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 못하는 지식체계, 새로운 분야의 전문가를 클라이언트로 만날때
1.
서비스 설계를 하다보면,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분야를 만나게된다. 나와는 다른 전문가들이, 전혀 다른 지점에서 고민을 하거나,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하는 분야. 그런 내용들을 설계로 담아내려면 좋든 싫든 간에 그들의 지식체계를 배워야한다. 최근의 내가 정리해야했던 내용들은 부동산과 건설현장에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부동산 서비스는 일단 내가 경험했던 대부분의 서비스들과 너무나 달랐다. 이토록 수많은 정보들을 외부 API로 땡겨올 수 있다니. 이걸 다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심지어 그 내용들을 엮어내서 데이터베이스에 차곡차곡 저장하는 방법이나, 업데이트하는 시점도 고민해야했다. 또한 실제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해야하다보니, 부동산 전문가들이 공부하는 시험내용이나, 주요 업무 루틴 같은것들을 찾아봐야했다.
건설현장 관리 솔루션은 각 업무 담당자들이 어떤 일들을 하는지. 어떤 단계를 통해 실제 건설 업무가 진행되는지를 파악해야했다. 내가 직접 경험해봤던 작은 공사현장들의 모습과 다르게, 좀더 구체적인 안전담당자나, 공무담당자 등의 역할을 확인해야했다. 그리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정리한 지식과, 클라이언트들이 사용하는 체계가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해야했다.
물론 이런 과정들이 수박 겉핥기에 가깝다는건 안다. 다만 기획자의 프로젝트에 관련된 지식체계 공부는 시험공부와는 다르다.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상황을 상상하고, 상대에게 내가 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지식'이 필요한거니까.
2.
내가 새로운 분야를 배워나가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크게 두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실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어떤 일을, 어떤 순서로 하게되는가'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다. 그들이 하는 일은 각 분야별로 의미가있는 일이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각자 현장 상황에 맞게 단계별 작업을 진행한다. 기획자 입장에서는 이들의 전문적인 모든 과정을 이해하기보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작업들을 왜 하고, 최종적으로 무엇을 하게되는지. 가장 중요한 일을 위해 어떤 준비단계가 필요한지만 들여다봐도 대부분의 답이 보인다.
내가 새로운 분야를 배우는데 가장 중요하게 보는 다른 한가지는, 지식에 대한 증명과정이다. 이걸 좀 다르게 말하면 '내가 이만큼 이 분야를 알고있다' 는 걸 상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어찌보면 이 지점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척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얼마나 알고있는가에 대한 증명'은 클라이언트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다. 전문가 입장에서는 IT환경이나 개발, UI 설계 같은것들을 잘 알지 못하니 답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역으로 그들의 전문지식을 이해하고, 그걸 IT 전문가로서 처리해줄 수 있다는걸 보여줘야한다. 그 방법이 바로 '내가 이 분야를 이만큼 이해하고있다'는 자기증명인 것.
내가 이 전문분야를 어느정도 이해하고있다는게 확인되면, 클라이언트와의 대화도 훨씬 편해진다. 여기에 그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나, 기술, 업체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상대에게 훨씬 높은 수준의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있는 경우가 많다. 몇년동안 경험한 전문가로서의 경험이나, 현장경험으로 인해 '무엇이 불편하고 답답한지, 다른 업체나 해외에서는 무얼 하고있는지' 와 같은 내용들을 알고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지점을 빠르게 파악할수록, 쓸데없는 내용은 제외하고 핵심만 공략하는 대화가 가능해진다.
상황에 대한 예측, 가설수립, 상대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 상황 같은 것들. 이런 내용들은 대부분이 사전지식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에 연결이 되어있다. 상대가 무슨 내용을 궁금해할지. 또 어떤 지점에서 깊은 고민을 하고있을지. 그런 지점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예측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이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지식을 배우는 과정 또한 훨씬 수월해질 수 있다.
3.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글과 단계별 형식' 으로 정리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정보의 도식화라고 해야할까, 자신의 분야에서 해야할 일들은 알고있지만 - 남들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는건 쉽지가 않다. 그러니 그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있는지, 또 무슨 단계에 걸쳐 일을 하는지'를 물어봐도 좋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기획자는 자신이 알고있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상대가 실제로 하는 일들을 재구성하게된다. 그리고 이 내용을 다시 글이나 단계별 형식으로 도식화하여 상대에게 물어본다.
"이 내용이 당신이 아는 그 내용과 동일한가요?"
그러면 그때서야 상대는 '자신이 아는 것들'과 눈앞의 도식이 얼마나 차이가있는지. 그리고 그 지점에서 빠진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줄 수 있다. 이건 그 어떤 전문가를 만나더라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자신이 하는 일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장에서 아무리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그걸 '글로 써서 설명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하는 일을 분석하고, 그들이 속한 환경을 정리하는건 자기자신이 아닌 제3자가 오히려 더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100%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기획자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상대의 이야기를 통해 비교하고, 서로 다른 지점을 찾아나간다. 그렇기에 기획자는 훨씬 빠른 속도로 그들의 상황이나, 전문분야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상대가 말하는 지식분야'를 '자신이 아는 지식분야'의 정보와 일치시키는 '동일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작업이 빠르게 진행될수록, 상대는 '나' 라는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지식을 갖고있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느끼게된다. 이 부분이 초기 미팅과 제안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상대가 내 이야기에서 서로를 유사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과정. 그것만으로도 수많은 질문들을 대신할 수 있고, 복잡한 확인과정을 넘어가게 만드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결국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상대를 얼마나 제대로 분석했는지가 중요해진다는 이야기다.
