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New York,
나는 '집순이'다. 어느 해, 남편의 출장을, 아이들은 여름캠프를 가고 나 홀로 집에 있었다. 6박 7일 동안 집 밖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아침이면 제시간에 일어나 평상시와 같이 일상을 꾸렸다. 저녁이면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집 밖에만 나가지 않았을 뿐이다. 사부작 거리며, 꼼지락 거리며 하루 종일 집에서,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 일주일이 아니라 2~3주 동안이라도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만 지낼 수 있다, 알차게 생산적으로.
나에겐 창의적이라든가 모험가적 기질이 없다. 익숙한 그 무엇도 나는 바꾸고 싶지 않다. 5년이고 10년이고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닌다. 다른 길이 있는지, 그 길이 혹시 더 빠르거나 편한지 알고 싶지 않다. 뚜벅뚜벅 이 길을 걷노라면 언젠가 목적한 바를 이루겠지 와 같은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야망도 없다.
1987년 여름,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간 것은 이렇게 내가 살아온 방식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일이었다.
뉴욕에 도착하여 큰 시아주버님 동창분께서 준비해놓으신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낯선 동네의 마트를 찾아가 장을 보고, 필요한 살림살이를 갖추었다. 그 모든 일은 새로웠고 그래서 서툴렀다. 뉴욕에 도착한 첫 주말이었다. 선배들이 우리 부부를 환영하는 식사자리를 마련해주셨다. 선배 한 분이 하굣길에 맨해튼 지리를 모르는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우리는 고국의 따근따근한 소식을 전해드렸고, 선배들에게서 경험담과 조언을 받아들였다. 식사와 이야기로 늦은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임 장소는 맨해튼 업타운 쪽이었고 우리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타임스 스퀘어 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다. 어디서 어떻게 지하철을 갈아타는지 몇 번이고 반복하여 우리에게 하달된 지침을 소중히 담고 여러모로 명성이 드높은 뉴욕 맨해튼 지하철을 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줄리아니 뉴욕시장이 'Broken Window Theory'이론을 들고 나와 뉴욕시 범죄소탕을 위해 정책을 실행하기 이전의 뉴욕 지하철이었다. 건물 창에 깨진 유리창이 있으면 그 건물이 위치한 구역은 범죄의 소굴이 된다는 이론이다. 뉴욕시장으로 당선된 줄리아니가 거리와 지하철의 낙서를 지우며 뉴욕 범죄를 근절하기 시작하기는 1994년부터였다. 하지만 뉴욕에 도착한 남편과 내가 환승을 위해 타임스 스퀘어 역에 내렸을 때는 1987년이었다. 그 역은 낙서뿐만 아니라 홈리스들의 주거지로서도 명실공히 미국 최고, 세계 최고의 '명성'을 드높이던 곳이었고 아주 늦은 밤이었다. 타임스 스퀘어라는 단어는 홍등가와 마약의 거리로도 읽히던 때였다.
타임스 스퀘어 지하철 내의 통로는 미로였다. 통로의 조도는 암굴처럼 낮았다. 이 세상 모든 냄새들이 뒤섞여 천장과 바닥 그리고 벽을 빼곡히 매우고 있었다. 예상이 안 되는 곳에서 길이 없어졌다. 짐작이 안 되는 곳에서 불쑥 사람이 튀어나왔다.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면 내가 지나칠 때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통로가 그제야 보였다. 지하철 환승로는 곡선으로 휘영청 굽이졌고 바닥은 오르락내리락거렸다. 통로의 끝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길을 헤매고 있다는 느낌이 차올랐다. 그 모든 통로의 벽은 낙서로 빈틈이 없었다.
어찌어찌하여 갈아타야 할 기차가 서는 승강장에 이르렀다. 우리 외에 한두 사람이 서있었을 뿐이었다. 한참을 기다렸다. 늦은 시간에 더하여 더 늦은 시간이 되었다. 기차가 들어왔다. 남편이 앞서 타고 나는 뒤따랐다. 한 발을 안으로 딛고 나머지 발을 떼는 순간 우리가 타려던 기차가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잠깐! 내려보셔요. 이 기차가 아닌 것 같아요!' 남편에게 이 말을 하며 지하철 안에 들였던 발을 뒤로 물렸다. 황급한 내 목소리에 뒤돌아선 남편이 전철 밖으로 나오려던 찰나 문이 닫혔다. 듬성듬성 한 두 명의 승객과 낙서만을 빼곡히 태운 차는 출발했다. 남편은 떠났고 나는 승강장에 남았다.
