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New York
미국 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서를 받고 태평양 건너로의 이주 절차를 진행했다. 그중 진전은 없고 마음만 부대꼈던 유일한 일은 아들과 함께 떠날 것인가, 우리 부부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직장에 다녔던 나를 위해 친정엄마가 줄곧 곁에서 아들을 돌보아주고 계셨다. 이역만리 낯선 곳에서 정착하는 초기단계에 갓난아기를 데리고 가서 함께 고생할 필요가 있냐는 어른들의 뜻을 따랐다. 우리 부부가 먼저 가고 아들을 데리고 친정엄마가 뒤이어 오시기로 결정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일도 아니건만 그때는 왜 그리 유난을 떨었는지. 이 세상 슬픔은 혼자 독차지라도 한 듯 아들을 '떼어놓고 간다'는 생각에 나는 걸핏하면 울었다. 아기들은 바로 눈앞에서 엄마가 안 보이면 잘 가누지도 못하는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애타게 엄마를 찾는다. 장 보러 갔다가 또는 직장으로 출근했다가 조금 후에 혹은 해가 지면 엄마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기가 깨닫기까지는 시간과 반복된 학습이 필요하다. 내가 그랬다. 나도 엄마로서는 아기였다, 그때엔.
친정엄마는 내가 공항으로 출발하는 시간에 맞추어 일부러 아들을 재우셨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내 맘이 덜 힘들 것이라는 '엄마'의 생각이었다.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아들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속에서, 비행기에서, 중간 기착지인 앵커리지에서 나는 쉼 없이 울었다. 뉴욕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문제의 '적응'과정 중에도 시시때때로 울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친정으로 전화해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시간이 좀 흐르고 아들의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엄마야 엄마. 엄마 해봐’라는 내 간청이 전화선을 통해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을 건너 서울로 먼길을 떠났다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들과 몇 마디 안 되는 통화를 마치고 전화기를 놓으면서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코를 팽! 하고 풀며 눈물 콧물을 닦고 나면 온몸의 물기가 쏙 빠졌다. 그리고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 핏줄과 근육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기를 한참이나 반복하여 아들이 오는 날이 다가왔다.
괜스레 허둥대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빨래 거리를 끌어모아 laundromat (빨래방)으로 갔다. 1달러 지폐를 두장 내고 25센트짜리 동전 8개로 바꾸었다. 동전 몇 개를 먹고는 쿠당탕거리며 힘차게 돌아가는 세탁기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세탁을 마친 빨래를 건조기로 옮겨 담았다. 동전을 먹고 휙휙 돌아가는 건조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맘이 오르락내리락거려서 괜스레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꼭 사야 할 물건도 없건만 지갑을 챙겨 들고 동네 슈퍼에 갔다. 있어도 없어도 되는, 쟁여 놓아도 상관없는 물건 두어 개를 카트에 담고 계산대에 서서 지갑을 열었다. 20달러짜리 지폐가 두장이 없어졌다. 미국 돈은 100달러, 20달러, 10달러, 5달러, 1달러, 여하 간에 지폐들의 크기와 색깔이 다 똑같다. 종이 위의 인물들만 다들 뿐이다. 섬세한 뽀샵으로 권위를 입은 지폐 위의 인물들은 죄다 '그분'이 '그분'처럼 보였다, 외국인인 내 눈에는.
그 며칠 사이 내가 현금을 쓴 일이라곤 그날 아침 빨래할 때뿐이었다. 슈퍼에서 나와 집으로 가면서 빨래방에 들렀다. 내가 아침에 이곳을 다녀간 것을 기억하는지, 동전을 바꾸기 위해 1달러가 아닌 다른 지폐를 당신에게 준 듯한데 혹시 알고 있는지 묻자 주인인 중국 남자의 얼굴에서 손님으로 나를 반기던 자본주의 미소가 사라졌다. '네가 준 것은 1달러짜리 지폐 두장이었지 절대로 20달러 지폐가 아니었다.'며 중국인 주인은 두 손과 두발을 휘저으며 침을 튀겼다. 나는 20달러라는 숫자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20달러'라는 말에 상황이 파악되었다. 배추 셀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포기만은 쉽고도 빠른 나는 서둘러 빨래방을 나왔다. 세탁기와 건조기 같은 대형 전자제품을 사지 않는 등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자 했던 맘을 바꾸고 세탁기를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20달러나 10달러짜리 지폐를 1달러로 착각해서 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유학생과 교포분들에게 들었다.
