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삶은 예술

여왕님이 강남에 가지않는 이유

촘촘한 공간의 힘

by 삶은 예술 박기열
1. 압구정의 밤 photo by 박기열.JPG 압구정의 밤 photo by 박기열


크고 반듯한 건물과 곧게 뻗은 길 위를 비추는 조악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은 불빛들.

명품 샵, 성형외과, 연예 기획사, 입시 학원, 다국적 기업의 본거지(Headquarters)가 오와 열을 맞춰 촘촘히 나열된 공간. 같은 헬스장이나 미용실이라도 앞에 ‘고급’이라는 단어가 붙어야 할 것만 같은 공간. 강남.


강북에서 나고 자란 나는 몇 년 전, 어떤 콘서트의 아트 디렉터를 맡은 것이 인연이 된 이후 강남에 갈 일이 많아졌는데 가만 보면 이곳도 꾸준히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70년대 후반 개발 붐을 타고 시작된 강남 신화는 럭셔리의 대명사였던 찬란한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는 건물 여기저기 ‘임대문의’ 현수막이 붙어 있거나 같은 구역 안에서 끝내 사라지거나 새로 문을 여는 가게들의 공사 소음이 끊이질 않는다.

2. 강변북로에서 바라본 해방촌 photo by 박기열.jpg 강변북로에서 바라본 해방촌 photo by 박기열

사람마다 ‘입장차’라는 것이 있다.

나는 이 입장이란 것이 ‘당면한 상황’보다는 상황에 대처하는 그 사람의 가치관에 의해 구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연히 가치관은 살아온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부모를 둔 아이와, 모든 일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같은 일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날 때부터 쥐고 있는 ‘천성’이란 것을 무시할 수 없지만, 오랜 기간 보고 듣고 경험을 통해 스며든 것 역시 한 인간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3. 금호동과 대치동. 위성샷 by구글어스.png 금호동과 대치동. 위성 샷 by 구글어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지금의 내 입장을 만들어 준 어릴 적 동네에 관한 것이다.

나는 대체로 ‘강북’의 정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구도심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에 가까운 사람이라서, 오리지널 강남 출신인 아내와 연애 초반 서로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한 입장 차이를 좁히고자 할 때마다 난감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우선 강북에서 자라며 형성된 내 안의 정서를 단순하고도 명징하게 설명하기 쉽지 않았다. 사람들 속에 자리한 ‘강북’에 대한 선입견 역시 한몫했기 때문이다.

물론 강북이 강남만큼 깨끗하거나 정리되어 있지 않은 건 인정한다.

반듯하고 정리된 강남은 흔들림 없이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완성된 문장’처럼 느껴진다. 반면, 저 끝을 지나면 어디로 향할지 모를 만큼 뒤틀리고 얼키설키 엮인 골목과 빈틈에 맞춰 켜켜이 쌓인 건물 사이로 시간의 결을 그대로 드러내는 강북은 정답보다 사연이 먼저 보이고 목적보다 흔적이 더 또렷하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마치 세상의 모든 질문이 널브러져 있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4. 을지로 뒷골목과 촘촘한 회현동 photo by 박기열.png 을지로 뒷골목과 촘촘한 회현동 photo by 박기열

가끔 다큐나 드라마를 보면, 삶이 고단한 주인공이 사는 ‘달과 가까운 동네’, 여전히 시내 한복판에 5일장이 들어서는 촌스럽고 투박한 공간성을 가진 곳으로 강북이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곳에는 반듯하고 값비싼 강남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짙게 배어 있는 ‘사람 냄새’다.

지금 나는 신도시에 살고 있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강북에서도 한때 달동네의 대표격으로 회자되던 성동구 금호동이다.

금호동도 지금은 개발이 되어 한강 변을 낀 비싼 아파트 천지가 되었지만, 어릴 적 내가 자랐던 집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집 앞엔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건너편에는 아파트가 한창 건설되고 있는 압구정동이 보였다.

