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필요한 자유의 정의
사람들은 자유라는 단어를 소중히 여긴다. 대한민국이 자유로운 나라라는 것에 감사하며, 군부 독재로부터 시민들이 자유를 쟁취해 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부당하며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로 생각된다. 자유로운 국가에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며 미래에도 지켜져야 마땅한 윤리로 여긴다. 그러나 막상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자유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블라인드 테스트나 능력주의와 같은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말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여성할당제나 지역균등제도와 같은 것이 자유를 보장한다고 말한다. 또 경제활동의 자유, 예컨대 기업이 노동자를 고용, 또는 해고하거나 강제적인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 반대가 자유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반면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의 실질적인 확장이 자유로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유의 의미는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를 정확히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제다. 그렇기에 각자의 생각에 따라 자유라는 단어의 의미가 달라지며 관점, 또는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논쟁은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즉 누군가는 자유를 이러하게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유를 저러하게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두 주장이 부딪히게 될 때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이는 사실에 대한 다툼이 아닌 의견과 생각에 대한 다툼이기 때문에 각자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이에 반박할 수 있는 말은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또 다른 선언밖에는 내세울 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가치가 실재하는 실체라던가, 단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 이상, 결국 문제는 자유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이다. 이때 직관이나 이념에 호소하여 자유란 마땅히 이래야만 하는 것이다와 같은 주장은 반대 측에게 전혀 설득력을 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자유가 아닐 수 있기에 각자의 신념만이 난립하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논의의 모습이 아니다. 이에 주장들을 상위의 개념에서 바라볼 수단이 필요하다. 자유라는 단어의 가치나 의미가 이와 같은 정의의 문제라면 정의들끼리의 싸움에서는 결판이 날 수가 없지만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의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옳은 정의의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유를 정의하는 여러 사상들이 있으나 사실 무엇으로 정의하든 그 자체로의 의미는 없다. 자유라는 단어를 반드시 그렇게 정의해야만 하는 논리적 필연성 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결국은 어떤 현상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인 뒤 의미를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가치와 도덕은 의미 없는 것인가? 정말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그럴 수 있으나 실천적으로는 아닐 수도 있다. 가치 자체가 당연하거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이는 인간이 의미를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간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로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가 생기기는 하겠으나 이 기준이 자의적이라면 위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 인간이 어떤 현상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불가능하므로, 현상에 당위를 부여하여 그것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속성을 확보한 뒤 이름을 붙여준다면 그 가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것과 같이 정말로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유가 어떻게 정의되어야만 하는가, 자유를 의미하는 현상이 왜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지, 그것을 왜 자유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한다면 물론 자유라는 단어 자체는 공허하더라도 그것에 연결된 현상이 함께 작동하여 인간 사회에 실제로 적용되는 진정한 가치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이미 가치를 결정하는 방식을 이전 글에서 제시한 바 있다.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는 사회에서의 도덕이라면 이는 사회 상태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한 사회를 바라봄으로써 관찰되는 총체적인 사회 상태를 통해 가장 그 사회에 적합한 가치와 도덕을 발견하여 따르는 것이 사회 구성원들의 마땅한 의무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이전의 논의와 같이 내가 자유를 어떻게 생각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내가 관찰하였더니 자유는 이렇게 생각되어야 한다는 문제로 바뀐다. 역시 이전의 논의에서는 상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논쟁은 끝나지 않게 되었으나 이제 당신은 사회 상태를 잘못 해석한 것이고, 실제로 우리 사회를 가장 안정시켜 주는 자유의 정의는 이러한 것이라며 생산성 있는 토론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는 논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는 신념의 대결은 각자의 세계 안에서 맴돌 뿐이지만, 이러한 자유의 정의가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인다는 주장은 검증 가능한 가설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주장을 역사적 사례, 사회 지표, 경제 데이터 등을 통해 논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다. 즉, 논쟁은 더 이상 개인의 주관적인 선언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근거를 통해 타당성을 따져 묻는 논증의 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게 제약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 또 다른 사람들은 인간 존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신념에 매몰되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주장과 주장만을 반복해 왔다. 비트겐슈타인처럼 표현해 보자면 각자의 언어 게임에서 놀고 있는 중이었다. 이와 같이 직관이나 신념에 기반한 주장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잘 통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말일뿐이다. 그러므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논리를 통해 주장한다면 이때 사용되는 논리는 다분히 객관적이고 근거가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또한 그러한 논리여야 치우침이나 편향 없이 논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사회 상태란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지표이며 연구의 영역이기에 사용될 수 있다. 이제 이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는 어떠한 자유의 정의가 있는 것이 바람직한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사회에 무엇이 적합한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이를 위해 지금까지 자유가 어떻게 정의되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이러한 정의가 사회에 필요한 것이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더라도 경향성에 의해 그때의 주요 철학이 사회의 옳은 도덕이었을 가능성은 크기 때문이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로 나뉜다. 형식적 자유란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주장하던 것으로 재산권, 참정권 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국가는 이에 절대로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자연법사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아 국가는 인간 고유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되는데, 이때 인간의 자유는 반드시 보장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같은 자유방임주의가 나타났으며 일반적으로 보수 진영에서 주장하는 자유는 이러한 형식적 자유이다. 즉 법적, 경제적 등에 대한 제약이 없는 상태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자유라는 말을 떠올리면 일단 직관적으로, 1차적으로는 이러한 정의가 생각난다.
