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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헌문학 Oct 25. 2021

일상의, 일상을 넘어선 심미적 시간

--『카페 뤼미에르』에 재현된 『동경이야기』정신






최초의 무성영화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의 첫 상영(1895.12.28)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래 금년으로 한 세기하고도 10년, 1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보다 조금 앞선 지난 2003년은 일본, 아시아, 나아가 세계 영화사의 거장인 동시에 일 모더니즘 영화의 신화적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했다. 


이에 ‘지그재그 3부작’의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Five』를 통해 거장의 탄생을 기념한 바 있다. 2005 부산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쓰리 타임즈』를 선보이는 등의 왕성한 활약으로 대만영화를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은 허우 샤오시엔 감독 또한 오즈에의 오마주 『카페 뤼미에르』를 전설에 헌사했다. 본 영화는 ‘연출 혹은 극화된 현실’을 담아 현실과 혼재된, 현실을 넘어선 환상을 시각화해내는 예술매체인 영화와 그 영화의 역사를 성찰하는 영화는 극 전반에 드리워진 오즈의 『동경이야기』의 그림자로 하여 반세기라는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영화적 시간과 일상의 시간’, ‘경계와 접점으로써의 인생과 예술에의 사유’ 라는 공통화두에 관해 두 명의 영화 거장 오즈 야스지로와 허유샤오시엔이 나누는 담화인 듯 여겨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오즈의 反영화』에서 저자 요시다 요시시게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드라마가 아닌 자잘한 사건들에 대한 영화’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지극히 일상적이기만 한 화면을 담아내는 이들 리얼리즘 계열의 (일명 ‘영화제용 영화’라 불리기도 하는 밋밋하고 담백한) 응시의 영화가 비루한 일상의 상투성의 경계를 넘어 심미적 ‘예술’영화로써의 예술성을 획득하게 되는 승화란 그 어느 지점에 그 어떤 방법론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일까? 


일상의 재현자로 알려진 오스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와 『동경이야기』의 현대판 오마주이자 마찬가지로 사실적 리얼리즘에 줄을 대고 있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카페 뤼미에르』. 바로 이 아시아 두 거장의 이들 ‘일상 스케치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미학적 접점을 찾아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화의 존재 가치와 정의’에 관한 여러 설왕설래 가운데 한 가지 입장을 들여다보는 접근이 될 것이다.




여백 이미지의 禪적 명상성-『동경이야기』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일본의 3대 영화신성으로 불리는 오즈 야스지로(1903~1963). 그에겐 흔히 ‘일본의 전통미학을 가장 잘 표현한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그리고 이때의 미학이란 ‘禪’이라는 단어에 닿아있는 사상적인 그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즈 영화 속 ‘선’은 동양철학적 인본주의의 경구를 내재하고 있다 할 미니멀리즘한 스토리 구조와, 높은 비중 비어있는 시공간을 다루고 있는 정적인 인서트 숏, 절도감 있는 공간연출 등의 양식화된 형식으로 발현되고 있다. 일본 서민가정 일상의 가족사에 현미경을 들이대 이를 통해 전후 일본사회의 변화적 징후와 인간 보편의 인정(人情)과 인간의 생사를 읽어냈던 오즈. 마찬가지로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동경이야기』(1953)에도 가정해제 문제를 영화의 메인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극적인 스토리 대신에 소소한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던 감독은 극 중 친어머니의 상을 치른 가족들이 장례식 직후 지극히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듯, 영화 속 그나마 극적 요소였다 할 ‘죽음’이란 사건까지 담담한 일상의 평범으로 수렴해버린다. 삶에는 다소 간의 굴곡이 있고 이별은 필연적이며 세상살이란 삶의 통속성을 감지해버린 막내딸의 발언처럼 이렇듯 ‘실망스러울 만큼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마지막 씬에 제시된 ‘무념무상(無念無常)’ 무심하지만 영원불변하는 형태의 자연 풍경처럼 그리 나쁘기만 한 비전망의 결말인 것은 아니다. 


