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무엇이 진정한 가치있는 평가일까

by CLY

가장 양면적인 인물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일 것이다. 한쪽에서는 파렴치한 독재자로, 다른 쪽에서는 경제 발전의 구국 대통령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양쪽 말이 모두 틀린 것도 아니다. 박정희 시대는 분명 유신 체제로 대표되는 독재 정권이었으며, 노동자와 일반 국민의 자유와 권리 역시 크게 훼손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 민주주의의 암흑기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고통받았다.

동시에 박정희 시대인 60, 70년대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듯,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된 한국의 선진국 도약을 예고한 고속 성장의 시대이기도 하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경부 고속도로, 수출 100만 달러 달성 등은 박정희 시대 경제의 대표 정책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전부 역사적 사실이며 어느 쪽에서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이 역사적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갈린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보수는 보수의 가치대로, 진보는 진보의 가치대로 이를 해석해 왔고, 이는 근본부터 다른 이념과 전제의 차이로 인해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논쟁은 더 이상 박정희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상대의 이념을 평가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박정희를 진보는 파렴치한 독재자라 하고, 보수는 경제발전의 구국 대통령이라 하며 서로 납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만 늘어놓는 공허한 외침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양쪽 모두 인정하는 자신 주장의 근거가 아니라, 그 근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정한 평가의 중요성

이런 상황에서 역사적 인물을 최대한 중립적으로 서술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전제 자체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계적 중립과 실질적 중립을 구분해야 하며, 이를 구분하는 것 자체를 누군가는 또 다른 편향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난감한 문제이다.

그러나 역사 교육에 있어서 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중대하기 때문에,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 나열하고 이를 방치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결국 이를 어떻게 올바르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닥쳐온다.

역사를 교육한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 나열이 아니다. 그 역사에서 취할 것, 배제할 것을 배우고, 좋은 것은 이후에도 행하며, 나쁜 것은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 미래에 대한 이정표를 세워야 한다. 단순한 역사 암기는 컴퓨터가 더 잘할 것이므로, 인간이 할 일은 그 역사를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 데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기계적 중립은 옳지 않으며, 가치 판단을 통해 그 인물을 평가하여 이후 우리 사회의 방향을 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최대한 공정하고 중립적인 가치 판단을 해야 함은 당연하다. 이때 특정 몇몇 이념과 가치를 통하여 인물을 판단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양측의 가치를 반영하거나 중립적으로 하고자 하더라도 그 평가는 불완전하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여전히 배제되어 있다고 여기거나 다른 쪽의 가치가 과하게 반영되었다며 논쟁을 이어갈 우려가 있다. 이것은 근본적인 평가가 아닌 또 다른 하나의 해석을 세운 것에 불과하다.

대전제 세우기

이에 필자는 먼저 대전제를 세워 그 아래에서 인물을 평가해 보도록 하겠다. 이 대전제 역시 누군가는 또 다른 가치 판단이지 않느냐고 비판할 수 있겠으나 필자는 이 전제가 경험적으로 비추어볼 때 설득력 있다고 본다. 다른 모든 이념은 이 대전제 하에서 고려될 것이므로 결국 특정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닌 대원칙하에서 이루어지는 근본적 평가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대전제는 다음과 같다. 바로 사회가 도덕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도덕은 사회의 상태에 의해 정의되며 이는 사회가 도덕을 능동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회 상태에 가장 알맞은 도덕이 정의되고 사회는 이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치 인간이 여러 불량식품을 먹을 수는 있지만 진짜로 먹어야 하는 것은 건강식품인 것과 같다.

일단 당장은 이 대전제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다. 논점이 이탈할 우려가 있으며 필자의 이전 글을 보면 이미 어느 정도 논의된 내용이기에 독자가 이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를 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렇다면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하여 보겠다. 그렇다고 필자가 박정희를 비판하기 위해 이를 먼저 제시한다고 오해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다. 다만 이 이념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대한 것이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민주주의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굉장히 중요한 이념이다. 본래 나라의 구성원들은 그 교육 수준이 높지 않고, 경제가 크게 고도화되지 않아 군주제나 과두정이 오히려 효용이 높았다. 일반 백성들은 무지하고 매일매일 생존을 위해 일을 해야 했기에 정치는 전적으로 일부 귀족과 군주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교육 수준이 올라가고 사회의 경제력이 올라가며 국민들의 역할과 경제에 대한 몫이 증가하자 점차 군주제는 사회에 맞지 않는 뒤떨어진 정치 체제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합리적인 국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가장 우수한 지도자를 뽑는 것이 단순히 좋은 군주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보다 효율적이었고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많은 국민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체제는 한 극단 또는 비효율의 준동을 최대한 막아주었고, 독단론에 반해 많은 의견이 경쟁하여 국가의 정치가 되고 제도가 됨으로써 한 명의 천재보다 10명의 일반인이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중우정을 극복한 현대 민주주의는 가장 좋은 체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최악은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최선의 체제가 되었다.