로크로 대표되는 형식적 자유가 처음 등장했던 18세기는 이전의 중상주의 군주정에서 이후 산업혁명 자본주의로 발전해 나가는 시대로, 왕권신수설이나 절대왕정 같은 것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어갈 때였다. 시민들은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기 시작했고, 이어 나타난 자연법사상은 아무리 국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인간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발표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때는 이전 시대에서 침해받았던 인간의 재산권과 참정권 같은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즉 국가의 간섭이 굉장히 강했던 시대에서는 그 간섭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었으므로 인간 고유의 권리에 국가가 간섭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유를 지켜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국가는 법으로만 인간의 삶에 관여할 수 있고, 또 그 법 역시 인간 고유의 권리는 침해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자유를 지키는 방법이었고, 그렇기에 국가가 인간에 간섭하지 않는 상태, 즉 위에서 보았던 형식적 자유가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19세기가 되면서 상당히 빈약한 정의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많은 국가들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고 왕이 아닌 선출된 공직자들이 나라를 운영하게 되었으며 법은 명문화되고 판사와 의회가 생겼다. 즉 기존 자유의 정의에 의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사회는 마냥 안정되지 않았다. 비록 국가의 간섭은 사라졌으나 그것이 노동자 계급에게는 자유를 의미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농촌은 전부 양 목장이 되어버리고 도시 노동자들은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선택권이 없었다. 그나마 있는 일자리마저 기계에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결국 러다이트 운동으로 폭발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실질적 자유를 보장해야 할 필요를 사회는 느끼게 되었다. 이전에는 국가의 간섭의 부재가 그 자체로 자유를 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틀렸음이 시대 상황을 통하여 증명되었다. 분명 국가의 간섭이 사라짐으로써 사회 전체의 자유가 증진된 것은 맞으나 결국은 일부 계급의 국민들에게는 자유의 보장을 사실상 실패하여 사회적 혼란이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이전에는 자유 따위 없어도 그저 왕이나 귀족의 명령만 들으면 되었지만 이제는 인간이 실질적으로 자유를 가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여러 문제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형식적 자유는 진실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여 주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겉으로는 인간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를 보장하여 주는 듯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유를 보장한다기보다는 그저 자유를 던져주고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즉 실제로 그 인간이 자유로운 삶을 사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개인은 자유롭게 취업하고 이직할 수 있으나 만일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하고 월급이 쥐꼬리만 해 반드시 어떤 기업에 종속되어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이것이 정말로 자유로운 상태인가. 물론 여전히 개인은 언제든지 퇴사를 할 수도 있고 다른 회사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회사도 비슷하다면, 퇴사를 하는 것은 사실상 자살과 같다면, 결국 이는 개인을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나누고, 노동자 계급을 자본가 계급에 종속시켜 또 다른 주인과 노예를 만들어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기에 나타난 것이 실질적 자유이다. 형식적 자유만을 보장했을 때 나타나는 실질적인 자유의 침해를 막기 위하여 국가가 나서 인간이 자유를 체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모든 국민은 문화생활을 할 자유가 있지만 빈민층은 사실상 그러한 자유를 박탈당한다. 즉 단순히 간섭받지 않기에 자유로운 것이 아닌, 강제되거나 불가피한 선택의 제한 없이 실제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상태를 자유라고 보는 것이다. 기존의 체제에서 있던 법의 간섭이 사라졌더라도 이것이 자유를 의미하는가, 이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그저 법이라는 제약 하나를 덜어준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남는 것이다. 법에 종속된 것은 자유가 아니라면 돈에 종속되었더라도 이는 자유인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법에 종속된 것이나 돈에 종속된 것이나 사실 다름없다면 결국은 이름만 바뀐 것일 뿐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사실 법에 종속되었던 시대에도 하고자 하면 할 수는 있었다. 다만 상응하는 불이익을 받아 사실상 불가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 체제에서도 사실상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면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실질적인 자유인가? 이에 국가가 복지라는 이름의 지원책을 통해 문화 카드 등을 저소득층에게 발급하여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예시이다. 