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 사람은

by 클라우디아


정릉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에는 다양한 상가들이 가득 들어찬 대형 복합상가건물이 있었다. 집에서 나와 몇 걸음 걸어가 그 건물 지하 1,2 층에 있는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았다. 생수 등 무거운 것을 사게 되면 몇 만 원 이상 구매조건의 무료 배달 서비스를 이용했다.



북한산 아래 동네로 이사와 우선 한 일이 마트 찾기였다. 소소한 찬거리는 정릉천을 따라 걸어 내려가 정릉시장에서 구매한 후 내 어깨와 팔로 운반했다. 무거운 생수나 세제 등은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구매했으나 대형마트와 비교하면 가격 면에서 꽤 아쉬웠다. 새로 사귄 이웃에게 정보를 얻어 버스를 20여분 타고 찾아간 대형마트는 구매금액에 상관없이 내가 사는 동네로는 배달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사하는 날 안방 창문 쪽에서 말벌집 세 개를 발견하고 몹시 놀란 후 119 대원의 힘을 빌려 처리했다. 이사 온 지 3일 만에 새로 도배한 거실 천장 구석에서, 그 며칠 사이 만들어진 꽤 정교한 거미줄을 보고 이제 내 삶의 생태계가 바뀌었음을 받아들였다. 시장보기라는 환경 또한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고 정릉시장에서 장보기와 온라인 구매에 만족하기로 맘을 먹었다.



옆 동네 사는 친구와 술 한 잔 하고 오겠다며 어느 저녁 무렵 외출한 아들에게 급히 카톡이 왔다. 그 친구 동네에 대형 L 마트가 있어 장보기에 애먹는 엄마 생각이 나서 들어가 물어보았더니 우리 동네로 배달 서비스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아들이 일러준 마트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출처 : 구글 이미지]


그 날 이후 2~3주에 한 번은 반드시, 꼭, 다녀오는 L마트와 거길 가기 위해 이용하는 우이 경전철은 내 애정의 대상이다. 차량이 두 칸뿐이고 마주 보고 앉은 좌석 간 거리도 좁아 친인척이나 동호회원들끼리 나들이 가는 버스 분위기 같아 더욱더 그러하다. 몇 가구 안 되는 마을에서 이웃집 야참이 뭐였는지가 첫새벽에 벌써 마을 전체에 다 알려지듯, 전철 안에서 누가 통화라든가 대화를 할라치면 마치 나와의 그것인 듯하여 내가 ‘응’하고 대답이라도 해야 할 듯하다.



저기 저 아래 성균관대부터 한성대, 성신여대, 국민대, 서경대, 덕성여대 등 대학들이 굴비두름 엮듯이 포진해 있는 동네들이고 이 경전철의 종점은 북한산 우이 역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우이 경전철의 승객은 주말에는 등산객, 대학생, 주민으로 골고루 삼등분되고 평일에는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이나, 짬짜면처럼 주민과 대학생들이 반반이다.


마트에 장 보러 가던 어느 날 우이 경전철 안, 8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두 할머니께서 시종일관 얼마 전 작고한 모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러저러한 사생활 관련 이야기가 방송 등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어느 배우의 별세 소식이었다. 고인의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러니까 그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고, 에고'란 두 할머니의 애통의 추임새가 매우 신기했다.



고인이 지병 치료차 내려가 쉬려 했으나 결국 가지도 않았던 제주도 모처의 주소와 그곳의 정확한 평수. 고인이 평소 앓았던 병의 원인부터 치료 상황, 임종 시 누가 지켜보았는지, 심지어 빈소를 차린 지 얼마 안 되는 그 시점까지의 조문객 업데이트 뉴스까지, 두 할머니께서 주고받는 고인의 신상에 대한 정보량은 압도적이었고 세부적이었다.



평일 오전이라 대학생이 대부분인 전철 안 승객들은 애절함을 가득 담은 두 분 할머니의 목소리에 숨을 죽였다. 워낙 두 어르신의 목소리가 커서 우리 모두는 관심을 다른 곳에 둘래야 둘 방법도 없었지만.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현빈이 여주인공을 가리키며 ‘나에게 이 사람은 김태희고 전도연입니다.’ 말할 때, 내 온몸의 세포들이 기뻐 날뛰었었다. 드라마 주인공은 결코 나를 가리켜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마트에 생수와 콩나물을 사러 가거나, 점심으로 콩나물국밥을 끓일까 콩나물국을 끓일까라는 것이 고민이며, 새우젓갈이 남아있던가 저번에 김치 담그며 다 썼던가라고 구시렁거리며 전철에 앉아서도 냉장고 속을 헤매는 아낙네이니, 나는.


[출처 : 구글 이미지]



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는 하염없이 길고 긴 두 다리를 우아하게 포개고 캐나다의 한 도시의 공원 의자에 앉아 여주인공을 아련한 눈길로 바라본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 굴러 떨어졌다...... 첫사랑이었다.’라고 그가 읊조린다. 적금이던 쌈짓돈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비자금을 끌어 모아 저 단풍국으로 가리라. 드라마 여주인공이 폴짝폴짝 뛰었던 단풍국의 그 길을 나도 반드시 뛰어 보리라 맘먹었었다. 물론 내 첫사랑은 따로 있다. 배가 조금 나온, 턱수염을 밀어낸 퍼런 자국을 볼 때마다 수학 문제를 더 열심히 풀게 만들었던 중학교 1학년 때 수학선생님.



[출처 : 구글 이미지]

우이 경전철 안 두 할머니에게 있어 고인은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의 현빈이요 공유였다. 두 할머니와 같은 종류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얽힌 같은 종류의 비밀 두어 개를 가슴에 품은 우리는 할머니들의 '시끄러운 애통'을 조용히 경청하는 것으로 고인에 대한 할머니팬들의 마음을 같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