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게티 미술관, 빌라 아드리아나
"로마에 3일씩이나 계시려고요?" 이탈리아의 소도시들을 보기 위한 여행을 계획할 때 숙소와 교통편 예약을 도와주던 큰아들이 물었다. 이탈리아, 특히 로마는 여러 번 다녀왔다. 비행기 환승을 위해 잠시만 들르고 남부로 곧장 가면 더 많은 곳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로마에서 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로마에서 3박이나 한 것은 무엇보다 기차로 한 시간 정도 북동쪽에 있는 티볼리를 가기 위해서였다. 티볼리는 들고 나기에 교통편이 취약하고 무엇보다 볼거리라곤 빌라 데스테밖에 없다고 여겨지기에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다. 이탈리아 중북부 역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 출신 이폴리토 추기경이 450여 년 전 자신의 휴식처로 만든 빌라 데스테는 수많은 분수들로 유명하다. 각각 다른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분수들과 조각, 건축물이 빚어내는 풍광을 잠시 둘러보는 것으로 워밍업을 마치고 목적지로 향했다.
지금이야 구글맵과 파파고 번역 앱 장착으로 천하무적의 노매드가 되어 남극 얼음덩어리들 사이에서도 길을 헤매진 않을 듯하다. 와이파이를 도시락으로 준비하는 것이 대세가 되기 전이라 몸짓과 눈치와 이방인을 대하는 따뜻한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으로 목적지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곳 마을 사람들로 보이는 승객과 버스 운전사의 걱정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목적지인 '빌라 아드리아나'에 근접한 정거장에 홀로 내렸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만큼이나 기세 등등한 태양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늘도 인적도 찾아볼 수 없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이탈리아 주재 영사관에서 이탈리아에 온 관광객들에게 폭염주의 문자를 날리던, 몇십 년 만에 찾아온 혹서로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땀에 절어 있던 한 여름이었다.
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는 고대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가 지은 개인 별장이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불렀던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의 중심에 있는 하드리아누스를 현대 이탈리아어로 아드리아노(Adriano)라고 부른다. '빌라 아드리아나'는 '아드리아노의 교외 주택'란 뜻이다. 로마 관광 필수코스인 판테온을 처음 지은 사람은 로마 제정 초기의 아그리파였으나, 거의 무너져 내린 판테온을 잿더미로부터 부활시킨 이가 하드리아누스이다. 아그리파의 판테온이 지금 우리가 보는 원형이 아니라 직사각형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판테온을 하드리아누스의 건축물로 여기는 것에 무리가 없다. 로마의 또 다른 관광코스인 산탄젤로 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의 무덤으로 지었고 그 후 여러 황제들의 무덤이었다가 후대 교황들의 궁전이 된다.
제국의 국경선을 넓히기보다 공고히 하는데 역량을 쏟았던 하드리아누스는 치세의 3분의 2 기간 동안 제국을 순행한다. 광대한 제국을 순행하며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 웅장한 것들에서 섬세한 것들까지, 특히 개인적으로 애정이 깊었던 그리스 조각들과 기념물들을 티볼리에 모아 자신만을 위한 정원과 건물을 짓고 장식했다. 로마 황제 중 예술적 감수성이 자타공인 최고였다.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는 하드리아누스의 예술적인 면모가 아낌없이 발현된 공간이었다.
고대 로마의 엘리트 남성들은 부상, 병 또는 노화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육체적 기능을 상실하고 난 후에도 삶을 계속 이어가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자의식 넘치는 하드리아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늙고 병들고 추해지고 기능을 상실한 자신의 육체를 멸하기 위해 노예에게 단검을 주며 죽여달라고 부탁하고, 주치의에게 독약을 만들어 달라고 애원한다. 스스로 죽을 기력도 없었고 다른 이에게 대신해달라는 간청도 실패한다. 노예가 맨 가마에 누워 자신의 이상이 아낌없이 구현된 이 장엄하고 섬세한 '빌라'를 산책할 때 그가 느꼈을 심정은 '무상하다'란 한마디 말로는 설명이 안된다.
고대 로마 황제인 하드리아누스와 비교한다면 웃음거리밖에 안 되겠지만 빌라 아드리아나에서 내가 느낀 것도 세월의 무상함이었다. 20여 년 전 미국 LA에 살 때 빌라 아드리아나를 처음 알게 되었다. 유학생 가족이었던 우리는 이따금씩 집 앞 공원에 가서 다른 유학생 가족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고 중국 마트와 미국 마트에서 산 재료들을 끌어 모아 빈대떡도 굽고 만두도 빚고 김치도 담가 먹었다. 소박하지만 부족하지 않게 먹고살았으나 그것만으로는 충족한 삶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취준생'가족이었다. 남편은 타전공에 비해 학위 따기가 두배나 걸린다는 정치학도였다. 10년의 미국 생활 동안 우리는 늘 '준비'중인 상태였다.
