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New York
가을 신학기를 두 달 앞두고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4개의 '이민가방'에 남편과 나의 소유물 전부를 챙겨 담았다. 바닥에서 시작하여 가방 옆구리를 담쟁이넝쿨처럼 뱅뱅 감아 올라가며 붙어있는 기다란 지퍼를 열면, 바닥에 누워있던 가방이 어깨 높이까지 차르륵 펼쳐지며 솟아오르는 '해외 이민용' 가방이었다. 애당초 해외유학을 염두에 둔 신혼살림이었기에 정리할 짐은 많지 않았다. 버릴 것과 맡길 것, 갖고 갈 것을 정리하며 되뇐 결심은 단 하나였다. 한국을 떠나며 갖고 가는 '이빨'을 한 개도 잃지 않고 다 챙겨 돌아오기.
앞서 유학 간 선배들이 들려주는 갖가지 무용담을 곁들인 충고에는 비싼 병원비와 유학생으로서 감당하기 버거운 의료보험비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특히 이빨은 문제가 생겨도 치료를 미루고 미루다 종당에는 뽑아 버리게 된다는 에피소드를 다소 공포스러운 맘으로 새겨 담았다. 거울 앞에 서서 입을 크게 벌리고 그 속에 가득한 이빨 수를 찬찬히 세었다.
김포공항으로 떠나기 전 어머니께 작별 전화를 올렸다. 백제시대 불상을 떠올리게 하는 잔잔한 미소 외에는 말씀도 없으시고 감정도 도통 드러내지 않으시는 어머니께서 울먹이셨다, 미안하다시며. 일산 호수 근처 땅을 한 자락 떼어 팔아 유학자금을 대어 주시는 것을 비롯해 자식들에게 하실 수 있는 바를 다하셨던 어머니께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며 우셨다. 화도 슬픔도 즐거움도 겉으로 드러내시지 않던 분의 울음에 몹시 놀랐다. 바로 엊그제 시댁에 가서 뵈었을 때도 그저 생선조림 냄비와 여러 반찬들을 내 앞으로 미시며 '뜨거울 때 어서 먹어라'하시던 어머니께서. 문 앞에 서서 말없이, 휘어 적 휘어 적 손을 두어 번 흔드시며 애절한 눈빛만이 가득했던 어머니께서. 그 후 몇십 년이 흐르며 그 시간 속에 나의 많은 이야기들이 채워지고, 그렇게 삶의 깊은 곳에 들어가 어머니의 눈물을 만났다. 어렴풋이나마 어머님의 슬픔이 손에 잡힐 듯하다. 자식은 그저 애틋한 존재라는 것을.
서울에서 뉴욕까지 직행 비행노선이 없던 시절이었다. 도쿄를 경유하는 미국 국적 항공사와 앵커리지에서 쉬어가던 국적기 중에서, 중간쯤에 쉬는 것이 낫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앵커리지 경유를 선택했다. 남편의 강권으로 우동 한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눈물만큼은 부족하지 않는 나는 눈물 반 우동국물반을 뱃속으로 흘려 넣었다. 다시 올라탄 비행기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미국에서의 첫날, 뉴욕 퀸즈 플러싱에 있는 큰 시아주버님의 친구분 댁에 머물렀다. 한밤중에 도착해서 대여섯 시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일어나서 차려주시는 밥상 앞에 앉았다. 뽀얀 쌀밥에 고깃덩어리가 가득한 미역국과 새빨간 배추김치를 곁들인 아침밥을 양껏 먹었다. 동면을 앞둔 곰처럼, 타지에만 나서면 잔뜩 배를 채우는 습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뉴욕 플러싱에서 맨해튼까지 가는 지하철은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플러싱에는 아시아에서 온 이민자들, 특히 한국인, 베트남인들, 중국인들이 많이 살기에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었다. 미국 동부 최대의 한인 타운답게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를 타고 다니는 승객의 대다수가 한국 이민자들이었다. 차량 외부가 짙은 보랏빛으로 칠해져서 '퍼플 트레인'이라고도 부르는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를 타고 앞으로 다니게 될 학교를 둘러보기 위해 뉴욕에서의 첫발을 디뎠다.
