 앉아있는 자리에서 단 1cm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귀찮아서? 게을러서? 아니, 그딴 생각 하나도 안 난다. 그냥 몸이 안 움직인다. 의지라는 게 사라지면 사람은 살아있는 시체가 된다.



그리고 나를 자꾸 가둔다. 방에 틀어박히고, 침대에 틀어박힌다. 다른 누군가가 근처에 오기만 하면 분노가 솟구친다. 내가 나로서 힘겹게 존재하고 있던 순간을 방해받은 기분… 존재하려는 시도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기분이랄까. 헛소리처럼 들린다는 걸 알지만 정말 그랬다. 나 때문에 가족들이 고생을 좀 했다. 우울증 환자도 힘들지만 곁에 있는 사람도 힘들다.



5개월 정도 폐인으로 지내던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게 우울증일까?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에 다다르고서야 나는 깨달은 것이다. 처음에는 이 정도 가지고… 설마 우울증이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을 반복했다. 내가 엄살 부리는 건 아닐까? 남들도 다 이러는데 꾹 참고 멀쩡한 척 살고 있는 것 아닐까. 내 참을성이 부족한 건 아닐까. 별로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영양가 없는 고민을 계속하다가, 일단 정신과에 가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우울증이 아니더라도 정신과에 가서 의사의 확인을 받는 것이… 좋을 테니까.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병원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내가 모르던 정신과의 세계는 참으로 놀라웠다. 혹시 정신과에 처음 가시는 분들이라면 잘 들어주시면 좋겠다.)

정신과는 예약제다!!! 인기 있는 병원은 2달씩, 심하면 1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무슨 대학병원도 아니고…)

특히 초진은 진료(혹은 검사)가 오래 걸리기에 예약이 필수인 경우가 대다수다. 당일 예약, 전날 예약은 꿈도 꾸면 안 된다.

그 사실을 모른 나는 멍청하게 발로 뛰며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다가, 이 세계에선 예약제가 기본 법칙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고 이번에는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살면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해본 건 이때가 유일하다… 여섯 곳 정도에 전화를 돌리고, 그나마 가장 빠른 날짜에 예약이 되는 병원으로 예약을 잡았다. 정말 힘들었다. (가뜩이나 기운 없는데…)





다음화 : 생애 첫 정신과 진료 (근데 비싼 가격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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