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morning ~

ladies and gentlemen.

by 클라우디아

심한 늦둥이였다. 엄마 젖은 구경도 못했다. 노산인 엄마는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아도 젖이 나오지 않아서였고, 태어나보니 심하게 약골인 나는 목을 가누기는커녕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약골 중의 약골이어서 설령 엄마젖이 나왔다 할지라도 먹을 힘이 없어서였다. '젖 먹던 힘'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젖을 먹으려면 얼마나 힘이 많이 드는데. ‘양키 물건'이라고 부르는, 미군부대에서 어찌어찌 흘러나오는 분유를 먹고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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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식구들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가 전부였다. 누구에게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이 어영부영 글자를 읽게 되었다. 두 언니와 고등학교나 대학에 다니는 삼촌들, 이모들에게서 아마 한두 마디씩 배웠으리라. 동화책이던 잡지책이던 아무 책이나 읽었다. 그림만 보기도 했고, 글씨도 띄엄띄엄 읽었다.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책들보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인 책들이었다. 한두 장 읽다가 말기도 했고 표지만 보고 옆으로 밀어 놓기도 했다, 그래도 읽었다. 대식구들 속에서 자라면서 약골의 몸에 비해 말문은 빨리 트였고 얇디얇은 잡학의 세계를 일찍 접한 셈이다.




아토피를 중심으로 한 이런저런 병치례에 밀려 학교를 가는 날 보다 못 가는 날이 많았기에 수학 등 주요 과목에 대한 선행학습은 당연히 하지 못하고, 영어 알파벳도 끝까지 외우지 못한 체 중학교에 들어갔다. 동장군에게는 후퇴의 생각이 아직은 없었는지 여전히 추웠던 3월 2일이 입학식이었다. 교장선생님의 긴 훈화를 들으며 전교생이 벌벌벌 떨다가 발끝과 머리털부터 눈동자까지 얼어붙을 즈음, 어느 사이 길고 긴 훈화를 아쉬운 맘으로 마치신 교장선생님 대신 난생처음 보는 외국인이 연단에 서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키가 194cm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꼬꼬마인 내 눈에 얼마나 커 보였는지. 찰흙으로 덧댄 듯이 높디높은 코는 빨갛게 얼어붙어 있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것도 나중에 알게 되지만 '하바드대학'을, 한국에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와서 우리에게 영어를 가리키는 선생님으로 1년 동안 지내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 참 추워요, 내 도시락도 추워요!'라고 한국어로 말하며 황급히 인사말을 마쳤다. 옆에 같이 서 계셨던 한국인 선생님이 앞부분 말을 통역해주셨지만 들리지 않았다. 전교생들이 온몸을 흔들며 키득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운동장에 꽉 들어찼다. 도시락이 춥다니, 도시락은 차다라고 해야지. 큭큭큭, 킥킥킥. 우리는 얼어붙은 손과 발을 웃음으로 흔들어 깨우며 교실로 들어갔다.




"입학식 날 수업을 하다니 참나" "아참, 생각해보니 책도 예비소집일 날 받았고, 시간표도 받아서 어딘가 있을 텐데, 1교시가 뭐였지?" 책가방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쑥대머리를 한 체 책과 공책과 학용품 더미 사이를 헤집었다. 도시락이 '추운' 외국인 선생님과 연단에 같이 서 계셨던 한국인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어가 익숙지 않으니 당분간 한국인 선생님과 더불어 영어 수업을 진행하시겠다고, 앞으로 이러저러한 것을 그러저러한 방법으로 가르치고 싶다고, 갓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선생님답게 키 큰 외국인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한국인 선생님이 통역하시고.