절약하며 살아야 하는 유학생 가족이기에 입장료가 공짜라는 이야기에 기분도 좋기에 집에서 그리 멀리 않은 폴 게티 뮤지움으로 갔다. 그곳은 당대에 미국 최고 부자였다는 폴 게티가 지은 미술관과 저택들로 이루어진 복합예술공간이다. 미술관은 이탈리아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를 모델로 삼았다.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 언덕을 닮은 LA 서부 말리부 해안가의 브랜우드 언덕을, 주민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부지로 사들여 건축을 강행했다. 이 또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평생 사랑한 그리스 문화에 대한 오마주이다. 폴 게티는 자신이 하드리아누스의 환생이라고 말하여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세계 최고 부자로서의 허세와 그만의 괴팍함을 버무린 유머라고 나는 생각한다.
폴 게티 미술관에서 나는 세계적인 부자가 자신이 벌어들이고 쌓아 올린 무한한 돈으로 평생 동안 집요하게 끌어모은 예술품들을 보았다. 신이 예술가의 손을 빌어 만든 천상의 세계를 엿보았다. 미술관에서 나와 브랜우드 언덕을 내려가는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저물어 가는 해를 가득 품에 안고 붉게 일렁이는 태평양이었다. 인간이 만든 미와 신이 만든 아름다움이 내 눈앞에서 하나가 되었다. 내가 맛본 최고치의 아름다움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처음 폴 게티 뮤지움에 다녀온 뒤에 나 혼자 두어 차례 그곳에 갔었다. 풀 게티에게 영감을 주었고 모델로 삼아 미술관을 만들게 했던 이탈리아의 빌라 아드리아나에 가서 내 눈으로 직접 그곳을 보겠다는 열망을 품게 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 뒤 놀랍도록 발전된 한국에 돌아와 허둥대며 비집고 들어갈 빈 틈을 찾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기 위해 애를 쓰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남들 못지않게 아이들을 키워내기 위해 있는 힘을 짜 모으다 보니 세월은 무심히 흘러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고 주름이 제자리를 잡아 들어앉았다. 이따금씩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에 대한 희망을 서랍에서 꺼내 먼지를 닦았다가 다시 넣어두곤 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그의 빌라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이나마 쟁여두었다.
몇십 년 만의 더위를 뚫고 20여 년의 기다림 끝에 빌라 아드리아나에 홀로 발을 디뎠다. 무너져 흘러내린 돌덩어리들과 훼손되어 원형을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운 수많은 조각들이 드넓고 쓸쓸한 티볼리 평야 이곳저곳에 누워있었다. 2천 년의 세월이 하드리아누스의 집을 갉아먹었다. 세월이 할퀴고 떠난 뒤 남은 얼마 안 되는 것들도 인근 빌라 데스테의 건축 자재로 쓰이기 위해 뜯겨 나갔다. 지금의 빌라 아드리아나에서 우리가 할 일은 드넓은 평야에 남아있는 몇 개의 조각과 파편들의 퍼즐을 맞추는 것이다. 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쌓아온 빌라 아드리아나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꺼내어 들었다. 돌덩어리들의 미로와 부분만 남은 조각들의 퍼즐을 대충이나마 맞출 수 있었다. 폴 게티 미술관이 품에 안아 보여주었던 천상의 아름다움을 본 내 시선이 늘 이탈리아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를 향해 있었던 덕분이었다. 미국인 부자 폴 게티와 고대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잇는 것은 예술에 대한 그들의 집요함이었다. 20여 년 전 미국 LA에서의 나와 지금의 나를 잇는 것은 한번 둔 시선을 거두지 않은 나의 집요함이었다.
로마로 돌아가기 위해 티볼리의 조그마한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플랫폼에 앉아 눈앞에 보이는 팻말위의 '티볼리'란 글자를 하나씩 천천히 가슴에 새겨 넣었다. 와이파이가 되는 숙소로 돌아가 큰아들에게 무사귀환 소식을 띄우기 위해 서둘러 로마행 마지막 기차에 올랐다. 엄마 혼자 하는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이라 아들은 걱정으로 태산을 쌓고 있는 중일 테니.
표지 사진 고호의 ‘아이리스’, 미국 LA 폴 게티 뮤지움 소장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