또한 여성의 유리천장이나 지역의 개발 편차에 따른 불평등을 보상하기 위한 복지 역시 이러한 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유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우리 시대 역시 나름의 규정된 자유의 의미를 가질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국가의 간섭을 완전히 막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완벽하게 모두를 동등하게 만드는 것 역시 불합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여러 면을 보며 자유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가장 합당한가를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아래의 예시들을 통해 실제로 어떠한 자유가 중요한 것인지 고찰해보자.
현대 사회, 특히 가장 선진적이라고 평가받는 국가들은 대체로 민주주의가 보편화되어 있다. 그 이유는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어떤 소수의 엘리트나 군주가 아닌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정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수가 다수보다 똑똑할지라도 그들이 틀린 생각을 하면 이를 바로잡기 어려운데 반해, 민주주의에서는 어떤 이들이 틀린 생각을 하더라도 다수의 상식 하에 옳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결과적으로 더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다수의 국민 교육 수준이 일정 이상을 달성해야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 역시 완벽하지 않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에 그 인간이 모인 다수 역시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그 다수가 틀린 결정을 밀어붙인다면 그것은 다수의 폭정이자 또 다른 독단으로, 이 상태에서의 민주주의는 군주정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독단이 일어나는 순간 민주주의는 자신의 이점을 모두 엎어버리고 과거로 퇴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에서는 자유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닌, 그것이 우리 사회에 가장 적합한 체제이기에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만을 고집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이를 자유를 통해 보완하고 때로는 견제하여 사회 전체의 체제를 더 성숙히 만드는 것이 사회 구성원의 책무이다. 그러므로 이때 자유는 다수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 자유로운 의견 개진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부분은 이전 글에서 다루었으므로 넘어가겠다.
이와 같이 자유란 이러한 것이다라는 선언에 사회를 맞추어가는 것이 아닌 사회에 필요한 것에 자유라는 이름을 부여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부분을 살펴보자. 사람들은 이제 자유의 억압을 부당하게 느낀다. 위에서 보았듯 자유라는 가치는 좌우 구분할 것 없이 전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이므로 만일 어떤 사람들이 자신에게는 자유가 주어지지 못하였다고 느낀다면 이는 잠재적인 사회의 불안 요소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자유는 모든 국민들이 자기가 자유롭다고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나 법에 의하여 보장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자유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앞서 보았듯, 자유의 정의를 그저 국가나 법의 간섭의 부재로만 국한한다면 국민의 하위 소득 계층, 또는 노동자 계급은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할 여지가 생긴다.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파업과 과거 역사 사례에서는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계급을 없애버리고 전부 평등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더 높이 올라갈 기회와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느끼게 할 수 있으며 사회의 효율성 차원에서도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그러므로 사회를 안정적으로 영속시키기 위해서는 그 중간의 적절한 지점에서 타협점을 찾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회에서 개인들 각자의 자유는 충돌이 불가피하므로 이를 제한할 필요가 있지만 그 결과가 합리적이어야 한다. 단순히 간섭하지 않는 것은 자유의 보장이 아닌 방종이며 가장 강력하게 간섭하는 것은 독단적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자유, 계층 이동의 자유를 전반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적당한 개입이 필요하다. 만약 반드시 어떠한 사람들을 채용하라던가 과도한 세금으로 불필요한 수준의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것은 기업이나 상위 소득 계층이 자신의 자유를 침해받고 있다며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위 소득 계층이나 노동자 계급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희망이 없다면 역시 자유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에 그들에게 노력한다면, 다른 이들보다 불합리하게 더 큰 비용과 힘을 들이는 것이 아닌 같은 노동에 같은 소득을 주듯 같은 노력에 같은 결과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 준다면 이들은 현재 당장은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더라도 이를 자유의 부재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할 수 있는 일로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를 똑같은 출발선에 세우거나 같은 결과를 보장하는 결과의 평등과는 다르다. 