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월 4일. 나리타, 도쿄타워
실패가 분명한 글을 쓰고자 노트북 앞에 앉는다.
기승전결이 뚜렷하며 틈새조차 섬세하여 '완벽한' 여행이었슴에도 이 이야기의 밑바닥엔 슬픔이 찰랑거린다. 단 한 명에게라도 이 감정의 정체를 온전히 납득시킬 재주가 나에겐 없다. 이 정서를 '슬픔'이라고 정의할 확신도 나에겐 없다. 도쿄여행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나를 아래로 끌어내렸던 무거움을 표현할 다른 어휘를 나는 찾지 못했다. 아들과 내가 함께한 5박 6일의 도쿄여행, 이 이야기가 실패로 끝날 것임을 나는 예감한다. 3주씩이나 노트북 언저리에서 서성이다 도망가고, 책상 근처까지 슬금슬금 다가왔다 후다닥 달아난 이유가 바로 이러하다.
2018년 3월과 9월에 도쿄를 다녀왔으니 4년 만이다. 내가 도쿄를 좋아하는 것을 잘 아는 큰아들은 코로나상황이 안정되고 해외여행규제가 풀리자마자 자기와 둘이서 도쿄에 가자고 말했다. 여행경비를 포함한 모든 준비는 자신이 다할 터이니 엄마는 날짜만 정하시라고 줄기차게 졸랐다. 자식을 낳아 키우고 뒷바라지하는 시기의 끝자락인 나는 자식으로부터 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올해 6월, 남편의 정년식을 치렀음에도, 자식에게 더 해줄 것이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자식 보살피기'에서 나는 아직 은퇴하지 못했다. 관성을 어찌하지 못하여 자식을 향해 뻗어있는 두 손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내 속마음이 이러하다 보니 여행비용과 계획을 전부 다 알아서 하겠다는 큰아들의 마음이 도쿄 여행을 주저하게 만든 첫 번째 장애였다.
아들이 도쿄로 여행을 가자고 처음으로 말을 꺼낸 후 나는 '싫어 싫어, 안 가'라고 튕기며 두어 달을 밀고 당겼다. 아들과 나의 진심이 듬뿍 담긴 온갖 협박과 농담을 주고받은 후 가까스로 12월 4일 출발, 5박 6일의 도쿄 여행을 정할 수 있었다. 도쿄 내에서 시모키타자와, 키치조지, 후타코타마가와, 이 세 곳을 가고 싶다는 것과 온전히 도쿄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내가 여행계획에 관여한 전부였다. 비행기표와 숙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아들이 계획하고 준비했다. 서랍을 뒤져 4년 전 도쿄여행에서 쓰고 잔액이 꽤 남은 Suica 카드를 찾은 것이 내가 한 수고의 전부였다.
카카오택시를 불러서 타고 새벽 5시 조금 넘어 DMC역에 도착해 아들을 만났다. 엔화를 넣어 제법 도톰한 용돈 봉투를 내미는 아들과 나는, '받으시라, 안 받는다 못 받는다'라고 '언성 높이기', '돈봉투를 주머니에 찔러주면 황급히 꺼내어 되돌려주기', 기둥뒤로 숨바꼭질하기 등등으로 승강장에서 거하게 한판 뜬 후 공항 철도에 간신히 올라탔다. 깜짝 놀랐다. 인천공항행 철도는 여행객들로 미어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새벽에.
불길한 예감 속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와이파이 도시락을 찾으러 달려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대기자가 108명이었다. 대기표를 꼭 쥐고 먼저 탑승수속을 한 후 되돌아가서 기다린 후 간신히 와이파이 도시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첩첩산중이었다. 카운터에서 체크인, 수하물 보내기, 보안 검색, 출국심사등 모든 과정마다 인산인해였다. 아들의 성격이 워낙 느긋했고 평소와는 달리 내가 처절히 '낮은 자세'로 임했기에 망정이지 '우리 비행기 못 탈 거야, 이러다 정말 못 탈 거야'라며 입으로 온갖 오두방정을 떨다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탈진할 뻔했다.
기내 특유의 그 새초롬한 냉기, 가슴 한쪽을 스리슬쩍 건드리는 이륙 시의 간질거림을 4년 만에 감격으로 영접했다. 내용물을 뻔히 아는 기내 면세품잡지조차 춘향엄마가 이몽룡 보듯이 반가웠다. 도쿄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후 미리 준비한 VJW(Visit Japan Web) 덕분에 쏜살같이 출국수속을 마친 후 공항 안의 편의점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Suica도 충전해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둘에겐 공통의 강렬한 욕망이 있었다, 타마고 샌드위치와 밀크티라는. 이 둘을 맛있게 먹기 위해 첫새벽부터 그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즐겁게 견뎠다. 샌드위치를 휘감은 혀가 구름 속에서 춤을 췄고, 밀크티를 넘기는 식도는 노래를 불렀다.
메모해 두지 않았더라면 결코 외우지 못했을 '게이세이나리타 스카이 액세스'라는 긴 이름의 전철을 타고 도쿄 시내로 입성했다. 전철 안에서부터 '일본감성'이 터졌다. 내 옆에 젊은 엄마와 초등학생인듯한 두 아들이 앉았다. 내가 내릴 때까지 두 아들은 '종이'로 만든 만화책을 보았다. 손에 꼭 들어오는 작은 '망가'책을 조용히 보는 초등학생, 존재는 분명 하나 내 숨소리만큼이나 거슬리지 않는 전철 안 누군가의 대화 데시벨은 일본 감성의 표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목청껏 떠들지 않으나 묻히지 않고 오히려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을 일본여행 중 나는 자주 보았다.
아들이 예약한 호텔은 도쿄타워 바로 옆이었다. 한때는 오다기리 조에 흠뻑 빠져 도통 나오지 못하고 발버둥 쳤던 때가 있었지만 내가 주저 없이 키키 키린 주연이라고 부르는 영화 '도쿄타워'속의 바로 그 도쿄타워 옆이었다. 서울집에서부터 시작하여 도쿄 시내로 들어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계속 부풀러 올랐던 4년 만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에 무거운 추가 철컥 달렸다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