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기억했어야지!!! *

by clavecin

* 나를 기억했어야지!!! (2026.02.14.(토)) *


- 나를 기억했어야지!!!


요즘은 비연예인이면서도 개인 방송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시대이기도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여 얼굴을 알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연예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기획사의 문을 두드리기도 하지만, 비단 아이돌 스타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스타가 된 사람도 많다. 근래의 이런 개인적인 방송 활동보다 방송계에서 주도하여 일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활발했던 적도 있었다.

우리 학교만 하더라도 꽤 유명한 프로그램들에 참여했었는데, 학생들이 참여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장학 퀴즈가 그것이다. 또 월드컵 직후 YB 밴드가 우리 학교에 와서 광고를 찍었던 적도 있었다. 아마도 핸드폰 광고였을 텐데, 가죽 잠바를 입은 YB는 오토바이를 타고 계속 운동장을 돌았고 우리는 그 주변에 서서 오토바이가 회전하면서 내는 흙먼지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함성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오토바이 방향을 자유롭게 바꾸며 가다 서기를 반복하면서 학생들을 향해 가끔 손을 흔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또 프로그램 제작진이 일선 학교를 방문해서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과 끼를 끌어내는 프로그램들이 많았었는데, 그중 하나인 <도전 골든벨>을 아주 오래전 우리 학교에서도 촬영했었다. 2000년부터 2020년까지 20년 동안 방영된 장수 프로그램으로, 고등학생들의 온갖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우리 가족이 정말 좋아했다. 50문항의 퀴즈를 맞히면 골든벨을 울릴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우리 학교는 50번까지 가지 못해서 골든벨을 울리지 못했다. 학교 강당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촬영했던 그 프로그램을 생생히 기억한다.

방송 시간은 1시간 정도지만, 하루 내내 촬영해서 진이 다 빠졌었다. 우리가 보는 정갈한 프로그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적나라하게 보게 되어서 큰 충격을 받았던 시간이었다. 촬영이 시작되면 친절하고 재미있게 이끌어가는 진행자 A가 촬영을 멈추게 되면 굉장히 신경질적이 된다는 것을 보게 되어서 깜짝 놀랐다. A뿐만 아니라 제작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이럴 때 손뼉을 쳐라, 소리를 질러라, 왜 이렇게 하느냐 등등, 아이들에게 온갖 감정을 쏟아냈기에 아이들이 점점 힘들어했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것은 진행자 2명이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는지 모른다. 아마 제작진이 60~70명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방송계가 얼마나 ‘험악한’ 곳인지 알게 되었고,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이토록 많은 사람이 공을 들여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어, 그 이후로는 방송 프로그램 하나를 곧이곧대로 보지 않게 되었다.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을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정말 좋아하는 문화 장르 중에 ‘연극’이 있다. 영화를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기에 자주 찾아보는 장르다. 며칠 전 올해 87세인 B 배우와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은 C 배우가 주연한 연극 <더 드레서(The Dresser)>를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영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작가 ‘로널드 하우드’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인데, 작가가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에서 5년간 드레서 즉 의상담당자로 일하며 겪은 경험을 모티브로 창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더 드레서>는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의 주연 배우인 ‘선생님’이 227번째 <리어왕> 공연을 앞두고 벌어지는 무대와 분장실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무엇보다 연기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제는 대사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선생님 옆에서 무대 의상을 입혀주고 의사 역할을 하며, 먹는 것을 챙겨주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욕설을 받아내는 것까지, 하나하나 친절하게 도와주며 선생님을 살아가게 하는 드레서 노먼의 성격이 놀랍다. 이 세상에 현존할 것 같지 않은 헌신적인 비서다. 하지만, 227번째 연극을 마친 선생님이 죽음을 맞이하자, 노먼은 미친 듯이 울부짖는다.


- 왜 내 이름은 없는 거야! 나를 기억했어야지!!!


한 페이지쯤 쓰다 만 선생님의 자서전, 그 맨 앞 감사의 글에 적힌 이름들 가운데, 노먼의 이름은 없었다. 평생을 헌신했건만, 선생님은 노먼의 존재를 기록해 놓지 않았다. 노먼이 없었다면 무대 위에서 연기만 할 줄 알았던 선생님의 삶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정도로 자신을 위해 몸 바쳤던 노먼에 대해서,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독특했던 것은, 선생님이 <리어왕> 공연을 할 때의 본 무대와 백스테이지 즉, 무대 뒷부분이 바뀌어져서 연출이 되었는데, 무대 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음향효과를 내고 리어왕의 연기를 살려주는 스태프들의 모습이다. 관객들에게 환호받고 박수받는 것은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노먼이나 연극 스태프들처럼 수많은 무명인(無名人)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80대 후반 노배우의 명연기를 보러 갔다가, 극 중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노배우 역할을 통해 ‘늙음’과 ‘죽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고, 이름이 적히지 않은, 누군가에게 기억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수많은 사람, 우리들의 인생을 생각해 본다.

우리 대부분은 ‘선생님’과 같이 주인공의 삶을 꿈꾸고 실제로 주인공이기도 한, 화려한 조명과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속에 황홀하기도 한 삶의 순간을 맞이할 때도 있겠지만, 우리의 인생 대부분의 시간은 어쩌면 노먼과 같이 온몸과 온 마음을 바쳐 헌신하고도 결국은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잉크 자국 하나, 글 한 줄 남기지도 못하고, 그 누구에게 기억조차 되지 못하고 아련하게 끝나게 될 수도 있겠다.

선생님처럼 살아야 할까. 노먼처럼 살아야 할까. 기록되는 것을 위해 달려야 할까. 기억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까. 기록되지 않을 수도, 기억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몸 던져 도울 수 있을까. 주인공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손이 될 수 있을까.

주인공이 되기 위해 몸부림칠 필요도 없고, 기록되기 위해 또는 기억되기 위해 달릴 필요도 없다. 주인공이 되고 기록되고 기억이 된다고 성공이 아니니까. 계산 없이 돕는 손을 내밀던 노먼 같은 사람을 만났던 선생님의 허술한 삶이 부럽고, 부족한 게 많아서 돕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선생님과 같은 사람을 만난 노먼의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이 부럽다. 이런 만남의 역사가 있으면, 그게 성공이지 않을까.

노먼은 기록되지 않아서 선생님이 기억하지 못했다고 절규했지만, 선생님에게 노먼은 물, 공기 같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늘 함께했던 존재이지 않았을까. 굳이 기록하고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그냥 선생님의 삶과 함께였으니까. 이런 만남이 참 부럽다.

주인공이 아니라고, 무대 뒤에 있는 것 같다고,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고 힘을 쏟았지만, 기록되지 않고 기억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잊혀졌다고 하더라도 속상해하지 말자. 선생님과 노먼이 연극을 완성하듯 서로의 삶도 완성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새, 서로의 인생이 완성되어 가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도, 노먼과 같은 사람과의 만남이 한 번쯤은 우리에게도 허락되기를.


*** 연극 <더 드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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