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versity Village Apartments

at Los Angeles, California

by 클라우디아





뉴욕은 아주 덥거나 대단히 추워서 야외에서 일 년 중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기간이 짧았다. 뉴욕과 뉴저지에 살 때 주로 해 먹었던 한식은 사골곰탕이나 김치찌개처럼 푹푹 끓이고 오래 고운 탕이나 찌개였다. 나물과 흔하고 값이 쌌던 고기를 듬뿍 넣고 빈대떡이나 만두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먹고 나머진 소분해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내내 지져 먹고 끓여 먹었다.





LA는 겨울에 열흘이나 길어야 2주 동안 비가 오는 것이 거의 일 년 치 강수량이다. 습도가 낮다 보니 한여름 온도계의 수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도 나무 그늘에만 들어가면 카디건을 걸쳐야 할 만큼 쾌적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LA에서는 주말이면 공원으로 몰려가서 고기를 구워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뉴욕과 뉴저지에서는 '그냥' 동네에 그곳 주민들과 같이 섞여 살다 보니 같은 유학생들이나, 재미교포 한인인 이웃, 모여서 같은 음식을 먹는 '한국인'의 밀도와 정도가 얕았다. 한국과 미국의 명절이나 중요한 날에 모이니 만나는 횟수는 띠엄띠엄이었고 모이는 숫자는 많아야 15~20명 정도였다. 어느 집이건 한자리에 모이는 게 가능했다. 마루나 방, 또는 소파에 촘촘히 앉고, 겹쳐 앉아서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LA에서는 대학교에서 만든, 기혼자인 학생과 그 가족을 위한 아파트에 살았다. 멋지고 깔끔하고 조용한 독신자 기숙사와는 달리, 2층짜리 건물들이 길고 넓게 줄줄이 늘어선 하나의 동네, 넓은 공간인데도 늘 어디선가 복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동네였다. 동네 주민은 대학원 박사과정생들과 그 가족이었기에, 미국에 온 목적, 가족 구성 등등 많은 것들이 동질적인 집단이 한 곳에 모여 살았다. 중국, 홍콩 그리고 대만을 포함한 Chinese 유학생들의 숫자가 제일 많았고 일본이나 인도에서 온 유학생들, 유럽 특히 동유럽 쪽에서 온 유학생들의 숫자가 그 뒤를 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한인 유학생들은, 다 모이면 1개 중대는 만들 수 있을 만큼이었고, 그 결속력은 다양한 '피부색'들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날씨와 구성원의 수가 이러하니 LA에서는 주말이면 넓은 공간에 나가 '다 같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을 준비하게 되고 그것이 LA갈비였다. 남자건 여자건 어른이던 아이던 죄다 반바지에 티셔츠차림이었다. 그 당시 인기와 알려진 정도가 정점을 찍고 있었던 'Gap'의 대표주자 격인 베이지색 핀턱 주름 반바지와 러닝셔츠인지 티셔츠인지 입은 사람도 보는 사람도 분간 못하는 '흰 티'를 입고 즐겨 먹은 것이 바로 LA갈비였다.






LA 갈비구이 [출처 : 구글 이미지]





공원 메뉴의 두 번째가 KFC의 핫윙이었다. 한국 KFC에서는 핫윙이 늦게 등판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물동이 만한 용기에 100개 정도의 핫윙을 사 오면 탄산수와도, 맥주와도 찰떡궁합이었다. 핫윙의 미국 현지 가격은 결코 비싸지 않았다. 본토에서의 가격과 한국에서의 가격, 그리고 무엇보다 맛의 간격이 현저한 것 중 하나가 KFC의 핫윙이다. 집에서 만든 LA 갈비, KFC 핫윙, 집에서 담은 김치, 이 '삼합'은 1개 중대의 입을 정확하고 빠르고 즐겁게 함락시켰고 일요일 하루가 훌러덩 지나갔다.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식구'가 되었다. 공원에서의 일요일은 동포끼리 모여 모국어를 맘껏 사용하니 향수병도 잠재울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 가장이 되고 두어 명 자식을 둔 부모가 되었어도, 여전히 학생들인 우리들이 짊어진 공통의 짐은 미래에 대한 초초와 불안이었다. 고국은 우리를 잊은 듯했고 곁방살이를 하고 있었는 타국과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었다. 유학생활이 6년이 지나고 7년, 8년이 되자 훌쩍거리며 시작된 향수병이 마흔을 목전에 두고도 여전히 '학생'인 우리들에게 비염처럼 자리 잡았다.






KFC hot wings [출처 : 구글 이미지]





사시사철 공원만 찾은 것은 아니다. 집에서도 모였다. 그때 우리 마을 유학생들은 크게 두 무리였다, 정치학, 사회학 등 사회과학 전공자들과 언어와 문화학 등 인문과학 전공자들. 이공계통의 유학생들은 실험실에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었고 그들은 대체로 4-5년 만에 학위를 마치고 떠났기에 우리 쪽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우리 쪽'은 유학생활 8년 9년 차가 대부분이었다. '대체로' 사회과학 전공자들과 그 가족들이 우리 집에 모였고, 다른 한집에는 주로 인문과학 전공자들이 모였다. '대체로' 사회과학자들은 모이면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짠!'이었다. 인문 과학자들은 '대체로' 말씨도 차근차근하고 술은 '반주하는 정도'였고, '가정적'인 분위기였다. 아이들을 챙겨 며칠씩 근거리로 여행이나 캠핑을 가는 쪽도 거의 인문과학계통이었다. 사회과학계통들이 모이는 우리 집에선 주로 김치, 만두, 파전 등을 만들었고 인문 과학도들이 모이는 저쪽에선 밥과 국 그리고 아이들 먹을거리를 준비했다. 그 외에 음식을 한두 가지 만들어 오는 가족이 많았기에 먹는 것만큼은 항상 충분하고 넘쳤다.





인문과학계통이 모였던 집의 안주인이 내가 LA에 만난 두 번째 천사이다. 잠시 천사처럼 보이거나, 속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만 천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LA 천사는 5년 동안 아침저녁 혹은 낮으로, 'full'로, 보았고 귀국해서도 보았다, 그녀는 천사다. 사회과학 쪽과 인문과학 쪽이 홍해가 갈라지듯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섞여 모일 때도 자주 있었다. 아무리 겹쳐 앉고 포개 앉는다 해도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수가 한정되어 있으니 '짠!' 하는 어른들은 주로 우리 집에 모였고 아이들은 죄다 이 '천사'의 집에 모일 때가 많았다. '짠!'들이 '천사의 집'에 모이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도 다행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천사는 모름지기 따뜻해야 한다, 특히 아이들에게. 사납지 않고 친절해야 하며 시종일관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곤란하고 고단할 때, 특히 길을 잃었을 때, 무기력할 때 우리는 천사를 찾는다. 언제 우리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부여잡고 간절히 신과 성인과 그리고 천사를 찾는지를 생각해보면 천사는 어떠한 존재인지 명료하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천사의 모습과 가장 닮은 그녀의 선행과 부드러움은 우리 동네 사람들 누구나 알고 인정했다. 그녀는 알고 보니 내 대학교 1년 선배였다. 신윤복의 미인도와 아주 흡사한 고전적인 미인인 그녀는 LA 중심가에서 열리는 다 인종 퍼레이드에서 줄곧 왕비 역할을 맡았다. 일상에서의 그녀를 잘 알기에 색이 고운 왕비복을 입고 수줍게 미소 짓는 그녀가 하도 어여쁘고 자랑스러워서 퍼레이드가 끝나도 내내 기분이 좋았다.







표지 사진 UCLA University Village Apartments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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