여느 중산층 가정의 익숙한 풍경을 그저 스크린에 들여놓은 듯 하여도, 오즈 화면만의 독특한 공간미학과 시간 감은 앞서 언급한바 일본의 禪적 미의식이 담겨있는 그 것이다. 흔히 오즈 샷이라 불리는 감독의 전매특허 격 키워드인 '다다미 숏’(일본 다다미 마루의 낮은 눈높이 앵글로 인물의 시선을 정면으로 잡는 쇼트)으로 연출된 섬세한 구도와 비례의 미장센, 기교의 장식이라곤 포기한 듯 고정된 카메라 워크로 수묵 농담효과처럼 입면화된 화면에 극도로 양식화되고 절제되어있는 일본 전통 특유의 미학이 제시된다. 오즈의 영화들은 또 극적 행위나 사건이 제시되지 않는 채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와 정물화된 대상 및 풍경만을 오랜 동안 카메라에 비춰내기도 한다. 이러한 화면은 어떤 의미화 작용을 일으키는 슬라이드 쇼 앞에 놓여져 있는 듯 각각의 장면 해당 시각이미지에 집중하게 되어 독특한 시간감을 전해준다. 이는 최소한의 플롯을 지닌 오즈 영화의 전체적인 내러티브 진행을 더욱 유보시키게 된다. 동경을 떠나가는 철로의 기차 시퀀스가 그 대표적으로 고전영화에서의 ’씬’들이 단지 스토리의 진행을 위해 존재했다면 『동경이야기』의 인서트 숏(-극중 특정액션이나 상황을 상세히 설명, 혹은 강조하기 위해 한 씬의 세부적인 영상묘사를 삽입하는 것, 또는 그 화면)은 시각고문처럼 시선을 저당잡곤 사건 아닌 고유한 ‘시각이미지’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 것인 것이다. 


철학자 들뢰즈의 표현대로라면 ‘비어있는 시간’을 화면에 담는 이 같은 ‘순수 시각이미지’는 ‘삶의 의미 없음’과 ‘관조적 인식’이라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키는 침묵의 웅변으로 기능한다. 때문에 언젠가 들뢰즈는 오즈를 또 ‘일상생활에 관한 가장 위대한 비평가’라 칭하기도 했다. 또 인물이 프레임 안으로 입장하기 전과 퇴장한 후 비어있는 풍경 혹은 빨래, 전등 류의 주변 사물들이 고유의 정서를 발산하며 화면프레임의 주요위치와 시간을 점하게 하는 등, 구성의 중심을 등장인물에 두지 않고 약간 비켜나도록 두는 영화 속 ‘필로우 숏(pillow shot)’씬에 관해 ‘일본의 전통적 시가인 하이쿠(俳句) 형식처럼 인간이 우주의 중심인 것만 아니라는 진실을 보여주는 오즈의 방식’이라며 시의 어법을 통해 문예적인 해석을 시도한 것은 영화평론가 노엘 버치(Noel Burch)의 시각이었다. 


영화의 라스트 씬에서는 홀로 서있는 아버지의 옆모습으로 해변 항구의 풍경이 교차된다. 이처럼 인과고리와는 무관한 풍경 씬이 삽입된 것은 오즈 영화의 특성인 극도로 절제되어 잘 드러나지 않는, 말하자면 여기서는 아내와 사별한 노부의 쓸쓸함일 정서 및 심상을, 구체적인 일상의 공간과 대상으로 투사, 투영해 시각이미지로 현현 시켜내는 내면화된 영상서술행위라 하겠다. 이처럼 ‘느리고 비어있는’ 오즈 영화 속 ‘순수 시각이미지’는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의 차원을 넘어 그 어떤 명상적 성격의 직관적 깨달음을 전해준다. 이와 같은 오즈의 빈번한 침묵부동의 습관에서 ‘무’라는 개념을 읽어냈던 비평가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는 또 그의 저서『영화의 초월적 스타일』에서 ‘오즈의 영화는 브레송, 드레이어의 영화와 더불어 ‘초월적 스타일’을 지녔다’고 칭하기도 했다.