그때는 비행기가 자주 그리고 많이도 연착되었다. 친정엄마와 아들을 태운 비행기는 도착 예정시간인 밤 9시 50분을 훌쩍 넘겼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넘어섰다. 비슷한 시간대에 남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가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일어났다 섰다를 반복하다가 옆자리의 40대 후반 여자와 자주 눈이 마주쳤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매우 새침데기였고 낯선이 와 쉽사리 말을 섞기는커녕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는 편이었다. 감정적으로 많이 동요된 상태에서 오랜 시간 공항에 못 박혀 출구만을 바라보는 와중이어서인지 옆자리의 그녀와 말을 트게 되었다. 그녀는 고향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오는 엄마와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으로 밀입국하여 영주권과 시민권을 받고 가족을 초청하여 만나게 되기까지의 눈물겨운 그녀의 사연을 들었다. 내가 기다리는 비행기도 그녀의 가족을 태운 비행기도 3시간이 넘게 연착되어 그녀가 가족을 만나기까지 걸린 녹녹지 않았던 20여 년의 사연을 듣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전광판에 뜬 서울에서 오는 비행기 번호 옆의 글씨가 delayed에서 landing으로 불쑥 바뀌었다. 탑승객들이 나오는 문쪽으로 서둘러 바싹 다가갔다. 문이 열리며 장시간 피로에 푹 삶긴 승객들이 한 명씩 집체만 한 보따리를 밀고 당기며 나왔다. 그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나는 목을 주욱 뺐다가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부지불식간에 꼭 잡은 남미 여인의 손과 내손에서는 끈적거리며 땀이 배어 나왔다. 한참이 흐르고 빼꼼히 열리는 문 사이로 파란 낮잠이불이 보였다. 아들이 잠잘 때건 아니건 손에서 쉬이 놓지 않았던 자그마한 크기의 낮잠용 이불이었다. 문이 조금 더 열리자 아들의 얼굴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들은 황급히 몸을 돌려 되돌아갔고 문이 닫혔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고 아들은 얼굴을 내밀어 나와 눈을 마주친 다음 몸을 획 돌렸고 문이 다시 닫혔다. 열린 문틈 사이로 검색대 앞에 서계신 친정엄마의 모습도 보였다.
몸이 으스러지라 서로를 부둥켜안고 얼굴과 얼굴을 비비대며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는 감격적인 모자간의 상봉을 예상했었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내 눈물보가 터졌다. 아르헨티나 여인이 나를 안고 다독였다. "He is yours. I tell you, he belongs to you. You know, I am here to meet my mother after long and twenty some years , Oh my! After twenty some years. Don't you ever worry about this, he is yours." 32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반복했던 이 말을 나는 기억한다.
공항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도 아들은 내 품에 안기지 않았다. 할머니 옆에 바싹 붙어 앉아 내내 창밖을 보았다. 그러다 내 눈과 설핏 마주치면 시선을 홱 돌렸다. 친정엄마는 민망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비행기 타고 오면서 내내 엄마 아빠 보러 간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엄마 아빠한테 가는 것 맞냐고 묻고 또 묻더니만 왜 이러지 아이고 참나." "이러다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응 그럴 거야, 니 자식인데 어디 가겠니.'
집에 와서도 아들은 아빠품에는 안기면서도 나는 피했다. 하루 이틀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자동차 안에서 아들이 앞에 가는 자동차 뒷 범퍼의 글씨를 가리키며 "저거 뭐야?" 하고 물었다. "Ford, f - o - r - d"라고 내가 답했다. "Ford. f-o-r-d?"라고 아들은 내 말을 따라 읊었다. 미국이니 물건이건 건물이건 위에 쓰인 글씨란 죄다 영어인 것이 당연하다. 하루가 다르게 어휘가 늘고 한창 질문을 많이 할 시기였다. 보이는 글씨마다 가리키며 아들은 물었고 나는 답했다. 어느 사이 아들이 그렇게 내 옆에 앉았다.
뉴욕에서의 상봉 초기 두어 주 동안 꼼꼼히 밀당했던 아들과 나는 이내 예사로운 모자 사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밀어 놓았던, '아들을 떼어놓았었다'는 미안함은 쉽사리 사라져 주지 않았다. 그 죄책감은 무더위가 한창인 여름철에 반길 리 없는 손님처럼 불현듯 찾아와 나를 수시로 괴롭혔다. 내 죄의식은 아주 느리고 고통스럽게 희석되었다. 아들이 입에 물고 서울서 뉴욕까지 끌고 온 그 파란 '포대기'를 이야기하며 아들과 함께 웃게도 되었다. 자식 키우기란 과업에 점철된 실수와 후회에 유달리 예민했던 나는 이제 보통의 엄마가 되어 아들에게 질척거리기 일쑤이다. 아들과의 사소한 일에는 한눈뿐만 아니라 두 눈 다 질끈 감을 줄도 알게 되었다, 보통의 모자 사이가 그러하듯이.
세월이 가르치는 지혜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어찌 그리 다 똑같고 또 그렇게 옳은지! 'He is yours." "니 자식인데 어디 가겠니?"
표지 사진 뉴욕 KFK Ininternation Airport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