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at Los Angeles, California

by 클라우디아





데이비드는 미국 중부 출신의 백인이다. 그가 고등학생일 때 부모가 이혼했고 일리노이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인 아버지와는 그 이후 주욱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그의 엄마는 이혼 후 의대에 입학하여 전문의 자격증을 땄다. 콜로라도에서 개업한 그의 엄마는 그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산부인과의가 되었다. 미국의 이혼율 수치에는 미국이란 나라가 제공하는 기회들, second chance들이 크게 한몫을 차지한다. 대학에 다니던 중 유럽으로 가면서 그는 엄마와도 독립했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로 빵을 사며 서유럽을 거쳐 동유럽에서 몇 년을 보낸 후 그는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남편보다 한 살 아래인 데이비드는 자신이 번 돈과 학자금 대출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고, 돈이 떨어지면 휴학하여 돈을 모으고 다시 복학하는 방식으로 대학교만 8~9년을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는 것은 미국인인 그의 머릿속에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데이비드와 남편은 같은 교수 아래, 연구조교로 만났다. 데이비드가 우리 집에 처음 온 것은 남편과의 공동작업 때문이었다. 마침 식사 때였기에 나는 인사치레로 함께 식사하겠냐고 물었다. 데이비드가 좋다고 대답했다. 우리를 만나기 전까지 데이비드가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정보는 아시아 어디쯤에 있는 나라라는 정도였다. 미국 대부분의 초등, 중등교육에서 사회과목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다. 데이비드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 아니었기에 그날따라 식탁 위는 온통 'Korean Food'이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미안함이 더해져서 안절부절인 나와 달리 그는 마음 편히, 이쪽저쪽으로 서툰 젓가락을 휘두르며 가리지 않고 잘도 먹었다. 우리 집에 처음 온날, 저녁식사 후 헤어질 때 데이비드는 벌써 우리 집 모두와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를 David라고 불렀고 그는 나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만 부르는 관계 'on a first name basis가 된 우리와 데이비드는 LA에 사는 동안 내내 친구였다.





두 아들, 데이비드네 아파트 수영장





데이비드가 우리 집에 와서 Korean food를 서너 번 먹으면 그다음 한번 정도 우리 식구가 데이비드네 집에 몰려가서 American food를 먹었다. 여름에는 우리가 데이비드네 아파트로 좀 더 자주 갔다. 물이 깨끗하고 한적한 그곳 수영장에서 우리 아이들이 놀기를 좋아했다. 데이비드와 우리는 한두 달에 한 번씩 함께 외식했다. 우리가 살던 westwood의 일식집 '도다이'와 이태리 식당 '루이지'가 줄곧 가던 곳이다. 한참 뒤 서울에 등장한 도다이와는 사뭇 다르게 LA의 도다이는 회와 초밥이 전부였고 아주 소량의 채소가 있었다. 도다이 입구에는 키를 재는 눈금이 표시되어있어서 아이들이 그곳을 지나가면 직원이 그 숫자를 일별 하여 어른 가격과 아이 가격을 따로 매겼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 아이 요금 할인을 받기 위해 나이를 속이던 문화 출신인 나에겐 대단히 새로운 면모였다. 이태리 식당 '루이지는 'decent' 한 이태리 음식점이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면서, 배와 마음을 알맞게 데워주고 채워주는 루이지를 나는 특히 좋아했다. '도다이'는 우리가 데이비드에게 소개해 준 곳이고 '루이지'는 데이비드가 우리에게 소개해 준 곳이다.