첫 장면과 완벽하게 대응되는 라스트의 항구 시퀀스로 ‘이어지는 인간사’는 불변하는 형태의 자연풍경과 동일선 선상에 놓여 시간의 회귀라는 주제가 ‘초월적’스타일로 형상화된다. 이렇게 영화는 동양화적인 선적 고결성을 내재한 일상- 즉 치장되지 않은 삶의 깊이와 철학의 영상화로 영화사상 위대한 10대 걸작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오즈의 이, 서민의 삶의 배경이었던 바다의 흐름은 영화의 궁극의 전언대로 ‘시간과 함께 흘러’ 오늘의 거장 허우의 온고지신한 복습행위에 의해 영화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경유해온 21세기 도쿄의 우리네 일상 속 전철의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어지는 삶, 이어지는 영화사' 일상의, 일상을 넘어선 심미적 시간 2


일상과 예술, 그 공존의 조건- <카페 뤼미에르>에 재현된 <동경이야기> 정신 Ⅱ. 

작성자 홀림 조회수 505 작성일 2007-09-19 10:52:00 


일상의, 일상을 넘어선 심미적 시간 2.


이어지는 삶과 꿈. 이어지는 영화사 

- 『카페 뤼미에르』



그렇다면 일상이 선적. 예술적 풍경으로 화한 경건한 걸작 『동경이야기』의 이러한 초월성은 과연 어떻게 21세기 현대적인 외피와 동시대적 주제로 변형, 재연될 수 있을 것인가?


194,50년대 중국 국공내전을 소재로 한 서사극 『비정성시』(83)와 『희몽인생』(93), 『호남호녀』(95), 『밀레니엄 맘보』(2001)에 이르는 대만 현대사 3부작을 통해 부침 많던 중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중산층 서민들의 삶과 정서를 소재로 역사와 시간 속에 인간이 직면하게 되는 진실이라는 테마를 천착해온 허우 샤오시엔(1947~) 감독. 신창차오 대만 뉴에이브의 시금석이자 아시아 대표급 시네아스트인 그가 대표작『동경이야기』로 유명한 오즈 야스지로의 오마주 영화 『카페 뤼미에르』(2003)를 발표했다. 영화는 이제 110년을 맞은 영화사 전체와 대만의 오늘, 그리고 스스로의 영화적 현재를 돌아보는 조용한 성찰의 휴식과도 같은 소품이다. 


프리랜서 작가 여주인공 요코는 대만 여행 뒤 일 도쿄의 집으로 돌아와 지인들에게 임신 사실과 미혼모의 길을 택할 의사를 밝힌다. 고서점 주인이자 철도 마니아인 오랜 남자친구 하지메와 부모는 절대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림자에 더 가까울 그들은 침묵에 가까운 데시벨로 그런 그녀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조심스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요쿄는 익명의 개인들이 부유하는 도쿄를 전철을 교통수단으로 여기저기 배회하고 다닌다. 영화는 대략 이 같은 미약한 얼개의 내러티브에 쓸쓸한 가족애와 미묘한 사랑의 감성을 낮은 농담의 담채화처럼 심심(心心)한 듯 심심(深深, 心深)하게 담아낸다. 


중국의 정치 역사적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오늘의 성찰을 전제로 하고 있는 대만 뉴웨이브의 필연적 노선항로처럼 허유와 그의 본 작품 또한 예술영화의 대표계열이라 해야 할 사실적 리얼리즘 스타일을 취하고 있다. 오즈의 시선이던 정면응시와는 다소 차별화된 프레임 비스듬히 측면 구석으로 비켜나 있는 인물과 공간을 분절되지 않는 긴 롱 테이크로 훔쳐보듯 응시하며 인물의 감정을 오히려 구체화시키는 '허우 식 거리두기’ 연출 중에서도 ‘가정 스케치’와 ‘다다미 숏’이라는 오즈의 흑백환영이 컬러로 복원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속 임신한 상태라는 조건으로 피곤해하는 요코에게 ‘이어지는 삶’과 ‘내일을 위한 긍정과 人情’의 상징이라 할 식사거리를 챙겨주는 하지메와 요코의 부모님들. 하지메는 또 켠켠이 둘러싸인 전철 네트워크 중심에 웅크린 다소 애처로워 뵈는 태아의 그림을 스스로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상징적인 캐리커처로써 내보이며 일견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전철 마니아로써의 자신의 전철 소음채집 행위가 실은 매일이 똑같아 뵈는 현상에 나날이 확인되는 미묘한 차이와 변화를 감지함으로써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고 이를 증명해내는 비밀스럽고도 설렌 기록행위임을 고백한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곧 빛의 입사각과 강도에 따라 시시각각 그 미적 색채를 달리한 모네의 '수련 연작’에서 표현된 인상파 화가들의 전언처럼 찾아올 미래는 오늘과는 또 다른 신비일 것이라는 ‘일상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전하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발현되고 있다. 