자유주의

이와 더불어 나타난 것이 자유주의 이념이다. 기존 군주제에서는 군주가 백성들의 경제 하나하나에 깊이 개입하고 정부가 국가 상업에 개입하는 중상주의가 흔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사유 재산과 참정권을 주장한 고전적 자유주의가 등장하였고, 이들은 사회계약론적 근거 하에 국가는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부론이 나타나 소수의 독점을 막고 시장은 도덕적 개인들의 완전경쟁시장으로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며 자유의 이념은 더욱 멀리 퍼져나갔고,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리주의와 자유주의가 사회의 주류 학문으로써 논의되게 되었다. 그리고 실질적 자유에 대한 개념이 대두되며 사회 자유주의가 나타나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보다 정밀하게 구분하자면 먼저 사유재산과 참정권을 중시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있다. 그리고 경제학에서 시장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방임주의, 자유 지상주의, 신자유주의, 시장자유주의 등이 있다. 그리고 고전적 자유주의의 형식적 자유는 실질적으로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보아 복지 등으로 실질적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보는 사회 자유주의가 있다. 자유주의를 시장에 국한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호보완 관계의 두 이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그 지속 가능한 발전성에 있다. 한 명의 천재보다 열 명의 일반인이 낫다는 말이 민주주의의 장점을 함의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최고의 이론은 아니다. 분명히 민주주의는 중우정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다수의 폭정이 일어나거나 스스로 붕괴할 위험성을 분명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사용되었을 때 그 잠재력은 다른 이념들을 능가한다. 제대로 교육을 받은 민중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그들은 한쪽의 독단을 막을 수 있다. 이후에 자유주의에 관해 이야기하며 말하겠지만, 독단론은 비효율적으로 넘어가기 쉬우며 사회의 발전을 해칠 우려가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는 만약 집권당이 비합리적인 정책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힘이 있다. 이것은 본래 막을 방법이 없어 그대로 순응하거나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거부할 수 없었던 군주정이나 과두정에 비해 확실한 자정 능력과 더 나은 의견을 제시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최고의 이념은 아니지만 최선의 이념이며 동시에 최악을 막는 이념이라고 여겨진다.

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대폭 끌어올려 주는 것이 자유주의이다. 만약 민주주의만이 존재한다면 그것 역시 독단론으로 빠질 위험이 생긴다. 다수의 폭정이 대표적이며 이는 수가 많아진 과두정이라고 하여도 상관없어 보인다.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막기로 결의하고 탄압하면, 거기서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과 스스로 히틀러를 뽑은 독일 국민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민주주의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유주의와의 병행은 필수적이다. 여기서 자유주의의 의미는 단순한 자유시장경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내놓는 자유까지 전부 포함한다.

자유주의의 표현의 자유

자유주의는 다수의 폭정을 방지하고 소수가 의견을 자유롭게 내놓기를 권장하며 이를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는 결코 이익을 얻지 못하며, 자유를 억압하면서 나타나는 해악은 중대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억압받는 소수 의견이 옳은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그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천동설이 주류였던 시대에 지동설이 나타난 것과 같다. 그리고 억압받는 소수 의견이 틀렸더라도 그것을 주장할 자유 자체를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

국민들이 스스로 그것이 왜 틀렸는지 생각하고 옳은 의견은 왜 옳은지를 생각하여, 단순히 옳다고 하는 의견을 기계적으로 순종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의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독도가 우리 땅인 것은 모두가 알지만 정작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 독도가 왜 일본 땅이 아닌지 반박을 할 수 없는 국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다.