나는 금호동에서 태어나 그 집에서 정확히 25년을 살았고, 내 청춘의 대부분이 그곳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생활 반경은 금호동을 비롯해 옥수동, 한남동, 신당동, 약수동, 장충동을 지나 행당동, 왕십리까지 이어졌는데 사실 이름만 달랐지 이 공간들의 냄새와 색깔은 서로 많이 닮아 있었다. 이 동네에서는 목적지가 어디가 됐건 집을 나서는 순간 주변 가게의 상인들에게 인사를 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상인들은 내 친구들의 부모이며, 내가 엄마 등에 업혀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서 내 일생을 봐 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게 대부분이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나 선배의 가게이니, 이곳에선 신도시 대형 마트에서처럼 유통기한을 살펴보거나 직원의 불친절에 분노할 일이 거의 없었다.

모두가 내 이름을 불러 주거나 내 가족의 안부를 물어봐 주는데, 어찌 감히 손님의 까칠함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5. 금호동 photo by 박기열.png 금호동 photo by 박기열

이렇게 변하지 않는 옛 동네를 걷고 있으면 아련하고도 뭔가 뭉클한 것이 있다.

방앗간에서 갓 짜낸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비릿하고 콤콤한 생선 냄새, 규칙은 없지만 개성 있게 진열된 물건들, 또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오랜 시간 덧대어지며 야금야금 진화된 가게의 투박한 기능성 인테리어를 보는 것만으로도, 예술가에게 꼭 필요한 섬세한 자극들을 내 안 곳곳에 흡수할 수 있다.


6. 남대문 시장, 홍대 photo by 박기열.png 남대문 시장, 홍대 photo by 박기열

강북의 두 번째 매력은 역사적 미장센이다.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되기까지에는 처절한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 많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시위와 집회를 하고, 최루탄을 맞으며 자유를 외쳤던 그 현장은 대부분 강북을 상징하는 신촌, 명동 같은 곳들이다.

한번 상상해 보라.

“지금 민주화를 부르짖는 시위대 3만 명이 뱅뱅사거리를 지나 강남역 유니클로 앞에 들어섰습니다.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의 행렬은 잠시 후면 신논현역을 통과해 신사동 성형외과 거리, 그리고 가로수길까지 이어질 전망입니다.”

이 얼마나 없어빌리티한 그림인가?

뭐니 뭐니 해도 시위나 집회라 함은 탑골공원을 시작으로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지나 시청 앞 광장에서 마무리해야 제맛이 아닌가?

내가 강남에 대해 편견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큰 것, 화려한 것, 정답이라 여겨지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연희동의 오래된 골목 구석구석에서 영감을 얻은 봉준호의 상상이 그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겨주었다는 사실과, 낡은 주택가 작은 카페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대한 소설의 첫 문장이 쓰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거창한 곳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감각 한 나만의 작은 장소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7. 정릉 photo by  박기열.png 정릉 photo by 박기열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자신의 책 『천 개의 고원』에서, 고정되지 않은 채 사람들의 이동, 사용, 흔적, 사건, 우연, 반복이 더해지며 관계가 끊임없이 규정되고 변화하는 배경을 촘촘한 공간(Striated)이라 정의했다.

특정 산업이나 특수 목적처럼 하나의 주체 중심으로 설계된 완결된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를 흔들어 질문을 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는 강북이라는 공간에서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의 밀도와 촘촘한 관계에 대한 탐색이 AI 시대를 맞이한 우리에게, 보이는 표상 너머 숨어 있는 의미의 지층을 이해하도록 만들어 결국, 낯선 기술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정답은 기술이 가장 쉽고 빠르게 찾아낼 것이기에 우리가 가져야 할 힘은 오히려 정답이 아닌 나만의 관찰과, 소소하지만 남과 다른 경험의 편차, 그리고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나만의 감각이다.

경쟁력은 거창한 프로젝트나 화려한 스펙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시간이 응축된 공간을 매일 걸으면서 작은 불편함 속 매력을 직접 찾아내는 일, 익숙한 업무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갖고 끝없이 변화를 궁리하는 일, 사소해 보이지만 반복해서 떠오르는 감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기록하는 일, 바로 그런 것들이 당신이 쓰게 될 혁신의 첫 문장이 될 것이다.


결론은, 한국을 방문한 영국 여왕이나 외국의 국가 원수들이 대치동에 가지 않고 경복궁이나 인사동에 가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8, 왕과 세자 행차, 경복궁 photo by  박기열.jpg 왕과 세자 행차, 경복궁 photo by 박기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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