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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 예술 박기열 Dec 02. 2020

장인(匠人)의 도구

能書不擇筆 (능서불택필)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에 능한 사람은 도구를 탓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미술계에도 “화가는 붓 탓을 하지 않는다.” 는 같은 의미의 말이 있다.

모든 예술 분야에서 도구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연장은 결과를 바꿀 만큼 중요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20여 년 동안 예술가로 수많은 전시를 하는 동안 갓 예술 판에 뛰어든 신진작가일수록 장식이나 기교가 화려하고 비싼 재료에 집착하며 자신의 작품이 놓일 전시공간에 욕심을 내는 것을 종종 보아왔다. 

여러 명이 함께 전시라도 할라치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조바심을 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꼭 전시가 아니더라도 경험은 없고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려는 의욕만 앞선 사람들에게서 자주 그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재료나 도구가 좋으면 모든 면에서 효율성이 높아지고 편리해지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 덕에 가장 최상의 여건에서 내가 만든 결과물이 더 찬란한 빛을 바라기도 한다.

개발자들에겐 성능 좋은 컴퓨터가 그렇고, 요리에선 신선한 식재료가, 음악에선 깊은 울림을 뿜어내는 오래된 악기가 그렇다.

미국의 한 매체에서 어느 유명한 기타리스트와의 인터뷰 중 비싼 기타와 싸구려 기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물은 적이 있었다. 원재료가 되는 브라질산의 나무라던가 그 나무의 건조상태, 그리고 장인의 손길이 깃든 수많은 공정 등을 기대했지만 이 기타리스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싼 기타는 단지 연주하기가 조금 더 편할 뿐이죠.”


세계 최고의 자리에 있는 그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악기인 기타의 우수함이나 가격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가의 기타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타에 비해 공정이 더 많고 일일이 손으로 제작하여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컨트롤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악기는 울림의 디테일을 연주자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힘을 들여도 명확한 소리를 낼 수 있는 편의성까지 연주자에게 제공한다. 하지만 싸구려 기타로 연주를 하더라도 숙련된 연주자라면 기타상태에 맞춰 힘 조절을 할 수 있고 연주의 마지막 결과는 고가의 기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이자 앞에서 주지한 能書不擇筆 (능서불택필)을 쉽게 설명하는 좋은 예이다. 

또한 매사에 재료나 도구를 탓하고 사람과 환경을 탓하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세상이 급변하고 예견하지 못했던 재해들이 우리를 덮쳐버린 지금, 

한 가지 방법으로 한길만을 고집했던 장인들이 자신의 업을 이어가기 점점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 

수십 년을 넘게 가업을 이어 온 식당과 가게가 폐업을 한다는 기사가 속출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상만 보더라도 현대 시대에서 장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일에 몰두해서 평생 한 우물만 판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접근하고 해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낡은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방식을 채택하는 일. 재료와 방법에 천착하기보다 시대에 맞게 자신을 확장하고 유연하게 전통을 계승하는 일, 그것이 현대의 장인들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아닌가 싶다.     


10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식당도 시대를 지나오면서 변화된 농토와 발전된 식재료의 재배환경, 기술력이 응집된 가열기구가 만들어내는 화력의 조절 성능에 따라 조리시간을 달리하고 재료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은 일가를 이루느냐 마느냐를 떠나 그것 자체로도 고귀한 의미가 있고 충분히 예술로 대접받아 마땅하지만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고 동시대의 대중들이 기꺼이 즐길 수 있는 결과물로 제공할 수 있을 때 더욱 그 가치가 빛이 날 것이다. 그리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장인들이 오랫동안 사용했던 연장을 버리고 새 무기를 들어도 그들이 가진 가치의 고유함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쁜 공기가 우리의 손발을 묶어버리고 건강하지 않은 먹거리가 우리의 몸을 잠식하며 

이기적인 정치가 우리의 권리를 빼앗고 피폐해진 경제가 우리 삶을 옥죄여오는 요즘, 

우리가 가진 가치들을 스스로가 버리고 잊지 않는 한 장인들의 그것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막연한 희망을 기다리기보다 우리가 가진 도구를 꺼내어 정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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