4.
나는 제안이나 미팅은 일종의 의례나 퍼포먼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마치 카드게임을 하듯 상대가 원하는 패를 내어보이는 눈치싸움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분야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잘 모르겠습니다' 라는 말보다, 신뢰를 주기 위한 '그렇군요.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같은 가벼운 긍정이 훨씬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말을 이해하고, 자연스러운 동의를 이끌어내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다. 다만 무언가를 모른다고 '전 잘 몰라요' 라고 솔직한 바보가 되는 선택지를 택한다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의심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크게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면, 상대가 말하는 단어의 뉘앙스나, 앞뒤 전후관계를 예측하며 '말씀하신대로 그렇겠네요' 같은 - 긍정적인 답변을 주는게 훨씬 나은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두루뭉술한 넘어가기'가 언제나 먹히는건 아니다. 상대가 진심으로 내가 알고있는 지식들을 확인하고자 할 때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능하면 그들이 어떤 지점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자주 고민하고, 업계에서 어떤 지점이 이슈가 되고있는지.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대한 상상하고 확인할 수 밖에 없다. 빠른 시간 내에 그들의 의도를 파악할수록, 내게 원하는것이 무엇인지. 지식에 대한 확인인지, 성실성에 대한 기대인지. 이런 기대지점을 잡아내고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가 쉬워진다. 결국 인간의 '공감대'나 '신뢰'라는 것은 상대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확인작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5.
분명 나는 IT 업계에서 업무를 하고있지만, '상담사'의 역할을 하고있는게 아닌가 싶을때가 많다. 회사 안에서는 대표님의 기대와 걱정을 상담해드려야하고, 팀원들이 고민하는 지점도 해결해줘야한다. 앞으로 배우게될 게 무엇인지, 어떤 일들을 해낼 수 있을지. 하나하나 확신을 주고, 기운을 북돋는 작업을 해내야한다. 논리적 체계로 기계처럼 일을 한다기보다, 상대의 기분이나 상태를 파악하는게 중요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나는 상대의 말의 톤이나, 빠른 강도, 감정의 묻어나오는 수준에서 - 이 사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비슷한 강도로, 혹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대답을 해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상대는 불안함을 거두고, 안심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결국 내가 하고있는건 IT에서의 설계 업무가 아니라,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사람분석이 더 중요한 때가 많은 것 같다.
주변 팀원들의 고민어린 표정이나, 스트레스 섞인 몸짓, 혼잣말이나 콧노래 같은 것들을 유심히 살피다보면 - 그들의 상태가 예상되기도한다. 그러면 거기에 맞는 대응을 해주면서 그들의 상태를 좀 더 안정시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형성되고, 자연스러운 대화도 가능해진다. 결국엔 기획자란 직함을 갖고있어도 이런 '사람관찰' 작업이 실제 업무의 3~40% 이상을 차지하는 것 같다. 오히려 전문지식의 How to를 이야기하는건 쉽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파악하는건 전혀 다른 영역의 일이다.
실시간으로, 상대가 표출하는 다양한 표정과 뉘앙스에서 '일반적인 패턴'과 '특징적인 강조점'을 분석하는건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단지 그런 작업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사람마다 갖고있는 '일반적인 상태'를 알게되고, 그 일반적인 상태의 주요 패턴을 파악할 수 있는것 같다. 한번 패턴이 만들어지면 그 패턴에서 어긋나는 지점들이 무엇에서 오는지. 평소 모습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분석하게된다. 하루하루 이런 관찰들을 반복하고있노라면, '상대의 특이한 지점'들을 자꾸만 기존의 모습들과 비교분석하거나. 그걸 바탕으로 '일상적 패턴'을 추려내는 작업을 하게된다.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결국 이러한 패턴에 대해 파악하는게,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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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든 일은 사람을 통해 진행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지식이 중요한게 아니라, 만족스러운 표정이나, 몸짓언어, 말의 빠르기 등에서 긴장감이 사라진 '안도감'이 나타나는가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나로서도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부분 만큼은 사람의 감각을 통해 분석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지. 아닌지는 증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투와 행동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면, 일반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니까. 어떤 지점에서 긴장이 시작되는지. 어떤 행동에 특정 반응이 일어나는지. 그런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고있을 따름이다.
내 나름대로는 이런 분석들이 행동심리학이나, 행동과학적 분석의 한가지 종류라고 생각하지만, 체계를 갖고 한다기보다 '가설'을 세우고 움직이고있는 거라고 봐야할 것 같다. 그리고 그 가설이 맞는지 서서히 확인하고, 넘어가는 과정이 이어질 뿐인거지. 이 방식을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가 - 라고 했을 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역시도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기준에서 봤을 때, 내가 하고있는 일은 실제로 IT나 기획업무가 아니라. 그냥 인간관찰의 연장선에 있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