대학들이 제법 모여있는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뉴욕 특유의 냄새를 처음 맡았다. 파리의 몽마르트르를 떠올리게 하며 대학가 특유의 활달함과 뉴욕 고유의 냄새가 유유히 떠다니는 동네였다. 학교에 가서 몇 가지 행정 처리를 마무리 짓고 나와 근처의 크거나 작은 골목들을 부러 헤매었다. 워싱턴 스퀘어에서 뉴욕의 작거나 큰 공원들 공통의 특징들을 처음 맛보았다. 그 뒤 점차 알게 된 뉴욕, 뉴저지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원엔 일단 노래나 연주가 늘 존재한다. 벤치나 잔디밭엔 어김없이 커플들이 포개어 앉아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연출한다. 숭모근이 더부룩한 노인들은 스카프나 베레모로 희거나 성긴 머리털을 가리고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작거나 큰 개들이 순하게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풍광을 채운다. 지하철 환풍기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을 이리저리 피하며 낯선 상점들 쇼윈도에 코를 박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보니 반스 앤 노블 서점이었다. 남편은 책더미 속으로 들어가 파묻혔고 몇 권의 책을 뒤적이던 나는 슬슬 배가 고파졌다. 먹을 만한 곳을 추천받기에는 현지인의 입맛만큼 좋은 추천서는 없는 법이다.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다 딱 보기에도 뉴요커로,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맘 속으로 준비한 문장을 찬찬히 읊었다. "Where can I find kenturky fried chicken restaurant?"
그 당시 내가 알고 있었던 유일한 미국 국적 프랜차이즈 식당이 종로에 있던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었다. 칼로리가 높은 음식, 건강하지 못한 음식이란 부정적 평가 때문에 여러 가지 이미지 작업과 더불어 "KFC"로 개명하기 이전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할 것이란 내 기대와는 달리 그 대학생인듯한 뉴요커는 어깨를 살짝 으쓱거리더니 '동양여성인 당신이 하는 영어는 당최 못 알아들겠는걸!' 하는 표정을 만들었다. 상대방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동시에, 그리고 철저히 나는 느꼈다. 그 '뉴요커'는 대답하기 귀찮은 상황을 동양인이 구사하는 영어의 억양과 발음으로 퉁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주저 없이 그리고 소리를 약간 높여 말을 이었다. 'Oh then, I will spell it out for you!, K-E-N-T-U-R-K-E-Y F-R-I-E-D C-H-I-C-K-E-N!".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의 영어 스펠링을 하나씩 또박또박 끊어 말하는 나의 대응에 당황한 뉴요커는 'Oh you mean, kenTURkey fried CHicken!, Okay, you follow this way and .....'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에서 '터'를 일부러 강하고 높게 발음하는 그의 속 마음은, “높낮이가 없는 너의 영어, 그 'intonation' 좀 구리거든!'이란 뜻 이리라.
미국에서 뱉은 첫 문장을 한방에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했다고 주눅 들거나 움츠러들 정도로 나는 그리 말랑말랑 하지 않았다. 그 정도 일로 오그라들만한 쪼글쪼글한 심장을 챙겨 들고서 외국 땅으로, 18시간을 날아가지 않았다.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꿀'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나선 길이었다. 직장 직속 상사는 구체적인 대안과 계획으로 나의 잔류를 권했고, 그 직장에서의 성취감과 경제적인, 사회적인 보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물론 두어 달 뒤 합류하기로 되어있었지만, 돌잡이 아들을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나선 길이었다. 앵커리지에서 우동국물반, 눈물 반을 섞어 들이킨 내가 뉴욕으로 챙겨간 행장은, 가까운 이웃나라로 며칠 여행을 다녀오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남편을 이끌고 마치 뉴욕에 몇 년 산 사람처럼 유유히 골목골목을 돌아, 뉴요커가 가르쳐준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레스토랑을 쉬이 찾아 들어가 '그레이비소스가 질질 흐르는 메쉬드 포테이트'를 반찬 삼아 바싹 튀긴 닭다리를 물어 뜯었다. 뉴욕에서의 두 번째 끼니였다. 1987년 여름이 바야흐로 시작되는 날이었다.
표지 사진 뉴욕 워싱턴 스퀘어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