대신, 개인의 노력과 무관한 불합리한 장벽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가령, 가난한 집안의 아이가 값비싼 사교육 없이는 명문대에 진학할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면 이는 불합리한 장벽이다. 이때 국가는 무상 교육이나 교육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그 장벽을 낮춰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고 노력하여 성과를 내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이처럼 기회의 평등이란, 경주에서 모두가 동시에 결승선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실력대로 뛸 수 있도록 신발을 제공하고 경주로의 돌부리를 치워주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상위 계층은 이때 나타나는 부의 재분배나 고용 정책에 불만을 가질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만약 노동자들이 정말로 만족하고자 단기적으로 생각한다면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장기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심각하게 비효율적이며 결국 사회의 불안정성을 초래함을 인지하고 포기한다. 이와 같이 상위 계층 역시 더 나아간 자유방임주의적 또는 신자유주의적 기업의 자유를 주장하고 원할 수는 있으나 같은 이유로 포기되어야 한다. 즉 그들 역시 이를 자유의 정의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일부는 이것이 오히려 시장의 비효율성을 막고 경제를 성장시켜 사회를 더 안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으로 보이는 해고나 경영 정책으로 사회가 성장하는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누적된 불만과 극심해지는 양극화, 이로 인한 소득과 소비 감소 등으로 지속불가능한 체제이다. 즉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나아가서 사회의 잠재적 불안 요소를 키우며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의 해악으로 되돌아온다. 앞서 자유란 이런 것이라는 선언이 아닌, 사회를 본 뒤 가장 적절한 것에 자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은 위와 같은 기회의 평등과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적절한 개입이며 이것이 자유이다. 사회 상태를 통해 바라본 당위를 갖는 도덕이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선언이지 주장이 아니다.
즉 만약 자유를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즉각적인 권리로 정의한다면 충돌의 문제로 인해 양립 불가능하나 실현할 능력을 주는 가능성의 권리로 정의한다면 비록 당장 노동자를 해고하지 못하더라도, 당장 큰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그 절차와 과정 속에서 상호 조정을 전제함으로써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정의했을 때 비로소 사회 전반에 자유를 실현할 수 있으며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다. 당장은 높은 위치에 가거나 물건을 사고 문화를 향유할 능력이 없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된다. 또한 당장은 세금으로 자신의 이익을 빼앗기고 가장 효율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는 장기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오래 유지하기 위한 보험료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인간이 합법적인 지위나 부 등을 쟁취할 수 있는 여력은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무상 교육이나 하위 소득 계층에 대한 지원 복지 등이 충분히 보장됨으로써 그들이 계층 이동의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한다. 이러한 와중에도 자신의 세금이나 선택이 불필요할 정도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위해 제한되지 않고, 결국 자신의 장기적 안정을 위해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체감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자유의 정의는 그것이 얼마나 사회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가를 통해 정의된다. 허가한다면 어디까지 허가하는지, 제한한다면 그 역시 어디까지 제한하는지는 사회 상태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유가 사회에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위에서 바라본 표현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 뿐만이 아니라 그 외에 사용되는 자유 역시 전부 같은 방법론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이때 이 글에서 본 바와 마찬가지로 무엇이 가장 이롭게 작용할 것인가를 중점으로 바라본다면 불필요한 논쟁 없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글의 제안은,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신념의 제단에서 내려와 우리 사회라는 현실의 시험대 위에 올려놓자는 것이다. 어떤 자유가 더 진정한가를 두고 싸우는 소모적인 논쟁을 멈추고, 어떤 자유의 정의가 우리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더 많은 구성원에게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제공하는지를 객관적 데이터와 사회적 현상을 통해 논증해야 한다. 이 실용적이고 이성적인 접근법이야말로, 공허한 구호가 아닌 우리 삶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