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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플러스 Jan 19. 2018

작품 리뷰 : 가해자의 죄책감, 피해자의 내면 극복기

애니, 목소리의 형태를 통해 바라보는 내면의 상처 극복, 타인을 용서하기

리플러스에서 추천드리는 작품의 내용과 핵심테마를 정리해보는 리뷰 포스트입니다. 볼만한 작품들을 영화, 애니, 게임 등을 제한하지않고 소개해드리며,추후에 작성된 포스트들을 보강하여 유튜브 영상으로 업로드하는 과정을 거칠 예정입니다. 




왕따 가해자가 누군가를 괴롭히고, 상처입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구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학창시절에 겪었던, 혹은 참여했던 가장 끔찍한  기억을 이야기하자면. 아마 따돌림, 왕따에 대한 기억이 있을겁니다. 약육강식의 세계. 학생이기에 선생님도 관여치않고, 암암리에 아무도 모르는 순간순간. 누군가에 대한 공격적인 언사와, 무시, 구타 등등. 수많은 방식의 폭력이 한 사람에게 가해집니다. 겉표면으로 볼 때 피해자를 괴롭히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걔가 이상하고,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들자신을 거슬리게 만들기 때문이죠. 하지만 정작 깊게 파고들어가보면, 수많은 아이들은 자신의 억눌린 스트레스나. 잘 풀리지않는 문제 등으로 감정적 희생자를 원하고있을 뿐. 피해자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는게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감정적 제물을 찾아낸것 뿐인거죠.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장애를 가진 여자아이. 쇼코를, 주변 아이들은 점차 장난감처럼 다루며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여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쇼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언어를 배우지 못해 발음이 뭉게지고, 항상 보청기를 끼고 다녀야합니다. 그나마도 좋지않은 그녀의 청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면서, 점차 귀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악화되고있죠. 그런 그녀는 학교에서 따돌림의 주된 대상입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이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무시받기 좋은 상태죠. 처음에는 아이들도 무조건적으로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습니다. 


필기도구로 그녀와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고. 그녀가 읽고있는 어눌한 발음을 그냥 웃어넘기며 이해해주려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녀와 대화하려면 수화를 배우지 않는 한 - 항상 필기도구를 지참해야합니다.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화시간도, 아이들에게는 지루하고, 괴로운 과정일 뿐이죠. 배려를 해야하는 사람. 친절하지않으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불편합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쇼코라는 아이는 점차 외톨이가 되어갑니다.



왕따로 인해 상처를 받은 쇼코는, 소극적이고 예민한 성격의 아이가 됩니다.



그녀가 낀 보청기를 빼서 가지고 놀다가 집어던지거나. 그녀의 필기장을 뺏어서 연못에 집어던지는 등. 점차 장난의 수위가 올라가고. 그걸 주도한 남자아이는 몇번이고 그녀를 집요하게 괴롭힙니다. 사실 그런 그의 괴롭힘은 상대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고. 그녀에게 관심을 얻기위한 어린아이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난이 지나친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서. 사실상 폭력의 수준이 되어가죠. 몇번이고 비싼 보청기를 잃어버리고. 귀에서 피가나기까지 하는등, 경제적, 신체적 피해를 여러번 입게되니. 쇼코의 어머니도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책회의가 소집되고, 왕따를 주도하던 아이인 "쇼야"는 처벌을 받게되는 자연스러운 수순을 겪게됩니다.

쇼야라는 소년은 그 과정에서 자신만이 왕따를 주동한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직 / 간접적으로 참여했다는걸 일러바칩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책임이 아님을 이야기하던 남자아이는. 아이들의 미움을 받게되어, 쇼코 대신의 왕따로 전락합니다. 아이들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왕따 주동자인 남자아이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물건을 빼앗고, 폭력을 휘두르죠. 쇼코의 경우가 그저 갖고놀 장난감이 필요했던 거라면. 쇼야에 대한 왕따는 "암묵적인 룰을 깨고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려 한 일에 대한 보복"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쇼야는스스로 깨닫게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자신도 왕따가 될 수 있다는 걸.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강한 역할은 내가 만든게 아니라 수많은 아이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이라는 사실을요.




왕따 주동자에서 왕따 피해자가 된 쇼야는, 타인을 거부하고, 소통을 단절한 외톨이가 됩니다

시간이지나. 왕따 주동자이자 피해자가 된 쇼야는 고등학생이 됩니다. 더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게 된거죠. 하지만 왕따 가해자의 죄책감과, 피해자로서의 두려움 때문에 폐쇄적인 성격이 되어버립니다. 타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도, 그들을 하나의 사람으로 인식하지도 않습니다. 모두를 거부하고, 모두를 소통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 작품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가해자인 쇼야와, 피해자인 쇼코가 만나게되는거죠. 





결코 유쾌하지못한 관계.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의 만남.



쇼야는 쇼코와 우연히 마주친 이후. 계속해서 쇼코를 만나려 시도합니다.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였죠. 외톨이로서 살아온 그가, 쇼코의 마음을 이해하게된 건. 어찌보면 필연적인 흐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쇼코가 가해자인 그를 만나주고, 그와 공감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죠. 쇼야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자신이 뉘우쳤다는 사실을 전하고싶어서. 선물도 사고, 미숙하지만 수화도 배워 그녀에게 사과를 전합니다. 하지만 쇼코의 입장에서 그녀를 괴롭혔던 왕따 주동자로서. 폭력을 휘둘렀던 사람으로서의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않습니다. 