영화 속 두 주인공 남녀가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던, 영화의 고향을 뜻하는 ‘뤼미에르' 카페를 어루만지던 부드러운 미광에서도 사람 간 신뢰와 정 따위의 소박한 인본주의적 가치만으로도 일상은 아름다울 수 있고 삶의 의미는 충분하리라는, 또한 허위나 환상이 아닌 이러한 현실의 진정성을 담아내는 것이 영화일 것이라는 소탈한 신조의 나직임을 눈으로 '보고', 고요 속의 큰 파동으로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전언은『동경이야기』가 설파한 ‘이어지는 삶, 그리고 이 ‘삶의 덧없음-무'. ‘인정’이라는 가치들을 신세대로 세대 교체된 인물들만큼이나 한 발짝 긍정적인 자세로 포용해 수용하려는 허우의 능동적인 태도가 반영된 것이다. 



오늘을 통과하는 시간초극의 기차 


영화 속 주인공 요쿄는 대만 116주년 기념품인 옛 철도 운전사의 회중시계를 찬 채 전기(傳記)작업을 위해 1930년대 일제강점 쇼와시대 일본에서 활동했던 대만 작곡가 장웬예의 자료들을 모으고 있다. 지나간 시대 예술가의 궤적을 쫓고 소음을 녹음하는 행위는 수집과 동시에 어제가 될 시간의 흔적들을 기록하려는 노력이다. 바꿔 말하면 오즈가 『동경이야기』에서 소멸해 가는 人情에 애잔함을 담았듯 허우 역시도 오즈를 포함한 소멸하고 잊혀가는 옛 것들과 그 가치에 애정과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이는 또 기록행위에 집착하는 ‘예술가’ 직업군의 젊은이들을 내세워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8세기 한 러시아 음악가의 생애 연구)나 앙겔로플로스의『율리시즈의 시선』(전설적인 영화감독의 분실필름 찾기 여행)의 테마를 패러디 재연하도록 하여 아시아를 대표하는 명감독인 스스로의 위치를 세계 영화사 안에 상향기대로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인가 추측해볼 수도 있겠다.


이렇듯 영화는 ‘오즈 탄생 100주년 기념영화’와 ‘뤼미에르’란 수식들에서 암시되듯 영화사와 영화 자체에 관한 감독 자신의 종합적인 소회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100여 년 전, 첫 스크린에서 기적을 울려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새로운 영상예술 시대의 개막을 열었던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속 거대한 그 것과, 세계영화사 고봉에 안착된 걸작 『동경이야기』 속 오즈의 그 것-즉 기차를 자신의 현재이자 타임머신인 ‘뤼미에르카페'를 경유해 미래로 나아가도록 길을 터놓은 허우 샤오시엔. 이로써 그는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기 위한 평온한 한 때’ 라는 영화의 중국어 제목 ‘가배시광(嘉排時光)’의 뜻처럼 요코의 그로테스크한 꿈들이 상징하는 오늘의 불안을 포용하고 잉태된 아이와 그녀의 미래가 함의할 대만과 일본, 아시아, 아시아 영화의 내일을 사색하며 이 모두를 적극적으로 준비해 맞이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오즈 영화 속 동경으로의 상경, 즉 인본주의가 퇴색된 현실을 환기시킨 매개수단이자 역으로 그 모든 원인이기도 했던 ‘근대성’의 상징이었던 '기차'는 오늘의 '동시대성’과 ‘일상성’, ‘시간의 운동성’ 이 모두를 함의하는 표상 공간 -21세기 산업대도시 도쿄를 뒤덮은 복잡한 ‘전철’로 변형되어 차라리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결국 감독은 오즈 영화에의 단순모사가 아닌, ‘세상의 근원적 현상으로써의 시간의 흐름’이라는 『동경』의 전언, 오즈의 정신을 궁극적 교감으로 체화하여 도시 모습과 주체적인 여성상 등의 세대 변화상까지 담아낸 동시대성이 환기되는 그 만의 재해석에 성공하고 있었던 것. 


