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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살기가 내게 남긴 것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by 클로드

해외 한 달 살기를 하고 나서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추운 겨울에 따뜻한 나트랑에서 푹 지내다 온 나는 이전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뒤 적어도 한 가지는 달라져야 독서의 의미가 있다고도 한다. 생각이 달라지거나 행동이 달라지거나, 꼭 달라진다기 보다는 새로워지는 무언가. 책도 그럴지언정 하물며 무려 한 달 살기인데 뭔가 변화하지 않아야 할까 하는 생각에 골똘히 빠져보게 된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의 일상은 언제나 고무줄처럼 탄력을 잃지 않으려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아침에 침대를 나서는 순간부터 밤에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해야 할 일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반면 나트랑에서는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결 여유로운 털실처럼 늘어져 있었다. 직접 뜨개질을 해내듯 하루가 내 손과 발로 짜여지고 때로는 새로운 패턴이 만들어졌다. 아이 등하교와 운동 등의 규칙적인 일과가 있었지만, 그 사이의 공간은 오롯이 빈 캔버스와 같았다.


그 첫 기쁨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무언가를 해본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자박자박 길을 나서 요가원에 가고, 한 낮에 운동화를 신고 나와 야자수를 향해 걸어보는 것. 평소 퇴근과 저녁 식사 후 어쩌다 한 번 짬을 내어 하는 산책이 아닌 햇살의 온도를 양 팔 위 살갗으로 고스란히 흡수하며 하루 속을 걷는 느낌은 그 생동감이 달랐다.

날이 밝으니 보이는 것도 달랐다. 길을 걸으며 자연스레 그 곳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게 되었다. 카페와 식당의 오픈 준비를 하는 모습에서 내가 들어가는 공간을 위해 필요한 부지런함들을 보게 되었다. 어딘가를 향해 이동하는 사람들, 홀로 혹은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운동을 하거나 나처럼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하나하나 저마다의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걸으며 음미하는 사람! 그렇게 되어갔던 것 같다. 목적지를 향해 휴대폰 지도를 보고, 도착 시간을 계산하며 걸음의 속도를 조절하던 과거의 모습은 없었다. 대신 느끼고 관찰하며 긍정하는 내가 있었다. 햇볕의 따스함에 행복했고,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에 감사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사랑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존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에게 여유를 허락하는 사람이 되었다.

‘꼭 유익한 무언가를 해야 해.’가 아닌 ‘걷고 싶은 만큼 걸어도 돼, 햇살을 더 즐겨도 돼.’ 그리고 ‘힘들면 쉬어도 돼’하며 스스로에게 관대해졌다. 그 허락은 적어도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범위 안에서 일어났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유유자적했다.

그때의 허락이 귀국 후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이어지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 초조해하거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원망을 예전에 비해 많이 내려놓았다.


보통 허락은 부모가 아이에게, 관계의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내가 나를 허락해본 적이 있을까? 스스로를 향한 허락도 필요한 걸까? 그 의미에 대해 들여다보게 된다.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허락해볼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닐까. 지금의 역할과 의무, 미래를 위한 준비로 빼곡한 일상에서 나에게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관대함을 가져볼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닌지. 혹은 그게 필요한지조차도 몰랐던 건 아닌지.

그 후 나는 때때로 나를 허락하곤 한다. 아이를 데리러 가기 한 시간 전 근처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 책을 읽는 시간을 허락한다. 휴일에 빨래를 개고, 청소기를 돌려야 하지만 그 전에 글 한 편 먼저 쓰고 싶은 나를 허락한다. 그리고 자기 계발과 취미로 빼곡하던 다이어리 속 투두 리스트에서 멀어진 것들을 잠시 놓아주는 것도 허락한다. 벌려놓은 SNS를 모두 챙기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한다.

나트랑을 다녀온 뒤 내 삶은 조금 느슨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투두 리스트를 줄이고 그 사이사이에 지금 하고 싶은 일들을 넣어보며 말이다. 빼곡함에서 오는 성취감은 줄었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보들보들한 털실을 잡고 일상을 자유로이 뜨며 그 패턴을 바라보는 재미를 얻었다.

돌이켜보면 나트랑 한 달 살기를 떠나본 것 자체가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허락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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