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Rutherford, New Jersey
장을 보러 다니던 곳은 세 곳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작고 늘 분위기가 나른한 동네 마트가 있었다. 집에서 조금 걸어나가면 자그마한 로터리가 있다. 처음에 보이는 집이 레이스 장식의 커튼을 무겁게 드리운 체 문이 닫혀 있던 시간이 더 길었던 미용실이다. 그 옆이 책 보다 먼지가 더 많을 것 같은 서점이다. 책방 주인은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고 한두 사람이 책을 보거나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문을 여는 시간보다 닫는 시간이 더 긴 미용실과 책 보다 먼지가 더 많은 서점을 지나면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철물점 (Hardware Store)이었다. DIY (Do it yourself)가 예사로운 풍광인 미국 소도시에서는 철물점이 예전으로 치자면 우리의 방앗간 같은 곳이다. 소소하게 우유 한팩, 신선한 계란 한 줄, 양파 두어 개나 채소 한두 다발을 사러 다녔던 동네 마트가 철물점 다음 가게였다.
휴지나 세제처럼 많은 양의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제법 가야 하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인 Acme로 갔다. Acme로 장 보러 가는 날은 이웃과 뭉쳐서 같이 가거나 서로가 부탁하는 물건들을 사다 주었다. Acme를 혼자서 모오오올래 다녀왔다는 것은 나머지 세 집에게 '나 완전 삐쳤소.'라는 포고와 다름없었다. Acme를 어느 한 집 하고만 사알짝 다녀왔다 함은 그 집과 한편이 되어 나머지 두 집에게 한번 붙어보자는 전의를 알리는 셈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Acme는 늘 그리고 당연히 네 집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장보는 것으로.
한두 달에 한 번씩 Fort Lee의 한인 슈퍼마켓으로 장을 보러 갔다. 뉴욕에서 제일 큰 한인타운이 Queens라면 뉴저지에서 한국인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곳이 Fort Lee였다. Rutherford소재의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FDU)는 전경환 씨의 아들이 유학 와서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고 뉴스에서 떠들던 곳이다. 한국의 대중매체가 그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몰려왔으며 그들이 본 것은 미국의 흔한 소도시 Rutherford와 그 소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고만고만한 수준의 집이었다. FDU가 경남대와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것도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또한 Fort Lee와 연결된 George Washington Bridge를 건너면 손쉽게 맨해튼으로 갈 수 있다. Fort Lee에 한인 관련 상점들이 많은 것은 이런 사실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양팔로 안으면 품에 가득한 튼실한 배추, 태국산 Fish Sauce, 존재만으로 감사한 고춧가루 등을 사 와서 어설프게나마 김치를 담갔다. 미국 마트에서 산 소고기를 대량 투하한 미역국과 내 서툰 김치 한 보시기는 밥 한 그릇과 더불어 순식간에 배를 그득히 채웠다. 잊을 만하면 슬며시 찾아와 가슴 구석구석을 켜켜이 채웠던 쓸쓸함이 사라지곤 했다. 유학이던 이민이던 다 같은 타향살이였던 우리가 위장만큼이나 자주 결핍을 느낀 것은 '고국의 무언가'였다.
Fort Lee의 한인 식품점은 음식의 재료만을 사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었다. 한인 식품점에서는 한국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를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하여 대여해주었다. 오로지 그 비디오테이프만을 빌리기 위해 한인 식품점을 찾는 사람도 많았다. 한국에서 드라마가 방영된 후 그것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가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와 같이 국적기가 운항하는 대도시로 공수되었다. 한인 식품점 계산대 뒤 선반에서 수대의, 또는 수십대의 재생기가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드라마 비디오테이프를 녹화하느라 늘 강행군중이었다. 군대처럼 열과 오를 맞춘 재생기 소대들은 쉭쉭 쇅쇅거리며 바삐 돌아가다가 커억 컥하며 한숨과 함께 녹화가 끝난 테이프를 토해내곤 했다. 한국에서 방영된 후 3-5일이 지나면 한인 식품점에서 빌려와서 볼 수 있었다.
우리 단지에서도 한 집이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오면 당연히 집집마다 돌려 보았다. 저녁 먹고 설거지를 한 후 아이들을 씻겨 재우고 나면 드라마 시청시간이었다. 빌려온 비디오테이프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한두 달에 한번 고국을 영접하는 의식이 시작된다. 재미있는 드라마는 애간장을 녹이는 엔딩 장면과 더불어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리기엔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 순서의 집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 본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잠옷 위에 대충 스웨터를 걸치고 슬리퍼를 끌며 밤늦게 마당을 황급히 가로질러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보고 싶은 드라마의 녹화본이 다 대여되고 없다는 것은 마른하늘에서 귓전으로 내리 꽂히는 천둥소리와 같았다. 지금 녹화 중인데 기다리시겠냐는 유혹에 이길 재간이 없었다. 입맛을 쩌억 쩍 다시며 녹화기를 두어 번 쳐다보다 결국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녹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기 일쑤였다. 인기 있는 드라마의 비디오테이프 녹화본이 나오는 날이면 식품점이 문 여는 시간 전에 이미 입구부터 북새통이었다.
그 당시 우리들에게 단연코 가장 인기 있었던 드라마는 '배반의 장미'였다. 식물인간 상태였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언제 의식을 찾을 것인가는 우리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스포일러가 존재했다. 그들의 수단은 한국의 가족이나 친구와의 '국제전화통화'였다. 드라마의 내용을 알고 나면 그들의 몸 구석구석에선 좀이 쑤시기 마련이고 그들의 위아래 입술은 촐레 촐레 들썩이기 마련이다. '배반의 장미' 남자 주인공이 드디어 의식을 찾았다는 스포일러는 밉기도 하고 동시에 고맙기도 했다. 그 회차의 비디오테이프가 나온 날이 기억난다. 우리 단지 대표로 이웃 엄마가 그 비디오테이프를 빌리기 위해 Fort Lee의 한인 식품점으로 날듯이 다녀왔다. 그날은 특히 단지 내 4가구 엄마들이 한데 모였다. 지지직거리며 드라마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손에는 땀이 삐질 배어 나왔다. 남자 주인공이 눈을 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느새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은 30여 년 시간이 입혀준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늘 고국의 무엇인가에 목이 말랐고 배가 고팠다.
서울서 뉴욕까지 중간 경유지에서 서너 시간 쉬었다가 갔던 때였고 고국과는 '국제전화통화'로 소통되던 때였고 어쩌다 한 번씩 바람결에 전해지는 모국의 소식에 온몸이 귀가 되던 시절이었다.
표지 사진 George Washiong Bridge in 1980s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