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는 계속해서 늘어가는데, 할 수 있는게 없는 기획자, 디자이너들
1.
물연차. 연차는 쌓였는데 할 수 있는 일은 많지않고, 아는것도 별로 없는 사람들을 칭하는 말이다. 대부분의 물연차는 개인의 노력부족이라기보다, 업계의 폐쇄성에 의해 생기는 일이다. 무슨 이야기냐고? 간단히 말해 그 누구도 준비된 초년생들에게 그에 걸맞는 프로젝트를 던져주지 않는다는 거다. 대학 3~4년 공부하고, 학원까지 다녀가며 공부한 사람들이 회사에 들어왔을 떄.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충분히 실무를 뛸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건 아니겠지만, 일부의 직무교육만 진행하더라도, 실무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상태라는 이야기다. 특히 기획자의 경우는 더더욱 이런 '실무에서 배우게되는 내용'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회사는 이미 검증된 이들에게만 주로 업무를 맡긴다. 심지어 팀장이나 중간관리자 급이 대부분의 업무를 혼자서 도맡아서 하게되는 경우도 많다. 신입에게 기회가 주어지지않으니, 언제까지나 '보조하는 역할' 수준에 머물게되고, 그러한 반복은 물연차가 쌓이게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사실 이런 도급제 (제자가 되어 스승에게 배우는 형태) 시스템은 IT 업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비즈니스 생태계에서는 이미 그 역할을 맡고있는 주요 역할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회사가 유지되기 어렵다. 규모의 경제면에서 크기를 늘리려는 회사가 아닌 이상, 보조자를 뽑지 않고 기존의 전문가가 모든걸 처리하게된다.
특히 저성장 시대가 반복되는 지점에서는, 규모를 늘리는 형태로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쉽지 않다. 일거리는 제한되어있고, 사람을 늘린다하더라도 기존의 수준만큼 균일한 수입이 생길거라고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규모는 줄이고, 신입은 단순 노동직이나 보조 업무를 더 많이 하는 방식으로 직무를 유지하게된다. 이런 경우 오랫동안 일을 한다해도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도 없고, 회사도 계속해서 기존의 사업 범위에서 안전한 길을 찾게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5년 10년차 인원이라도 자신이 아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버리기 쉽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걸까?
2.
내가 가장 답답하게 여겼던 지점 역시 이런 지점이었다. 어떤 회사를 들어가더라도 내게 '리더로서의 권한'을 주진 않는다. 그러니 자잘한 서비스들의 일부분만을, 돈을 보고 따라가는 형태가 반복된다. 사업자로서는 생존을 위해 당연히 돈을 쫓아가야겠지만, 그 업무가 다른 인원들의 업무 만족도를 계속해서 떨어뜨린다는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안정적이지만, 재미없는 일들을 처리할 초년생들이 잠깐 머물다 이직을 해버리는 식의 - 잦은 이직이 당연한 회사들이 만들어진다. 이런 회사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단순한 작업들을 많이 가져와서, 공장처럼 찍어내는 수준의 업무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업무는 반년에서 1년동안만 반복해도, 더이상 배울게 없는 똑같은 반복작업이 되어버린다.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개인이 다양한 회사를 옮겨다니며 각 업체별 서비스를 경험해보고 빠져나오는게 한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본인의 이력서가 매우 너덜너덜해지는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짧은 기간동안 업무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뛰어나가는 철새같은 인원을 좋게보지 않으니, 추후 입사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다른 방법은 에이전시 자체가 굉장히 다양한 서비스를 만드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디자인 에이전시들이 사라지고 소수의 회사들만 살아남고있는 지금 시대에, 이 방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일반적인 디자인만 해본 사람들은 '개발중심' 에이전시에서는 살아남기가 매우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선택한 방식은 '내 이력서가 너덜너덜해질 각오'를 하고 여러 회사를 다니는 방법이었다. 광고대행사에서부터, 개발 SI, 디자인 에이전시 등등. 흥미롭거나 내가 궁금한 업무를 하고있는 회사들은 직접 들어가서 업무를 해봤고, 그 안에서 그들이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과, 사업분야의 특징을 익혔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분야로 넘어다니며 '절대로 물연차만큼은 쌓지 않겠다'는 각오로 5년 이상을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이런 리스크를 짊어지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틈틈히 별도의 기획공부를 하고, 다른 사업분야를 찾아보고, 연구과제를 발표하는 시간들이 이어졌었다.