둘러보니 나는 낙서와 오줌의 세계 한 중앙에 서있었다. 늦은 시간 맨해튼 지하철의 거주민은 인근의 홈리스들이다. 그들은 지하철 내 어디선가 늘 오줌을 쌌거나 오줌을 싸고 있거나 오줌을 쌀 사람들이었다. 맨해튼 지하철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 두 가지는 알 수 없는 요소들과 결합된 순도 높은 오줌 냄새였고 테두리를 시꺼멓게 두른 낙서들이다. 남편을 태운 지하철이 떠나자 승강장에 남은 것은 지독한 오줌 냄새였다. 조르주 쇠라의 그림 속 사람들처럼 흐릿한 윤곽의 홈리스들과 나였다.
남편을 태운 기차는 몇 군데 역에만 서는 급행이었고 게다가 우리 집과는 반대방향이었다. 그 기차가 떠날 때 차량 옆구리와 꽁무니의 전광판을 보고 알았다. 그 기차를 타면 안 된다는 내 느낌은 맞았다. 이토록 낯선 도시의 지하에서 그토록 어두운 시간에 홀로 발을 빼어 승강장에 남은 내 본능은 틀렸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남편과 같이 있어야 했다. 다음에 오는 지하철을 탄다고 해결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핸드폰인지 셀룰러폰인지가 소수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시절이었다.
그냥 서있었다. 일행과 떨어져 길을 잃었을 때 섣불리 자리를 떠서는 안 된다고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거니와 남편은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나 나는 남편을 태운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남편이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니 승강장 이편저편에 앉아 있거나 서있는 홈리스들 숫자가 많아졌다. 많아진 듯했다. 단순히 잠자리를 위해 더 많은 이들이 지하철을 찾아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늦은 밤 타임스 스퀘어 지하철 승강장에 홀로 서있는 동양인 여자였다. 쇠라의 그림 속 사람들처럼 그들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였고 내쪽을 보지 않으면서 나를 보았다. 불투명한 동선과 목적을 드러내지 않는 시선이었다.
상행선 반대편 승강장이 같은 지하철의 하행선 승강장이 아닌 곳이 타임스퀘어 지하철역이다. 10개가 족히 넘는 수의 지하철 노선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넓이와 복잡함이 가늠되지 않는 지하에서 하나의 점처럼 못 박혀 있는 나를 남편은 찾아내야 했고 나는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우리 둘 다에게 뉴욕 지하철은 초행길이었다.
영겁 같은 시간이 흘렀다. 뜻 모를 정적과 역사를 가득 매운 뿌연 공기를 뚫고 희미한 기척이 들렸다. 뉴욕경찰 두 명을 좌우로 대동한 남편의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이 저 멀리 모퉁이에서 뿌옇게 솟아올랐다. 한참을 달려 첫 정거장에서 내린 남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지체 없이 곧장 경찰을 찾았다고. 상황 설명을 들은 경찰은 아마도 너희 부부가 헤어진 곳이 어디쯤일 거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확히 내가 서있는 곳으로 남편을 데려다주었다.
대로로만 걷고자 해도 허방을 짚기 일쑤인데, 하물며 낯선 곳에서 늦은 시간이니 일이 하나쯤 터질 법도 했다. 타임스 스퀘어에서의 에피소드는 바로 그러하다. 또한 투수가 던지는 공의 속도와 구질을 타자가 어찌 왈가왈부할 것인가? 신이 던지는 직구, 변화구, 땅볼을 두 눈으로 담아내며 나는 그저 연습과 본능에 기대어 방망이를 휘두르는 존재임을 알게 된 1시간짜리 수업이었다.
일이란 느닷없이 터지기 마련임을 그 뒤로도 계속 배웠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양서류가 되었다. 23년 동안 한 헤어디자이너에게 머리 커트를 맡기고 있는 나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여전히 가던 길만 다니고 먹던 것만 먹는다. 5년 전, 이탈리아 소도시를 3주 동안 홀로 헤치고 다녔던 나는 '진보'적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에 고심과 두려움으로 주저하면서 곧잘 시도하고 깨지고 있는 중이다.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내려 테르미니역까지, 테르미니역에서 산마조레 성당 옆 숙소까지 구글맵을 참고하며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혼자 찾아갔다.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관광객뿐만 아니라 주민조차 듬성한 이탈리아 소도시를 찾아다녔다. 어슬렁 거리며 굽이진 골목길을 쉬엄쉬엄 걸었다. 돌아가는 기차 시간을 파악은 했으나 구태여 예약은 하지 않았다.
인생의 많은 변수가 나를 키웠다.
표지 사진 뉴욕 타임스퀘어 전철역 입구 중 하나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