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Rutherford, New Jersey
한 움큼 정도는 된다고 여겼던 내 영어 부심은 미국 도착 첫날부터 금이 갔다. 미국 땅에서 내가 내뱉은 영어는 "Where can I find Kentucky Fried Chicken Restaurant?"이라는 문장이었다. 워싱턴 스퀘어에서 나에게 이 질문은 받은 학생은 ‘Kentucky Fried Chicken’ 부분을 반복하며 내 영어의 억양을 지적하고 '제대로된'native'의 발음을 통렬히 알려준 셈이다. 나름 자신 있었던 '듣기'도 문제였다. 현지인(native speakers)들의 말이 온전히 들리지 않았다. 언어란 먼저 귀로 들어야 그다음 입으로 말할 수 있는 법인데 TV를 틀어 보면 20~30프로 정도밖에 들리지 않았다. 당황했고 대책을 찾아야 했다.
유학선배나 일찍 이민 온 한인들로부터 TV 화면의 자막이 영어 '듣기'에 도움이 된다는 조언을 받았다. 캡션 기능을 갖춘 TV를 사기로 했다. 그 당시 가장 큰 전자제품점인 Circuit City로 갔다. 땅이 넓은 곳이라 식품점이든 전기전자제품점이든 일단 들어섰다 하면 축구장만 한 크기가 보통이었다.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길을 헤매기 마련인 광활한 매장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곳에 'SONY" "TOSHIBA"등 일본 제품이 진열되어있었다. '그 당시' 가장 믿을만한 양질의 수입 전자제품은 'Made in Japan'이었다. 도요타나 혼다가 미국의 포드나 크라이슬러를 제치고 거리에서 뛰뛰빵빵 하며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하긴 맨해튼 노른자위 땅들을 부르는 값이 얼마든 서슴없이 사들이는 사람들이 일본 사람이었고 소더비나 크리스티의 경매에서 최고가에 일본인들이 손을 들었다. 5번가에 즐비한 명품 브랜드에서는 커다란 돈 보따리를 든 일본인 손님들을 위해 일본어에 유창한 직원을 갖추고 있었던 때였다.
동네에서 가까운 Circuit City매장에서는 캡션 기능을 갖춘 TV를 찾을 수 없었다. 메이저 제품들 중에는 캡션 기능을 갖춘 모델이 없고 생산을 중단한 Zenith사 제품에 유일하게 그 기능이 있다는 정보를 직원으로부터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미군부대 뒷문으로 흘러나온 그 TV가 최고 좋은 제품으로 각광받던 때가 있었다. Zenith TV를 사기 위해 차를 타고 인근의 전자제품점들을 찾아다녔다. 이미 단종되었으나 어딘가에 두어 대는 남아있을 거라는 직원들의 말이 희망고문이 되어 뉴저지와 뉴욕의 왠 간한 크고 작은 전자제품점들은 다 흩었다.
찾을 래야 찾을 수가 없는 그 TV사기를 포기하려던 차에 들른 어떤 매장의 직원 한분이 다른 주에 혹시 그 제품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며 손길을 내밀었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대도시에는 이민자들이 많아 자막 기능을 갖춘 TV의 수요 또한 많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이민자들이 적은 Colorado나 Minnesota와 같은 중부 쪽 소도시에는 구태여 단종된 낡은 모델을 구매하는 이들이 드물기에 너희가 찾는 TV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라는 것이 직원의 합리적 추론이었다. 그가 옳았다. 부지런히 전화를 돌렸다. Nebraska인가 Iowa인가 그 어드메 Circuit City매장에서 캡션 기능을 갖춘 Zenith TV를 마침내 구할 수 있었다. 컴퓨터망을 이용해 몇 번의 클릭으로 재고 상황을 파악하고 문의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과연 TV의 자막이 영어 듣기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native의 입을 통해 물 흐르듯이 줄줄 흘러나오는 영어 발음과 어조는 내가 알던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처럼 여겨졌다. TV자막의 도움을 받으며 우선 드라마를 보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드라마가 갖는 보펹적인 구도가 도움이 되었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주인공들은 늘 멋지거나 능력이 있거나 선하기 마련이다.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드라마의 등뼈는 삼각 또는 사각 구도와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좋았서!' 드라마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뉴스 프로그램은 자막이 있어도 쉽지 않았다. 그들의 사회적 맥락과 정치 배경이 나에겐 낯설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코미디 프로그램 또한 자막이 있어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의 유머 코드가 이해되지 않아 웃음이 빵빵 터지는 포인트에도 나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이었다.
