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했다고요? (2024.08.10.토) *
- 이전했다고요?
이야기를 좋아하고 주말연속극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영화관에 자주 가는 편이다. 유명하다는 영화가 왜 유명한지 가능하면 직접 확인하려고 하는데,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 보기에 무난한 영화인지가 중요하다. 근래에는 비행기에 관련된 영화 2편을 연이어 보고 왔는데, 비행기 조종사가 나오는 두 영화 모두 비행기 사고 장면들이 나와서 비행기를 타고 순조롭게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와는 다르지만, 우리 가족이 특히 더 선호하는 장르는 연극인데, 배우의 살아있는 연기를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음악회보다도 자주 찾게 되는 장르다. 유명한 배우 특히 원로배우들의 공연이 많아진 근래에는 더 자주 연극을 찾아보고 관람하는 일이 많아졌다.
음악회나 영화나 연극이나 또 식당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순간은 예약, 예매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예매하고 그날을 기다리기까지의 그 기간이 정말 좋다. 특히 보통 몇 달 전, 적어도 몇 주 전에 일을 진행해야 하는 (성격 급한) 나로서는 공연을 보기 전까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는 두근거림’이 정말 좋다. 그 공연을 보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아니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은 힘과 자신과 위로를 얻는다고나 할까. 추석이나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까지의 그 설렘이나 기쁨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 행복한 그 시간!
- 아, 다음 주에 공연이 있어. 쫌만(며칠만) 참으면 돼! 조금만 더 힘내자!
A 연극을 예매할 때도 그랬다. 평상시에 그렇게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주로 영화나 TV에서 활동하던 여자 배우 B와 남자 배우 C가 갑자기 연극에 나온다는 것도 생소해서 예매하기를 주저했지만, 처음 접하는 A 연극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음악회, 연극은 예술의전당에서, 영화는 D에서 하는 것만 고르기 때문에 장소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 연극 A는 조금 다른 곳, LG아트센터에서 하는 연극이었다. 하지만, 근거리에 있는 곳이기에 별생각 없이 어떤 공연이 있는지 사이트를 찾아보기도 하고 회원가입도 하면서 앞으로는 이곳으로도 많이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한 달 전에 예매한 A 공연을 설레는 마음과 함께 하루하루를 손꼽아 기다리는 재미로, 더디게 지나가는 한 달을 보내고 드디어 공연을 보러 가기 하루 전, 공연을 알리는 메시지가 왔는데 끝에 붙어 있는 글을 보고,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 [LG아트센터 서울 관람안내 D-1]
LG아트센터 서울, 강서구 마곡중앙로 136
주차장이 협소하여 상시 만차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연 입장 방지를 위하여 만차 예상 시 ‘마곡 광장 주차장’으로 현장 안내해 드릴 수 있으며…. 지하철 9호선 및 공항철도 '마곡나루역' 3-4번 출구를 통하시면 공연장 로비와 바로 연결됩니다.
나는 깜. 짝. 놀랐다.
- 이게 무슨 말이지?? 강서구 마곡중앙로?? 마곡 광장 주차장??
내가 알고 있는 LG아트센터는 역삼동에 있는 것이었는데, 강서구 마곡동이라는 말에 너무 당황해서 시험감독을 들어가야 하는 마음을 애써 다잡고 재빨리 사이트를 찾아보았더니, 역시 강서구 마곡동이었다. 놀란 채 시험감독을 들어갔다가 나와서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 LG아트센터 서울인가요??
- 네!
- 그곳이 무슨 동에 있나요??
- 강서구 마곡동입니다.
- 네?? 그럼, 역삼동에도 있는 건가요?
- 아! 2022년 3월에 마곡동으로 이전했습니다.
- 네?? 이전했다고요?
역삼동에 있는 LG아트센터로 알고 예매한 연극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2022년 3월에 강서구 마곡동으로 이전했다는 LG아트센터로 토요일 3시까지 대중교통으로 갈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아서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A 연극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오후 3시 전이었기에 수수료를 내고서라도 취소할 수 있었지, 오후 6시 이후에는 아예 환불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A 연극도 기대가 되었지만, 몇 년 만에 가보는 LG아트센터이기에 얼마나 들뜬 마음으로 한 달을 보냈던지! 예술의전당이 아닌 장소이기에 가족들을 겨우 설득해서 가기로 한 것이건만, 장소를 잘못 알았다는 나의 이야기에 모두 다 실소하며 어이없어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한다. 월요일 아침에는 토요일을 기다리고, 3월에는 여름방학을, 8월에는 겨울방학을,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 때를, 대학교를 졸업해서는 안정된 직장과 결혼과 아이를, 50대가 넘어서는 안정된 노후를, 그리고 평안한 죽음을 기다리며 한평생을 살아간다. 월세와 전세를 거쳐 자기 집에 살면서 건물주를 꿈꾸기도 하고, 경차를 몰면서 외제차를 모는 자기의 모습을 꿈꾸는 것을 보면, 기다림은, 꿈꾼다는 말과 같은 말일까. ‘인생은 꿈꾸는 것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기다림이 있기에, 꿈꾸는 것이 있기에, 내 인생을 힘이 있게 하고 생동감 넘치게 하고 역사가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거겠지.
1월의 신입생 연수를 기다리며 작년 11월과 12월을 보냈고, 4월의 수련회를 기다리며 2월과 3월을 보냈고, 5월, 6월과 7월의 온갖 행사를 위해서 1학기 내내 보냈던 나, E와의 식사를 기다리며 일주일을 보내고, 중간중간의 음악회와 영화와 발레와 연극과 책 읽기를 기다리며 힘겹게 버겁게 매일 매일을 보냈던 나, 퇴근을 기다리며 출근했던 나, 아무 말도 없이 오롯이 혼자 앉아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만을 기다렸던 나. 그리고 글쓰기는 시간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던 나.
그리고 무엇보다 그토록 기다리고 꿈꾸던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꿈꾸고 있는 걸까. 무엇을 기다리고 꿈꿔야 하는 걸까. 기다리는 것이 있는 걸까. 꿈꾸는 것이 있는 걸까. 뭐라도 있어야 힘을 낼 수 있을 텐데…. 지금의 내 마음은, 2학기가 빨리 흘러가기를, 2024년이 빨리 지나가기를, 2025년이 속히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모습이다.
아니 일단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연극은 놓쳤지만, 인도 이야기를 담은 발레가 어떨지를 기다리며 8월과 9월을 꿈꾸듯 보내면, 어떻게든 견딜 수 있겠지. 그리고 2학기가 좀 더 빨리 지나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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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바이 초콜릿이 유명하다는 기사에 여기저기 업체를 뒤져서 두바이 초콜릿을 주문해 보았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두바이 초콜릿을 흉내 낸 아류 초콜릿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아류라고 하더라도 워낙 주문이 밀려서 한 달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신나게 주문했다. 하지만 한 달이 넘어가니 들뜬 마음도 사라지고 주문한 것 자체를 까먹고 있었다. 업체에서 이렇게 연락을 주기 전까지는.
- 기다려 주셨던 두바이 초콜릿이 출고되십니다!
정말 이렇게 보내왔다. ‘출고되십니다’. 딱 한 조각 먹을 만큼의 양이었건만 우리 가족은 설레는 마음으로 둘러앉았다. 이렇게 말하면서.
- 와! 한 달을 기다렸던 두바이 초콜릿이야! 어떤 맛일까?
단 한 번의 짧은 달콤함을 위해서 길고도 긴, 쓰디쓴 시간을 보냈지만,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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