"gate와 door의 차이점은 뭘까요?" 아마도 자신만의 고유한 수업방식을 설명하던 중 하나의 예를 들은 것이리라. 한국인 선생님이 gate는 대문이요 door는 문이라고 통역해주셨다. 대문이나 문은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아니던가? 내가 그 순간 무슨 정신으로 손을 번쩍 들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gate는 내 집과 다른 집의 공간을 분리하는 이름이고 door는 하나의 대문 안에서, 용도를 분리하는 공간의 이름입니다." “대문에 아버지 문패가 달려있고 문은 부엌문, 화장실 문, 광문이라고 부르니까요.” 반 아이들 대부분이 파란 눈에 키가 190cm 넘는 외국인의 쏼라쏼라 영어에 놀라 혀가 얼어 있는 사이 맨 앞줄의 꼬꼬마인 내가 대답했다. 영어 선생님 두분도 놀라고 반 아이들도 놀라고 대답을 한 나도 놀랐다. 내 입에서 이렇게 기똥찬 대답이 나오다니. 다년간 이 책 저책의 요기 저기를 조금 읽은 내 눈이 명령하고, 대가족들 사이에서 일찍 트인 내 입이 한 일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교 후 발에 불이 붙은 체로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영어 천재'가 되어 버린 나는 우선 영어책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안방 엄마의 경대 옆에서 영어책을 찾아들고 언니 방으로 뛰어갔다. 뜻은 뒤로 젖혀두고 일단 언니가 읽어주면 따라 읽고 또 읽고, 그렇게 1 과를 외우게 되면 다시 2 과를 읽어주면 따라 읽고 또 읽고, 읽다 보니 외워지고. 잠들 때까지도 아침에 눈을 떠서도 영어책을 주야장천 읽었다. "Good morning 영희, goood morning 철수,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




수업 시작 후 선생님들의 첫 질문은 대개 그날 배울 내용의 '간 보기'이다. 오늘 배울 내용을 학생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도 있고 그날의 수업내용에 대한 안내도 겸할 수 있으니 적절한 시작인 셈이다. 언니와 삼촌, 이모의 도움으로 영어책에서 앞으로 배울 서너과는 족히 암기후 머리와 입속에 담고 간 내가 그 질문들에 척척 대답할 수 있었음은 당연한 일. 두어 달이 흐르자 알파벳도 모르고 들어간 나는 어느 사이 '재 혹시 영어 천재?'에서 '재 정말 영어 천재래’라고 한 글자를 더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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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사립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영어 웅변대회가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입상자에게 입학과 각종 장학금이라는 특전을 주고 고등학교 2학년 입상자에게는 다음 해에 응시한다면 가산점을 준다라는 혜택이 있고, 나머지 중고등 학년에게는 그 특혜를 받기 위한 연습전이 되는 영어 대회였다. 나는 반대회, 학년 대회, 학교 전체 대회를 거쳐 학교 대표가 되었다. 대회 주최 측에서 준비한 주제는 '한강의 수질오염 실태와 그것이 서울시민에게 미치는 영향'이었다. 중 1의 어깨로는 한참이나 무거운 주제로 쓰인 영어 원고 5쪽을 외우는 것으로 대회 준비를 시작했다. 대문자 트리플 AAA형인 나는 이 혈액형과 정말이지 최악이자 쓰잘데 없는 조합인 섬세한 기억력을 소지하고 있다. 나는 신이 선물하신 'photogenic'한 나노 단위의 기억력 재능으로 모르는 뜻이 더 많은 영어단어의 원고를 큰 어려움 없이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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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부는 오전에, 중등부는 오후에, 추첨으로 각 리그 내에서의 발표순서가 결정되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주욱, 뽑기를 했다 하면 끄트머리요 꼴찌인 나는 중등부 맨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고3들에게 대학 입학과 수업료 면제란 장학금이 특전으로 주어지는 대회이다 보니 대회날은 대학 입시를 얼마 앞둔 겨울이었다. 한 팀당 참가자와 인솔 선생님 한분으로 제한되어 있었어도 전국 규모의 대회이다 보니 강당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오전의 고등부 발표 분위기는 치열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한풀 꺾인 대회 열기에 추운 곳에서 흔히 느끼는 식곤증과 더불어 오랜 시간 한자리에 앉아있었던 이들은 조금씩 지쳐갔다. 시계를 들여다보는 눈길이 점차 빈번해졌다. 내 순서가 되었을 때, 강당 커튼 사이로 훤히 보이는 바깥은 겨울답게 칡흙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오전에는 고등학생들이어서, 오후의 중등부도 주로 중3이나 한두 명의 중 2 학생들이어서 마이크가 꼬꼬마인 내 키보다 높이 솟아 있었다. 청중의 눈에는 이마만 보였을 꼬마인 나는 희미한 불빛 속에 가득 들어찬 청중을 향해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입을 열어 원고의 첫 문장을 외쳤다. "Good morning ladies and gentlemen!"




