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ninsula Hongkong
단초는 기억나지 않는다. 포상으로 받은 홍콩 호텔 숙박권에서 시작하여 휴가 계획으로 넘어가서 홍콩 중문대학교 유학 이야기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그 반대 순서였는지. 남편과 나는 타이베이를 거쳐 홍콩으로 날아갔다. 흉중에 품고 있던 '중공'으로의 유학, 그 일이 여의치 않으면 홍콩으로의 유학도 염두에 둔 현장탐사였다. 'old'함이 넘쳐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잊힌 단어 '중공', 중국을 그렇게 부르던 때였다. '중공'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여행은 물론이고 입국조차 금지된 나라였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오로지 '반공법'의 칼날만이 푸르 등등한 빛을 온 사방으로 뿜어대던 때였다. 1985년 한 여름이었다.
홍콩을 목적지로 가는 길에 타이베이에 들른 것은 대만 국립 고궁 박물관을 보고 싶다는 나의 오랜 열망이었다. 장제스가 마오에게 밀려 대륙에서 대만섬으로 후퇴할 때 공자 후손과 더불어 챙겼다는 수많은 보물을 보고 싶었다. 장제스는 그 둘이 중국의 혼이라고 말했다. 사진과 액자들이 켜켜이 먼지를 덮어쓰고 누워있는 상자를 뒤적인다. 대만 국립 고궁박물관 입구에서 찍은 남편과 내 사진 한 장을 찾는다. 촌스러움과 순박함을 반반씩 탑재한 그 사진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본다. 온 사방에 빼곡히 채워져 솜털 가닥가닥에 달라붙고, 맨살에 켜켜이 배이던 남국의 음식 냄새, 지독히도 달았던 열대과일의 맛이 지금도 생생하다.
홍콩에서 주어진 시간, 4박 5일은 '중공'으로의 입국 가능 그리고 북경 대학의 유학 여부까지 타진하기에 빠듯한 시간이었다. 촌음을 아껴 쓰고자, 화려한 호텔 아침 뷔페를 멀리하고 이른 아침 남편은 호텔 문을 나섰다. 8월 초, 서울에서 남서쪽으로 4시간 비행거리인 홍콩은 얼마나 더웠는지! 나는 몸상태가 좋지 않아 남편을 따라나서지 못했다. 김포공항 출발 때부터 시작된 감기 몸살 증상이 타이베이에서 증폭되어 홍콩에 도착하자 절정에 이르렀다. 호텔 측에 두꺼운 이불을 청해 온몸에 칭칭 동여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 뜨거운 차와 멀건 수프를 몇 숟갈 떠서 입술을 적셨다가, 침대에 누웠다가, 눈을 희멀겋게 떴다가, 스르르 눈을 감기를 하루 종일 반복했다. 저녁이 되자 폭염을 뚫고 파김치가 된 남편이 중문대학교 인근에서 구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등등의 금서와 복사본들을 한 아름 싸안고 돌아왔다.
나의 감기몸살 증상에 이렇다 할 진전도 후퇴도 없이 이틀이 지났다. 첫새벽에 나가 밤에 돌아오길 거듭한 남편이 들려주는 북경대학으로의 유학 여부에도 뚜렷한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차선으로 생각한 홍콩의 중문대학 입학은 예상대로 가능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차선'책이었다. '중공'으로의 유학은 입구가 어디 있는지 가늠키 조차 힘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이틀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우선 나의 감기몸살 증상을 완화시킨 다음, 둘이 힘을 합쳐 더 알아보자고 남편과 의논되었다. 인근 병원을 소개받기 위해 호텔 안내데스크로 연락을 했다. 호텔 홈닥터가 있었고 객실로 방문진찰이 가능했다. 의사는 한두 가지 질문을 했고, 두어 가지 간단한 진찰을 했다. 약이나 주사를 처방하는 대신 진료 가방을 챙기며 그가 우리에게 한말은 'Congratulations!'였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내 신체의 신호는 감기가 아니라 임신 증상이었다. 남편과 나는 놀라 멍한 채로 그날 오전을 보냈다. 이른 저녁이 되어 남편이 결단을 내렸다. '우리, 집에 가자.' 서둘러 짐을 챙겨 마치 무엇에 쫓기듯 우리는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무엇에 '쫓긴 것'이 아니라 혹 다른 무엇을 '쫓기 위해서'였는지!
입덧 대회에 참가한다면 나는 일등 할 자신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든 나에게 입덧으로 내기를 걸어오면 나는 주저 없이 외칠 것이다, 콜! 임신 초기부터 입덧 증상이 시작된다. 음식을 못 먹는 건 물론이고, 물 한두 모금조차도 완행으로 목구멍을 넘어가기 무섭게 급행으로 되돌아 나오기 일쑤이다. 널브러져 하루 종일 누워있기가 매일이다. 임신진단을 받자 입덧 증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장 몸이 보내는 신호를 받아 처리하기에 곤죽이 되어 미래를 '건설'하기는 뒷전이 되었다.
남편은 흉중에 품은 뜻을 거듭 들여다보았다. 가슴 깊이 넣었다가 꺼내어 어루만지고 다시 넣길 반복했다. 고심 끝에 '유학'이란 알맹이를 남기고 '중공' 대신 '미국'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가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격려는 드물었고 걱정과 심려만 불러일으킨 결정이었다. "형, 어떻게 식민지 대국으로 유학을 가요? 이건 배, 배, 배반이요, 변절이란 말이에요!'라며 남편에게 대놓고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영어시험, I-20, GRE라는 시험을 치르었고 재정보증서와 더불어 서류 다발을 한 뭉터기 갖추어 미국 대학으로 보내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서류를 보내고 받는 방법으론 우체국을 통한 방법이 유일했다. 입학 신청서가 미국으로 가는데 한 달, 오는데 한 달이었고 대학에서의 처리과정도 두어 달이 걸렸다, 아무 문제없이 신속하게 처리되어도.
대한민국에서의 신원조회를 거쳤고 미국 대사관에서의 비자 인터뷰 등등 '합법적'인 절차를 통과했다. 외국에 나가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정부가 강제했던 '예절교육'도 이수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호텔이나 실내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지 않아도 된다, 구태여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악수... 등등이 교육내용이었다. '정부가 부과한'이란 단어 대신 '정부가 강제한'이란 단어를 구태여 쓰지 않을 수 없는 '예절' 교육이었다.
홍콩 Peninsula Hotel에서 자신의 존재를 고한 큰아들의 돌잔치를 치르고 몇 달 뒤, 남편과 나는 양손에 이민가방을 하나씩 들고 여권을 주머니에 넣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표지 사진 1980년대 홍콩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