채널을 돌려가며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맛보던 우리 가족을 몽땅 TV 앞으로 한데 불러 모은 프로그램이 The Cosby Show였다.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중산층 아프리카계 미국인 코스비 가족의 훈훈한 에피소드들이 느릿하고도 여유 있게 흘러가는 시트콤이었다. 우리가 공부하며, 일하며, 살고 있는 뉴욕 맨해튼과 뉴저지 러더포드와는 멀지 않은 동네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시종일관 경쾌하고 따뜻한 일상은 ‘남’들의 이야기,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옆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이 시트콤이 시즌 8로 종영되고 난 뒤 아이들은 'The Simpsons'을 시청했고 우리 부부는 'Wonder Years'를 즐겨보았다. 그사이 우리는 미국 생활에 안착했고 아이들은 쑥쑥 자랐고 온 가족이 TV 앞에 한데 모여 호호 깔깔하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다. 물론 동시에 영어 듣기에도 큰 무리가 없게 되었다. TV의 자막 기능도 점차 필요 없게 되었다.
후일담
몇 년 후 시각장애인을 위한 법이 제정되어 미국에서 생산되고 판매되는 모든 TV에는 자막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Zenith Electronics는 그 뒤 파산했고 우리의 LG사에 인수되어 연구개발기업으로 재편되었다. 또 세월이 흐르고 대한민국의 전기전자제품의 품질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며 'Samsung'과 'LG'와 같은 제품들이 전기전자제품점에서 일본 제품을 밀어내고 주요 자리에 진열되었다. 일본은 국가 전체가 장기 불황속으로 들어갔고 맨해튼의 건물들과 상점들에서 일본인들은 속속 방을 뺐고 태평양 너머까지 뻗쳤던 그들의 긴 손을 거두어들였다.
'더 코스비 쇼'가 첫선을 보였을 때 드라마의 주인공인 남편은 의사, 아내는 변호사라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런 '근사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흑인이라니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라는 아우성이었다. 1960년대에 불붙은 미국의 민권운동은 여전히 뜨뜻미지근한 체였고 진전은 참으로 더디었던 때였다. “언제까지 흑인들이 마약중독자나 죄수 역할을 연기해야 하냐? 흑인 아이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롤 모델을 보여줘야 한다 ‘고 반박했던 주인공 빌 크로스비는 한때 이 시트콤으로 국민아빠라고 불리며 폭발적인 성공을 누렸다. 세월이 꽤 흘렀고 빌 크로스비는 얼룩덜룩한 성폭행 혐의를 걸친 체 TV 화면에 등장했고 재판을 거쳐 지금 감방생활 중이다.
이렇게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할 만큼 세상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바뀌지 않거나 진전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얼마 전 인어공주역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 할리 베일리가 낙점되었다. 이에 일각에선 인어공주가 흑인일 리가 없다는 인종차별 발언의 소리가 드높다. 미국 교도소에서 감방생활을 하는 인종 중에서 ‘흑인’들과 ‘히스패닉’의 숫자는 놀라운 정도로 높다. 트럼프는 멕시코를 포함한 강경한 이민 차별을 확대하여 세계적 논란을 낳고 있다. 이것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표지 사진 The Cosby Show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