또한 억압받는 의견도, 주류 의견도 전부 옳거나 틀린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소수 의견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서 옳은 의견은 받아들여 주류 의견을 더욱 옳게 만드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는 우리를 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고 서로 보완하며 사회를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현대의 성숙한 사회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가장 적합한 체제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의 조건

그러나 이 모든 논의는 성숙한 사회에서 가능하다. 500년 전의 조선시대로 돌아가 현대적인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아무리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처형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내가 왕이라고 하더라도 실현은 불가능할 것이다. 백성들의 교육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하고자 하더라도 이것이 제대로 시행될 리가 없다.

민주주의는 특성상 그 국민의 수준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서 백성들을 민주적 시민으로 교육하는 것은 그 경쟁 구조와 시대 환경에 의했을 때 불가능하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여기서 잠시 대전제를 환기해서 설명해 보자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시행하기에는 아직 사회가 선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도덕으로서 효과적으로 작동할 것임이 분명하다. 현재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소중히 여기며 이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는 언제부터였을까? 광복 후부터? 4.19 혁명 후부터? 6월 항쟁 이후부터?

이에 답하기는 다소 곤란한 측면이 있다. 우리 사회는 좋든 싫든 이미 군부독재 시기를 겪었고, 우리가 본 것은 장면 정부의 혼란과 87년 대선의 직선제로, 그 사이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는지 정확히 따지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그런 논의는 차치하고 미성숙한 사회의 체제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앞서 미성숙한 체제에서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불완전할 수 있음을 말하였다. 다만 만약 시대가 완전히 근세, 중세와 같다면 이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부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20세기이며 충분히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논의할 만한 시대이다.

그러므로 이제 흔히 사용되는 박정희에 대한 다음 말이 정당성을 갖는지 살펴보자.
딱 그 시대에 필요한 인물이었다.

독재를 정당화하는 법

현대에서의 미성숙한 사회에서는, 미성숙한 사회에서의 독재가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실과 성숙한 사회가 된다면 즉각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사실 두 가지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독재는 그 국민 수준을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끌어올리고, 제도를 정립해 나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한 의도일 때에만 정당화된다. 이렇게 정당화되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신탁 통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탁 통치는 분명 또 다른 외세의 통치로써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48년의 정부 수립을 위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정부가 수립된 이후 그만두었다.

이때 박정희 정부가 이를 잘 수행하였느냐고 한다면, 어느 쪽이든 간에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적을 것이다. 물론 경제성장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핵심 동력임이 당연하다. 당장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국민이 언제 공부하고 정치에 관심을 두겠는가.

논의의 종합

그러나 박정희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제도화하기 위한 노력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박정희 정부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노력이 능동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를 쟁취해 낸 것은 박정희 정부도, 신군부도 아닌 일반 국민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정부는 그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유로 정당화될 수는 없는 정부이다. 물론 민주주의와 자유로 스스로 향하는 독재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주장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그것이 옳지 않음은 자명하다.

이런 이유로 이 시기가 성숙한 사회였는지에 대해 논의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주장이 있든 결론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지금 당장 논의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박정희 정부는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것에 있어 처음부터 없어야 했다는 주장은 무의미하며, 그 공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를 앎에 있어서는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앞서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박정희 정부를 정당화하면, 또다시 다른 목적을 위해 민주주의와 자유를 짓밟아도 상관없다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와 자유에 적합한 사회이다.

여기서 이것들을 배제하고 경제성장과 독재라는 새로운 원칙을 세운다는 것은 도덕이 사회에 선행하는 것으로 애초에 불가능하리라 본다.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실패하리라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정희의 공을 누리고 있음은 인정하되, 대한민국 사회에서 박정희 정부와 같은 권력이 나오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즉, 역사를 가르치고 박정희를 평가하면서 박정희와 그 정부가 잘못되었으며 또다시 이와 같은 것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항상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면에서의 가치 판단은 정당하며, 단순히 공과가 동시에 있는 인물이라는 주장은 기계적 중립으로, 사실상 편향된 주장이다. 공과를 병존시킨다는 말은 일견 중립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잘못된 과를 충분히 비판하지 못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권위주의를 또 다른 방식으로 정당화할 위험을 내포한다.

이는 가치 판단을 회피하는 것이지, 진정한 중립이 아니다. 박정희 정부는 일견 필요했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한강의 기적과 같은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공을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체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였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 당시 한국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하였고,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던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완벽하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며 또다시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기를 거부한다.

역사는 선택의 문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따라 미래를 구성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공과가 있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철학적 회피이자 교육적 무책임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그와 같은 권력이 다시 등장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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