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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라우디아 Aug 13. 2019

장카 아저씨

 from NY to Rutherford, New Jersey





뉴욕에서 뉴저지주의 러더포드(Rutherford)로 이사했다. 아들에게 좀 더 느슨하고 편한 환경을 주고 싶었다. 아들이 아무 때라도 집 앞에서, 동네에서 맘껏 뛰어놀 수 있기를 원했다. 뉴욕 Port Authority Bus Terminal에서 190번 버스를 타면 30분이 채 안 걸려 갈 수 있는 작은 동네였다. 우리가 이사 간 집은 1층짜리 건물들이 소꿉장난하듯 옹기종기 모여있는 자그마한 단지 내에 있었다. 한국인 가족이 3가구 있었다. 두 집은 우리처럼 유학생 가족들이었고, 다른 한 집은 이민오신 분들이었다. 부모들이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텄다. 아이들이 이내 어울려 놀며 친구가 되었다. 이 집 저 집 우르르 몰려갔다 몰려오며 밥도 같이 먹으며 듣는 타국살이에 대한 조언은 신참인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귀중한 정보였다. 그리고 누구 못지않게 우리 가족이 Rutherford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은 장카아저씨였다.





아파트나 콘도미니엄 (주택단지)을 관리하는 일, 상하수도 문제라든가 쓰레기 처리, 자질구레한 보수일까지도 하는 분들을 '수퍼'라고 불렀다. '수퍼린텐던트 (superinten dent, 관리인)'의 약자이다. 장카아저씨 (Mr. Zanka)는 그 주택단지의 '수퍼'였다. 이사 간 곳에서 처음 그리고 꾸준히 맞닥뜨리게 되는 관리인의 친절은 곧 이사오길 잘했다는 뿌듯함의 도화선이다. 장카아저씨는 막힌 식기세척기의 배수관을 수리하러 와서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 기계에 적절한 세제와 세제를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곳을 알려주던 세심한 관리인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침에 눈떠서 저녁에 잘 때까지 쉼 없이 이거 저거를 가리키며 질문을 쏟아내는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미국인들이 대체로 어린이들에게 친절하지만 혼자 사는 장카아저씨가 행동으로 보여준 아이들을 향한 친절과 인내심은 가히 교과서적이었다.





그는 요즘 말로 하자면 '금손'이었다. 그의 눈빛은 송아지의 그것처럼 유순했다. 팔이 길었고 동작이 느릿하고 우아했다. 울창한 밀림과 격류가 흐르는 강, 악어 몇마리가 숨어있을 법한 늪도 거칠 것 없이 달릴 것 같은 둔중한 몸체의 쉐보레 트럭이 그의 '장비'였다. 온갖 도구가 그득한 커다란 상자는 그의 동반자였다. 장카아저씨는 아침 일찍부터 늘 무언가를 수리했다. 쓰레기를 정리하거나 빗자루 들고 이곳저곳을 쓸었다. 정기적으로, 계획에 따라 건물 내외를 페인트칠하는 것도 장카아저씨였다. 그도 저도 다 끝내면 장카아저씨는 뒷마당으로 가서 자신의 트럭을 닦았다. 장카아저씨는 자신의 쉐볼레 트럭을 바라보며 애정을 듬뿍 담아 'My Chevy'라고 불렀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여운 법이다라는 속담을 배운 이유가 바로 장카아저씨와 그의 트럭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내 눈에는 낡아 빠진, 덩치는 또 산만한 미련 곰탱이 같은 트럭이 장카아저씨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인 듯했다.





chevrolet Pickup Truck in the 80s [출처 : 구글 이미지]





버트 랭커스터라는 옛날 미국 배우를 무척이나 닮은 장카아저씨는 가히 단벌신사라 부를 만했다. 겨울이고 여름이고 페인트와 얼룩 투성이인 한두 벌의 청바지만을 입었다. 여름이면 목이 주욱 늘어난 반팔티셔츠, 봄가을에는 보푸라기 투성이의 스웻셔츠, 겨울에는 스크래치 투성이의 낡은 가죽잠바가 그의 옷차림의 전부였다. 그가 일 년 동안 입는 의복의 수는 대여섯 벌에 불과했다. 그의 속내를 알만큼 가깝게 알고 지낸 건 아니기에 그가 진정으로 신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벌신사'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 대단히 근접한 사람이었다. 허리가 살짝 구부정하고 햇빛에 탄 분홍빛 피부에 수염이 노릇노릇한 장카아저씨는 행동거지가 조용하고 점잖아서 나는 주저 없이 그를 신사라고 불렀다.





