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지만, 그래도 삶이 예술이어야 하는 이유
형사들이 내민 사진 속에서 그놈은 웃고 있다.
호텔에 묵는 며칠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
단 한번 날 형님이라 불러 준 적은 있지만 그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이지 결코 나와 깊은 정이든 건 아니니까.
나는 한 숨을 깊게 내쉬고 이내 형사들에게 장엄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809호요. “
그놈이 순순히 끌려간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어쩌지? “
그런데 날 쳐다보지도 않는다.
형사들 말에 의하면 그놈은 가장 질이 나쁜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책이자 수배자라는 것이다. 나의 신속하고 단호한 제보로 인해 앞으로 속아 넘어갈 어리숙한 여러 명이 한꺼번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 순간이기도 했다.
그것 말고도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이른 아침, 전날 밤에 투숙을 한 여자 손님 하나가 카운터로 전화를 해 라이터 심부름을 시킨다.
방문을 두드리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젊은 여자가 문을 열어준다.
나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작가의 입장이었다면 이 상황이 뭔지를 분석하고 여기에 어떤 이미지를 덧씌우면 좋을까 고민했겠지만 나는 알바고 이 분은 손님이다.
라이터를 건네고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허둥지둥하고 있었는데 들어와서 에어컨 좀 봐달라고 한다. 내 앞에서 왔다 갔다 엎드렸다 누웠다가..
그럴 땐 “이 여자는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인가. 그래서 내 앞에서는 수치심조차 느끼지 않는 것일까? “ 라는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든다.
모텔에서 일을 하다 보면 일상에서 겪을 일이 거의 없는 낯선 경험들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반면 나도 모르는 사이 정신적인 피로가 함께 쌓여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또 다른 유형의 손님. 어디선가 시계를 잃어버리고 와선 청소하는 사람을 잡아 족치는 사람들. 청소를 하다가 귀중품을 발견하면 무조건 카운터에 제출한다. 그게 룰이고 더 큰 사고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술이 떡이 돼 들어온 사람이 무조건 차고 들어왔다고 말하면 우선 마음을 달래주고 바쁘게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 그리고 반드시 찾게 되면 연락드리겠다고 안심시켜 주는 것 까지 청소하는 우리들의 몫이다.
묵묵히 청소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불러재끼는 게 바로 모텔 청소부라서 몸만큼 감정노동의 강도가 큰 직업이기도 하다.
지금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모텔을 이용하고 나서 방을 나오기 전 한 번쯤 자신의 뒤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 이리라 믿는다. 하지만 내가 만난 투숙객들은 죽기 전까지 다시는 이 곳에 발 들일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 제일 심한 사람은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다고 모텔방에 비치된 커피포트에 순댓국을 끓여먹는 사람들이다.
천재들..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한번 그렇게 오염된 커피포트는 다시 쓸 수 없다.
또 침대 시트에 피 칠갑을 해놓고 사용하지 않은 침대인 것처럼 정리하고 나가는 사람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건 걷어서 빨고 새로 정리하면 되는데 만약 사용 흔적이 없어서 확인을 안 하고 그대로 방을 팔았다가 새로운 손님이 그걸 발견했다면...
생각만 해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래서 모텔 청소부에겐 확인 또 확인하는 습관이 필수.
내가 하루에 정리하는 이불이 120개, 빨고 건조하고 개어야 하는 수건과 시트가 300장이 넘는데 4개월간의 호텔 일이 끝나고 어느 날부터 기타를 치는데 손가락 하나의 반응이 느려지기 시작하는 거다. 딸깍거리면서 통증도 있어 병원을 찾아가니 의사가 나를 보고 골프를 치냐고 묻는다. 기억해보니 무거운 이불과 시트를 정리하면서 손가락에 너무 많은 힘을 주었던 게 문제였던 것이다. 꼴랑 4개월을 일한 나는 결국 방아쇠 수지 증후군으로 수술까지 해야 했다.
4개월 간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힘든 일에 적응도 했고 드디어 나에게도 짱 박힐 장소가 생겼으며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비롯해 다양한 모습들을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청소하러 룸에 들어가면 내가 청소하는 시간을 사장님이 체크하기 때문에 오래 관찰하고 사색할 시간이 없어 사진자료들 대부분 스케치 정도의 수준인 것이 살짝 아쉽다.
그리고 내가 모텔을 그만둔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 우리 모텔에는 외국인 숙박객도 제법 많았다. 그런데 내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모텔에 놀라운 변화가 생긴 것이다. 유창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니 모텔 공간 안의 분위기가 바뀌고 그간 없던 좋은 피드백이 생겨난 것이다.
나의 사수인 과장님, 절대포스 할머니는 손님 앞에 절대 나서지 않는다. 영어를 못하는 것은 둘째치고 자신들이 손님 응대까지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태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여기서 평생 머무를 사람이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는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그리고 땀 흘리는 일의 쾌감을 새롭게 알아버린 탓에 일을 무지막지하게 열심히 하기도 했고 새로 만나는 손님들이 궁금해 마치 특급호텔 지배인처럼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이름을 외워 부르기도 했다. 또 손님들이 필요한 것을 체크했다가 알아서 챙겨주기도 했다. 그러니 사장의 입장에서 이게 웬 떡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던 어느 날 사장님이 나를 불러 내가 호텔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은밀한 제안을 하는데..
(마지막 이야기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