죄책감과, 피해자로서의 경험을 해본 쇼야가, 쇼코에게 사과를 한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겁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쇼코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쇼야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상대에 대해서. 오히려 호감을 갖게됩니다. 어찌보면 이 작품이 가장 모호해지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일겁니다. 자신을 괴롭힌 이들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넘어섬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쇼야의 죄책감과, 아직 끝나지않은 괴롭힘에 대한 참회를 시작하게 만들어주거든요.


그녀는 가해자인 쇼야를 용서합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성인군자로 느껴지는건 어쩔 수 없군요.



죄책감에 대한 참호를 시작하는 쇼야. 그리고 그런 진심어린 감정표현들에, 쇼코는 자신의 외로웠던 맘을 주체하지 못하고 쇼야를 좋아하게됩니다. 그리고 이런 미묘한 감정적 지점에서. 이 작품은 미리 심어두었던 폭탄을 작동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귀가 더 악화되어. 점차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세상으로 몰고가기 시작한거죠. 그녀의 불안정한 감정들은 커져만 가고. 쇼야와 쇼코의 관계는 점차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과연 쇼야는 쇼코에게 제대로 참회하고, 스스로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게되는. 시작점에 설 수 있을까요?  과연 쇼코는 쇼야에게 진심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걸까요?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쇼야에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요? 이 글이 단순히 듣기좋은 영화소개에서 그친다면 이런 질문들로 마무리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여기에서 그치진 않을 것 같군요. 








이 작품은 보는 내내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그 한계지점에서 생긴 왕따라는 점에서부터. 사건에 합리성을 부여합니다. 누군가를 일방적인 피해자의 구도로 만들지 않습니다. 왕따 가해자가 피해자가되어버리는 역전극을 보여주고. 왕따가해자와 피해자의 이해를 넘어, 그들이 사랑의 감정을 갖게 만들거든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전락했던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돕거나, 정신적으로 구원하는 과정마저 보여줍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고. 실수는 만회할 수 있다고 말해야할까요? 단순히 그렇게 말하기엔 이 작품은 계속해서, 관계의 역전. 역할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상처를 주고,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하고. 억눌리고, 괴롭혀지던 사람은 타인을 용서하죠. 누군가를 좋아하던 아이는, 비틀린 마음으로 누군가를 계속해서 괴롭힙니다. 자식의 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던 부모님은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역으로 사죄를 받게되는 역할적 아이러니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쇼야라는 인물이 용서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그 괴로움을 폭발시키며 끝났다면 차라리 이 작품을 논하는 일은 없었을겁니다. 쇼코라는 인물도 그저 피해자로서 억눌린 채로. 그렇게 조용히 살아갔더라면 이 작품은 나오지 않았겠죠. 하지만 이 작품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부딛히고. 입체적으로 변화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리고 왕따 가해자에 대해서나, 장애인에 대해서나, 가해자외 피해자의 부모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을 하게 만들죠. 판에박힌 구도를 계속 깨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게 만듭니다. 피해자는 항상 분노해있지않고, 가해자는 용서를 구합니다. 어쩌면 이 작품속의 인물들의 모습은 다른의미에서 더 현실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까지나 변하지않는 낙인 같은건 없으니까요. 그들 스스로 과거를 넘어서서, 새로운 모습을 추구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많은 타인에게서 괴롭혀지는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극복하기도 쉽지않죠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는 현실이 아닙니다. 왕따 가해자는 쉽게 잊지 않고. 쉽게 용서하지 않으며. 가해자들도 결코 스스로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과요? 과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요? 그들이 사랑에 빠진다고요? 제정신인가요? 이 작품이 불편함을 전해주는 부분은 그런 아이러니를 뒤섞어. 그들의 부정적 감정적들을 너무 쉽게, 애정과 극복의 감정으로 이어나간다는 겁니다. 온갖 불편과 괴로움은 다 겪게 해놓고, 사랑으로 끝맺음이라니. 그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해버리다니. 허무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구원하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구원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죠. 계속해서 고통에 시달리며 감정적 폭발을 일으키는 인물들과, 극단적인 문제들을 교묘하게 뒤틀어놓은 이 작품을 바라보면서. 참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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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피해자는 과연 진심으로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 어떤 상처를 입었건, 스스로가 넘어서고 자라날 수 있으면 과거같은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걸까요? 


그리고 우리가 정말 그렇게 초인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걸까요.
그리고 그걸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그들이 나약하기 때문인걸까요?



이 작품 속에서는 아름다운 화면으로 가려둔, 소름끼치게 불편한 장면들을 내내 보게 되실겁니다




저는 제 스스로도 왕따를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지만. 아직 제 스스로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답을 내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는 나름대로 과거의 경험에서 기억을 넘어서서 잘 살고있지만. 가해자들이 과연 자신의 잘못을 알기는 할지. 피해자로서 자신의 상처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을 바라보게 될까요? 그리고 넘어서지못하는건 과연 잘못된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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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 작품을 보지 않으셨다면. 한번쯤 꼭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듣고싶네요. 이들의 용서와, 넘어섬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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