단지 내의 모든 문제를 그는 혼자 돌보았다. 못 고치는 문제가 없었던 그는 우리 단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만능인’이었다. 어떤 문제건 연락만 하면 그의 쉐보레가 울컹! 컹! 커억!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주차장에 들어섰다. 조수석에서 도구 상자를 꺼내 들고 성큼성큼 걸어와 약속했던 정확한 시간에 장카아저씨는 초인종을 눌렀다. 볼 때마다 일만 하는 아저씨, 안 볼 때도 일만 하고 있을 것 같은 아저씨, 매일 같은 작업복을 입는 단벌신사 아저씨, 말이 없는 아저씨, 수줍기 그지없는 장카아저씨의 변신을 본 날은 어느 일요일이었다.





Rutherford의 고만고만한 동네들 중 하나인 우리 마을 한복판에는 자그마한 로터리가 있었고 로터리 한쪽에 버스정거장이 있었다. 주중에는 뉴욕으로 가는 버스가 제 시간이 되면 조용히 다가와 몇 명의 승객을 조용히 태우고 미련은 1도 없다는 듯이 냉큼 사라졌다. 일요일이 되면 로터리의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멋지게 백발을 멋지게세팅한 할머니들과 양복에 구두까지 깔마춤한 할아버지들이 좁은 버스정거장에 모여들었다. 카지노 도시인 아틀란틱 시티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라스베이거스나 아틀란틱 시티와 같은 카지노 도시들은 대체로 볼거리가 화려하고 먹거리가 맛있으며 저렴한 편이다. 그것들로 일단 사람들을 유인한 다음 도박으로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 날름 먹겠다는 간단한 이치이다.





화투던 당구던 내기라면 어떤 것도 해본 적이 없는 우리 부부는 아틀란틱행 버스가 로터리에 있다는 것을 말로만 들어 알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전, 아이스크림가게로 가기 위해 아이와 함께 로터리를 지나고 있었다. 햇빛에 찬란히 빛나는 은갈치색의 벤츠 운전석에 앉은 멋진 슈트의 남자가 저 멀리서 아이와 내 이름을 불렀다. 엄마인지 이모인지 곱게 나이 드신 할머니를 옆에 태우면서 입안의 이빨을 남김없이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웃었다. 별로 쓰고 싶은 감탄사는 아니지만 이런 경우야 말로 'Oh my goodness!', 장카아저씨였다.





마트를 다녀와 장본 물건을 부엌에 냅따 던져 놓고 이웃집으로 다다다닥 달려갔다. 로터리에서 본 장카아저씨의 모습을 설명하였다. 세상에나! 장카아저씨는 우리가 사는 단지 전체의 주인이었다. 페인트와 얼룩 투성이 작업복을 입고 도구 상자와 부르르르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는 낡은 쉐보레 트럭을 친구 삼아 단지 내 모든 잡일을 하는 장카아저씨는 부동산 부자였다. 쉼 없이 일만 하던 아저씨, 별다른 일이 없으면 화단이라도 한번 쓰다듬던 아저씨, 있지도 않은 먼지를 구석구석 아낌없이 쓸던 아저씨는 건물주였다. 그 큰 주택단지 전체가 장카아저씨 소유였다. 그는 요즘 말로 하면 '갓 물주'였다. 유대인 부동산 부자인 장카아저씨의 유일한 취미가 한 달에 한두 번 아틀란틱 시티의 카지노에 가는 것이라고 이웃집 엄마는 크크 크큭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본인 말로는 카지노에 가서 제법 돈을 '흥청망청' 쓰고 온다고 말하지만, 장카아저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단지 내 사람들의 '합리적 의심'이었다. 장카아저씨가 맘껏 써봤자 20~30불은 넘지 않으리라는 것이 단지 내 사람들의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집채만 한 'My Chevy'가 크르륵 컥! 하는 기침, 가래소리와 함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얼룩과 페인트 투성이의 청바지에 목이 주욱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장카아저씨가 운전석에서 훌쩍 뛰어내려 조수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도구 상자를 꺼냈다, 늘 그러했듯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소도시에 대한 내 애정은 여전하다. 그 애정의 주원천은 '멋진 건물주, fine landlord'이자 '근면 성실한 관리인, diligent superintendent'이었던 Mr. Zanka였다. 그가 우리들에게 부과한 임대료는 상식선 그 자체였다. 그에게 우리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결코 금융업이나 학계에서만 성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이도 바로 장카아저씨였다.







표지 사진  Rutherford, New Jersey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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