3.
디자이너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기획자들은 다른 분야의 서비스를 만드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이 속한 업무분야나, 사업분야에서 처리해본 것들을 알고있을 뿐. 갑작스레 새로운 분야에 대해 알아보라고 시키거나. 그것들을 기반으로 신규 서비스를 기획해보라고하면, 뭘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심지어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알고있는 내용을 문서화하거나, 다시 다른 이들에게 정리해 알려줄 정도로 자체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도 흔치 않다. 그러니 사수라는 사람이 있어도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고. 그들과 함께 일하더라도 보조자 이상의 역할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결국 공부하는 사람 스스로가 새로운 것들을 찾아서 계속 분석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하는데. 이것 역시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하는지를 알기가 어렵다. 결국 여러 서비스를 직접 경험하고, 정리해본 경험이 없고서는 분석의 시작점이 뭔지. 포인트가 뭔지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포인트들은 잘 정리된 문서들만 있어도 매우 빠르게 해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문서는 어디에서 찾아야하는가? 사실 이 지점부터가 문제가 된다. 대부분 좋은 양질의 자료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IT 생태계의 '기획서'라는 것들은 대부분이 오래된 기능명세서나, 구조도 정도의 문서가 웹상에 올려져있을 뿐. 실제 서비스를 설계, 개발하기 위한 정보들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좋은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어떤 지점들을 고려해 설계해야 개발하기가 편한지와 같은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업무 분야에만 집중하고있으니. 다른 서비스분야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한다. 그보다 낮은 수준을 갖고있지만, 강의로 생계를 연명하는 사람들은 얕은 수준의 기획과 방법론을 강의형태로 판매하고있다. 보고있자면 헛웃음이 나올 일이다.
4.
내가 앞으로 할 일들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기획적인 지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오픈할 수 있는 공개된 구조도, 기획 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대표적인 서비스 규격들. 커머스나 단순 서비스제공 형태부터, 포탈이나 제품관리, ERP 같은 수준까지의 내용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는 것이 목표다. 내부 구조를 알 수 없기에 확인이 어려운 지점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실제 데이터 밸류값이 필요한게 아니라. 어떤 정보들을 주고받는지를 유추할 수만 있어도 어느정도 수준의 기획은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서비스들의 형태를 나혼자서만 하는게 아니라. 공부가 필요한 인원들에게 구조를 설명하고, 실제 FLOW 차트를 만들어보게 하거나. 상태값에 대한 정의를 잡게하는 등의 지점을 통해, 이론적인 수준의 상태값 변화, 설계 등을 처리할 수 있도록 공개스터디를 해보게 할 생각이다. 실제 개발이 이뤄지진 않더라도, 개발 이전의 단계까지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수준의 내용을 실제로 다뤄볼 수있는. 현장 체험형 학습을 목표로 두고있다. 이 부분은 추후 좀더 자세한 계획서를 만들어서, 실제 진행을 해볼 생각이다.
이외에도 회사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눈 내용이 한가지 있다. 추후 내 이름을 걸고, 회사와 콜라보를 하여 비즈니스, 기술관련 트렌드 리포트를 조사, 작성하는 형태를 만들어보려한다. 이 리포트 작성을 위해 새로 들어온 신입분을 통해 기본적인 조사내용을 잡고, 그걸 다시 카테고리를 쪼개어, 특정 테마를 기반으로 한 트렌드리포트와 비즈니스 리포트를 작성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을 바탕으로 회사 테크블로그를 만들어서 - 개발자와 기획자가 각자 경험한 신규기술 스터디 과정에 대한 내용을 작성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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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퇴근 이후에도 하루 한두개의 글은 써볼 생각이다. 정확한 주제가 잡혀있진 않더라도, 일단 주기적인 작성을 통해 글쓰기 근육을 좀 풀어주고, 실제 연구할 내용을 좀 더 고민해보려한다. 디스코드 채널에 대한 리뉴얼도 필요한 상황이니, 하나씩 천천히 개선을 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