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의 눈이 되었구나. (2026.02.21.(토)) *
- 이곳에 와서 범의 눈이 되었구나.
명절에 본 영화 A가 관객 500만을 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제목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아서 주목하지 않았었는데, 가족이 함께 볼만한 좋은 영화였다. 이 영화는 계유정난으로 인한 단종의 유배와 그를 지키고자 했던 촌장과의 이야기에 상상을 더해 만든 작품으로, 결말은 슬프지만, 전체적으로 밝고 따뜻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단종 즉 이홍위는 영화 초반에 이렇게 말한다.
- 나는 한 번도 나로 살아본 적이 없다. 왕이 되어라 해서 왕이 되었고, 물러나라 해서 물러났으며, 이제는 죽으라 하니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정녕 나의 뜻이었던 적이 있었더냐.
밥도 먹지 않고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힘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이홍위가 마을 사람들과 북적거리는 교류를 통해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면서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 그 역할을 했던 것이 촌장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이다. 엄흥도는 이렇게 말한다.
- 전하, 저희는 나라의 대업 같은 건 모릅니다. 그저 사람 하나 살리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귀하다 믿을 뿐입니다.
유배지의 이홍위가 어떻게 지내는지 살피러 왔던 한명회는 놀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 노산군의 눈이 달라졌다. 힘없고 병약했던 눈이, 이곳에 와서 범의 눈이 되었구나.
물론 단종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나지만, 한 인간의 삶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엄흥도를 만났던 단종이 잠깐이나마 유약함을 벗어던지고 ‘범’이 되었던 것을 상상으로나마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언젠가 연수 내용 중 요즘 아이 중 <수업에서 멀어지는 아이들 유형>에 대하여 설명한 부분이 있었다. 이런 내용이다.
* 유능하지만 자신에게 실망한 아이들 - 잘하지만, 경쟁에서 낙오했다고 느낌
* 지금 공부가 문제가 아닌 아이들 - 가정 등 중대한 인생 문제 때문
*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아이들 - 느린 학습자
* 인지적 피로를 느끼는 아이들
* 싸가지 없는 아이들 - 도구주의(수능 깡패)
* 돈 벌어야 하는 아이들
* 가정폭력 피해 아이들
* 내부로 망명한 아이들
* 낄낄대는 아이들 - 조롱을 즐기는 친구들이 그나마 받아줌
돈을 벌어야 하거나 가정폭력 피해 아이들도 심심찮게 보이고, 싸가지 없거나 낄낄대는 아이들도 요즘 아이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특히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유능하지만 자신에게 실망한 아이들, 지금 공부가 문제가 아닌 아이들,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아이들이었다. 기본적으로 실력은 있지만, 더 잘하고 싶은 상위권에서 낙오된 듯하여 무력감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또 반대로 실력이 전혀 없어서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아이들도 아주 많다. 다른 아이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은 알아듣지를 못하니 수업 시간에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가장 속상한 아이는, 지금 공부가 문제가 아닌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공부를 해야 하는 나이인 것은 맞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정사가 얽혀있는 경우가 있다.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온갖 일들 때문에 지금 학교에 앉아 있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노심초사하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수업 시간에 또는 학교생활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잡아 줄 수 있을까. 교육이란,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아이들이 보이는 이런 양상에 교사로서도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아진다.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앞뒤 다 자르고 ‘공부해!’일 텐데, 아이의 정확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무조건 이렇게 말할 수도 없다. 요즘은 아이들의 상황을 명확하게 알기가 힘들어진 시대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질문했을 것이다.
- 무슨 힘든 일이 있는 거야?
지금은 조심스럽게 이렇게 묻는다.
-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 줄 수 있을까? 선생님이 알아도 괜찮은 수준까지만 말해도 돼.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럼, 이렇게 말하는 학생도 있다.
- (지금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졸업 앨범에 교사 사진이나 교사 이름이 빠진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 얼굴도, 이름도 빠진 졸업 앨범이라니, 사진과 이름을 보아도 ‘누구였더라?’하는데, 사진도 이름도 없는 졸업 앨범을 나중에 펼쳐보았을 때, 기억이 날 리 만무하다. 악용하는 사례가 많아져서라고 하니, 정말 힘든 시대가 된 것이 분명하다. 아이들과 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대가 끝난 것일까.
- 힘없고 병약했던 눈이, 이곳에 와서 범의 눈이 되었구나.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아 풀어져 있던 단종의 눈을 ‘범의 눈’으로 만들어 내었던 엄흥도처럼, 공부하러 학교에 왔지만, 집중하지 못하고 흐트러지는 아이들의 이런저런 상황을 잘 파악해서 작게나마 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그런 ‘범의 눈’을 지니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또 졸업 앨범에 행여 사진이나 이름이 없더라도 아이들이 뚜렷하고 확고하게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아, 머지않아 새 학기가 펼쳐지는구나.
*** 연수 중 자료.
우리가 그러했듯이 청소년기 아이들의 삶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우리는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온 걸까.
나에게도 엄흥도 같은 존재가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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