우리의 단골집, LA의 Louises's Trattoria [출처 : 구글 이미지]





데이비드는 '우정이란 내버려 두면 혼자 잘 자라는 것이 아니기에 경영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데이비드와 우리가 '경영한' 우정은 '시종일관 따땃하고, 뜨면 뜨면 하지만, 시나브로 나누는 것이었다. 당시 유학생들은 흔히 버드와이저나 쿠어스 맥주를 마셨다. 데이비드가 우리와 만날 때면, 캔이 아니라 병으로, 한두 병이 아니라 꼭 팩으로 사 오거나 사놓았던 맥주가 '벡스'와 보스턴 출신의'사무엘 아담스'였다. 좀 비싸지만 '맛있는' 이 맥주는 즉시 우리 집의 주된 주류가 되었고 지금 한국에서 고급 맥주로 소비되고 있다. 매년 미국 독립기념일이면 데이비드와 함께 베니스 비치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수많은 자동차를 따돌리고 한적하게 주차할 수 있는 곳, 언제 가야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 몇 시쯤 가야 모래 위에서 적당히 놀고, 먹고 마시다가 어둠이 내려앉아 불꽃놀이 시작점에 맞추어 마지막 맥주병을 딸 수 있는지, 모두 데이비드가 알려준 것들이다.






보스턴 맥주 사무엘 아담스 [출처 : 구글 이미지]






맥주 벡스 [출처 : 구글 이미지]






데이비드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여자 친구는 백인이었다. 수염을 몇 달이고 주욱 기르다가 한 번에 싹둑 밀고, 또 몇 달이고 내버려 둔 수염을 어느 날 쫘악 밀어버리듯, 여자 친구들과의 끊고 맺음이 밀물과 썰물 같았다. 우리가 본 두 번째 데이비드의 여자 친구는 중국 본토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우리가 데이비드를 알고 지낸 5년 동안 그의 여자 친구는 여러 피부색의, 서너 명 정도였다. 이는 대단히 미국적인 상황이다.





그는 내가 만든 Korean food 중에서 김치를 단연코 제일 좋아했다. 노르웨이의 청어요리 수르스트뢰밍이나 일본의 나또처럼 어느 인종 특유의 발효음식은 진입장벽도 높지만 한번 인이 박히면 탈출 장벽도 높아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이다. 식탁 위 데이비드 자리 옆엔 늘 수북이 김치가 쌓인 접시를 놓아주었고 우리 집에 와서 김장하는 날 두어 번 나에게 김치 담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우리 식구의 귀국 날짜가 다가오자 데이비드의 아쉬움은 우리를 못 본다는 것이 아니라 김치를 못 먹는다는 것이었다. 데이비드와 함께 한인타운의 한인 식품점으로 갔다. 5,99불짜리 작은 유리병의 김치와 9,99짜리 큰 유리병의 김치를 보여주며 김치가 먹고 싶을 때 여기 와서 사 먹으면 된다고 일러 주었다. 데이비는 작은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며칠 뒤 데이비드에게 전화가 왔다. 잘 가고, 잘 있으라는 인사 끝에 데이비드가 말했다, 한인 식품점에서 산 김치가 네가 만든 것과 다르다. 내가 대답했다, 팔기 위한 음식과 식구들을 먹일 음식 맛이 다른 건 당연하지 않은가, 너희 나라도 그렇지 않은가. 데이비드가 말했다, 알긴 아는데 그 김치는 네 것과 달라도 많이 다르다. 내가 대답했다. '그라모, 니가 해무라 그 김치.' 푸하하하하핫 하며 데이비드가 웃었다. LA에서 데이비드와 내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포기김치 [출처 : 구글 이미지]





귀국 후 몇 년 뒤 남편이 출장차 LA에 들러 데이비드를 만났다. 데이비드는 헝가리 여자와 결혼해 여전히 LA에 살고 있었다. 아들 집에 다니러 온 데이비드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여자 친구, 데이비드와 데이비드의 헝가리 아내, 그리고 아내가 헝가리에서 데리고 온 덩치가 산만한 개, 남편 그렇게 여섯 명이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고, 다섯 명의 사람들이 의자에 앉은 높이와, 그 개가 바닥에 앉은 높이가 얼추 비슷했다고, 식탁 위 제 접시에 코를 박고 혀를 날름거리며 그 개는 밥을 잘도 먹더라고, 남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미국을 '인종의 용광로'라는 면에서 들여다보면 우리의 친구 데이비드는 이렇게도 모든 면에서 '미국인'이다.







표지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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