인간의 오감이란 얼마나 섬세한지! gentlemen이란 단어가 내 입에서 흘러나올 때 벌써 나는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청중의 침묵도 색깔이 확연히 달라졌다. 지루한 영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청중들에게 대반전을 던져준 내 입은 암전처럼 굳게 닫혔다. 꿈속에서도 줄줄 외웠던 원고의 단 한 문장도 단 한 글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겨울 '저녁'에 good morning이라니 큭큭큭 킥킥킥. '한바탕 웃음으로' 강당 안 모든 사람들의 웃음보는 그날 처음으로 격렬한 운동을 시작했다. 마트료시카 인형의 몸체가 하나씩 벗겨지듯 모든 이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조금씩 조금씩 벗기고 줄이며 그렇게 나는 한 줌의 돌멩이가 되었다.




초침과 분침은 또각또각 제 곡조를 부르고 심사위원들은 그 소리에 맞추어 펜대로 탁탁탁, 탁탁 탁탁 책상 위에서 반주를 했다. 영겁 같은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나는 망각의 강으로 달려갔다. 레테의 강가 뱃사공은 연인들만이 탈 수 있다며 나를 돌려보냈고, 스틱스 강의 노꾼은 그리스인에게 우선권이 있다며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요르단강으로 발길을 돌린 나는 모래사막을 헤매다 길을 끝내 못 찾고 할 수 없이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꼬마야 이제 그만 내려와" “어이 학생 못하겠으면 내려와”라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에서 들렸다.



나와 담임선생님이 속한 한국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히 주무세요.'의 세계와 'good morning, good afternoon, good evening.'인 영어의 세계 사이의 간격은 대단히 넓다. 대회 참가자 중 막내인 나와 나의 담임선생님은 그날 하루 종일 '겁먹지 말고 평소에 연습할 때처럼만 하면 된다.'며 용기와 격려를 주고받기만 했지, 원고의 첫문장에서 morning을 evening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정말이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찰스 디킨슨의 저서 '두 도시 이야기'의 유명한 서문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고 지혜의 시절이자 어리석음의 시절이었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가 불러일으키는 날카로운 갈등만큼이나 내 모국어와 영어의 사이의 갈등은 그렇게 깊고도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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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다리가 있어야 내려가고 발이 있어야 걸음을 떼지. 나도 걸어 내려가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다고, 집에 있다면 지금쯤은 저녁밥을 먹을 시간인데, 근데 왜 배가 고프지 않지? 참, 내가 좋아하는 오곡밥으로 엄마가 도시락 싸주신 것을 아까 맛있게 다 먹어치웠었지. 엄마! 엄마가 아침에 나에게 잘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원고지 5쪽 중 한 문장밖에 말하지 못하고 웃음과 동정 속에 돌아간다는 건 정말이지 '잘’ 다녀온 게 아닐 거야." "엄마!"


그런 생각에 이르렀을 때, "Mother nature gives us..." 원고의 첫 문장이 내 입에서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한 문장 다음에 그다음 문장, 그리고 그다음 문단. 갓난아기 일 때 분유를 먹으며 비축해 두었던 ‘젖 먹는 힘'으로 눈썹 한 올 깜박이지 않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웅변'을 마치고 노란색이 반짝 거리는 상패와 상장을 가슴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