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from Los Angeles to Seoul

by 클라우디아





고향인데 이 정도는 봐주지 않을까?





미국 생활 10년을 채우고 두 아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10년 전 앵커리지를 거쳐 뉴욕으로 갈 때와 달리 돌아올 때는 뉴욕에서 서울까지 직행이었다. 남편은 취직이 되어 몇 개월 전 서울에 먼저 들어와 있었다. 서울에 도착하여 비행기 트랩 위에 한 발을 내디뎠다. 온 사방에 고국의 냄새가 빼곡했다. 엎드려 땅에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긴 트랩을 걸어 나와 짐을 찾고 입국심사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줄곧 고향 땅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강산에의 '라구요'를 특히 좋아하는 것은 황해도가 고향이었던 실향민, 시부모님의 영향도 있지만 미국에서의 10년 타향살이도 톡톡히 한몫을 한다.






[출처 : 구글 이미지]





일 년에 대여섯 번 '국제전화'로 끊어질 듯 말 듯 연결되던 고향이었다. 늘 준비만 하는 중이었던 유학생의 처지에서 고국이 과연 나를 불러주기나 할는지, 내 준비에는 과연 끝이 있을지, 불안감이 수시로 불쑥 솟구쳤다 가라앉곤 했었다. 고국은 계속 멀어졌고, 살면 살수록 살고 있던 타국도 멀어지는 기분이었기에 태평양 바다 어디쯤 표류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생활 10년 후에 찾은 강산은 정말 변해있었다.





한국을 떠날 땐 존재하지 않았던 신도시 분당에 마련된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시댁 손위 형님들께서 살림살이와 먹을거리를 준비해주셨지만 또다시 '출발'선 앞의 우리에겐 장만할 것들이 잔뜩이었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아이들과 함께 대치동의 단대부고 앞, 지금은 롯데 백화점으로 바뀐, 그랜드백화점으로 갔다. 곧장 목표지점인 지하 1층 식품 코너로 향했다. 뉴욕에서도 LA에서도 한국음식은 부족함 없이 해 먹고 사 먹었다. 미국에서 만들어 먹고 사 먹은 한국 음식과, 고향땅의 고향 음식은 달라도 많이 달랐다. 두 아들과 나는 백화점 식품관에서 갖가지 종류의 음식을 잔뜩 먹었다.





집에 돌아와 아이 둘을 양옆에 끼고 마루에 누웠다. 아직 1학기가 두 달이나 남아있었으나 가을 학기가 시작되는 9월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70~80년대의 정서, 응팔의 쌍문동 골목집들의 정서를 여전히 갖고 있던 나는 그동안 홀라당 바뀌어버린 90년대 후반의 한국 정서에 적응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경주'라는 글자를 읽을 수는 있어도 그 단어 뒤의 엄청난 함의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은 부모의 고향에선 '생초짜'였다. 무엇이던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10년은 한편으론 채운 시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만큼의 공백이었다. 제아무리 베테랑일지라도 진지한 각오를 한 선수라면 출발선 앞에 설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간이 오그라들기 마련이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또다시 올챙이가 된 나는 출발에 앞서 아이들과 함께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다. 고향인데 이 정도 엄살은 이쁘게 봐주지 않겠는가?





1996년, 봄이 끝나가고 여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표지 사진 분당신도시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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