영화는 오프닝에서와 같이 도시생명체의 동맥인 듯 동경을 교차 횡단하는 전철의 장관으로 클로징된다. 이 때 각기 하행선과 상행선의 요코와 하지메가 교차하며 우연처럼 조우하고 끝내 한 플랫폼에서 만나지던 장면은 우리들 존재란 일상과 역사를 경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만남과 이별, 스침, 만물회귀라는 영화와 인생 그 모두의 복합적인 함의를 순간으로 인화한 섬광 같은 상징적 장면이 된다. 

이로써 선배영화『동경』과도 같이 수미쌍관을 이루며 길게 포커스 잡은 라스트 씬에서 관객들은 영화상영 내내 롱 테이크를 뒤쫓으며 감당해야 했던 긴 지루함이 결국은 ‘새로운 관계 망의 형성’과 ‘전진하는 미래에의 기대감’에의 흥분과 여운으로 전환되는 ‘보상’의 순간을 맞게 된다. 이는 '시간은 흐르고 만물은 돌고 돈다’는 『동경이야기』에 초월적인 주제 종결부가 현대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데에 감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 심미적 응시’- 일상성과 예술성, 그 공존의 한 가지 조건 



내러티브의 완결성, 심리적으로 완벽한 등장인물, 닫힌 형식 등은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영화의 구성요건들이다. 그러나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들만을 담고 있는 사실주의 계열의 일명 ‘영화제용 영화’ 라 희화화되기도 하는 예술영화들에는 이러한 종류의 극적 긴장과 감각적 재미라곤 휘발되어있기 마련이다. 이들 영화들이 취하는 지루한 롱 테이크나 텅 빈 시간의 인서트 숏은 행위이미지가 주는 즉각의 감각효과를 가져오지 않는 것이고 때문에 관객들은 ‘이후엔 무엇이 일어날 것이며 이 지루한 비춰냄은 무엇을 읽어내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인가’ 하는 기다림과 질문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사실적 응시의 영화감상이 괴롭게 여겨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들 영화들이 대게 취하고 있는 영화 속 이러한 ‘순수 시각이미지’들은 그 시간을 통해 정신과 육체, 실재와 상상, 주체와 대상, 세계와 나 사이의 자기 동일성을 즉각적으로 성취하면서 순수한 명상의 순간 같은 절대성을 체험하도록 이끈다’고 보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즈의 열렬한 숭배자인 빔 벤더스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위대함을 ‘평상시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물들을 ’예술적으로 응시하는 것’이라 평하기도 했다.


실제 우리는 영화 『동경이야기』와 『카페 뤼미에르』안의 스크린에서 익히 보아왔으나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공간과 사물들이 빛을 발하며 응집된 정서의 흔적을 전해주고 있는 낯익은 생경함을 경험한다. 허우 샤우시엔 감독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보이는) 내 영화의 시간은 예술적 차원의 시간이지 현실의 시간이 아니며 그 것은 감정이 응축되면서 확장된 시간이다”라면서 “『카페 뤼미에르』에서는 “현실에 존재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찍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표면으로 끌어내려 했다”라고 영화의 연출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일상의 울타리 안에서 그 일상의 시간을 심미적인 것으로 승화시켜 영화미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오즈 야스지로와 그에 경도된 허우 샤우시엔 두 거장 영화세계의 미학적 접점과 본질을 드러내주는 해답이 된다. 



대상을 깊게 ‘응시’해 섬세한 시청각과 미장센으로 재현, 일상의 미학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영화들은 그 진정성으로 우리네 일상을 환기시키고 ‘일상의 풍경화’가 가능하리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하여 극장을 빠져나온 관객들은 개개에게 주어진 시공을 한층 실존적 존재감을 지닌 것으로 체감해본다. 또 이로써 무미건조한 현실의 담백한 미감을 긍정해보게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오해하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상(日常像,想,)이 심미적으로 승화된 것은 뷰파인더의 영화적 기술적 조작에 의한 마술이었다기 보다는 현상계를 바라보는 생활 속 실존적인 시선의 깊이로 획득된 신비(초월이)였다는 사실. 그 미학적 정언명제를 말이다.





(2005, 계간 공연과 리뷰, 겨울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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