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을 죽이기 위하여
인생 첫 정신의학과.
예약한 날이 되어 병원을 찾았다. 처음 방문한 정신의학과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아니, 정말 평범했다. 환자들도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흔히 상상하는 정신병원 (사실은 정신병동)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 정신병원에 방문하는 것에 부담 갖지 마시라. 감기에 걸리면 이비인후과에 가는 것처럼, 정신의학과도 이비인후과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병원’이다)
나는 초진이었기 때문에 검진에 앞서 자가 평가라는 것을 했다. 자가 평가는 역학조사용 우울척도, 신체 증상 설문지, 피츠버그 수면질 척도, 공황장애 평가 척도, 지각된 스트레스 척도, 반추적 반응 척도, 부정적 평가에 대한 두려움 척도, 기분 장애 질문지, 성인 ADHD 자가보고 척도, 자살하지 않는 이유 척도, 예일 - 브라운 강박증상 척도, 조기정신증 검사를 포괄하는 방대한 분량의 테스트였다.
우울증 검사에서 제시된 증상들은 대부분 내가 겪고 있는 증상들과 같았다. 검사를 진행하면서 든 생각은 하나였다.
더 일찍 알았더라면.
병원에서는 항우울제 두 정, 수면 유도제 세 정을 처방해 줬다. 스스로 나아지고 싶다는 열망이 컸기에, 설렘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꾸준히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약만 먹는다고 사람이 변하진 않는다. 나 스스로 변화해야 했다. ‘사람답게’ 살아야 할 때였다.
병원에 방문했던 시기의 나는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 밥은 하루에 한 끼, 아니면 이틀에 한 끼를 먹었으며, 하루 종일 침대에 누운 채 유튜브 영상으로 적막을 채워보려 애썼고, 최대 5일 동안 씻지도 않았다. 나도 내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의 나를 위한 변호를 한마디 하자면, 숨 쉬며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그 당시 할 수 있던 최선이었다.
인생 처음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하며, 사람답게 살기 위한 일종의 하루 루틴을 만들었다. 샤워, 스케일+기초(피아노), 밥, 약, 스픽+듀오링고, 글 한 줄 쓰기/읽기, 잠. 이 7가지만이라도 하루 동안 실천해 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피아노 소리가 견디기 힘들고 연습도 하지 못하겠다면 기본기 연습 5분이라도 하자, 밥은 하루에 한 끼만이라도 꼭 먹자, 글 한 줄만이라도 읽자… 매우 얄팍한 루틴이었지만, 망가진 나에겐 이조차도 힘겨운 시도였다. (억만장자의 아침 루틴으로 유명한 살인적인 스케줄-미라클 모닝, 찬물 목욕, 명상 등등…-을 실천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루틴을 못 지키거나 간신히 지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최대한 침대에서 벗어나 몸이라도 움직여 보려고 최선을 다했다. 피아노도 다시 잡았다. 재활 훈련을 하듯, 굳은 손과 팔을 깨우기 위해 기초적인 테크닉 연습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가끔가다 외출하는 날에는 나 자신을 많이 칭찬해 주었다. 외출까지 해내다니, 오늘 정말 보람찬 하루였다-라고 홀로 자축하곤 했다. 매일 규칙적으로 외출하는 것이 우울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힘이 없어 일주일에 한 번 집 밖에 나가는 걸 이상적인 목표로 잡았다. 정신과에 가는 길도 일종의 ‘외출’이었다. 며칠 만에 느끼는 바깥공기, 눈부신 햇빛을 맞으며 병원까지 걸어가는 행위 그 자체가 나에겐 건강한 삶의 시작을 알렸다.
나는 피아노 레슨을 다시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고, 오전에 일어나고 밤에 일찍 잠드는 습관을 만들어 나갔다. 확실히 나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좋아질 줄은 꿈에도 몰랐…
다음 화: 또다시 가라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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