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헌문학 Oct 25. 2021

여성주의 시와 영화ㅡ여성주의 문법의 전략

 여성, 몸, 에브젝시옹

        여성주의 시와 영화, 여성주의 문법의 전략

                     여성, , 에브젝시옹

  

 『워낭소리』 이전에 지난 해 국내 독립영화계에 불을 붙인 뜨거운 감자는 단연, 『슬리핑뷰티』였다. ‘이한나 감독은 여자 김기덕이다’. ‘지독하다’, ‘불편하다’, ‘당혹스럽다’는 카피를 달고 작년 10월에 등장, 많은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화제를 불러왔던 영화 『슬리핑뷰티』. 하지만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뜻하는 『슬리핑 뷰티』는 사실 그리 놀라운 스케일이나 작품성을 갖춘 대단히 깊이 있는 작품이라 치켜세울 순 없다. 그러한 과장된 상찬보다는 영화진흥위원회 지원 시나리오 당선작으로 제작된 시네필 키드 26살 여성감독의 연출작으로, ‘힘 있는 가능성과 폭발성을 함장하고 있는’, ‘매우 위험하면서 문제적인 작품’이라 표현하는 것이, 아니 본인은 여기서 그 문제성을 ‘여성주의’로 보았으므로 ‘매우 위험하면서 문제적인 여성주의 작품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프랑스의 여성작가 엘렌 식수는 ‘여성주의 글쓰기’의 정신을 선언했다할 그녀의 명저 『메두사의 웃음』에서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내장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지적한다. “수동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은 숲속에서 잠을 자다 왕자로부터 키스를 받아 깨어나고, 적극적(이고 남성을 존경하지 않는) 여성은 머리에 뱀이 달린 메두사가 되어 기사의 공격을 받아 자멸한다는 전설과 신화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이어 “잠자는 공주처럼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욕망되는 존재가 여자”라고 덧붙인다. 욕망과 의지와 표현이 거세된 ‘잠에 빠져있다’고 하는 조건, 이는 타자화됨을 의미할 터인데 이처럼 타자화되었을 때에나 진정으로 욕망되는- 다시 말해, 가치가 주어지는 게 여자’라는 간파다. 식수의 도전적인 물음을 수용해 동화를 그처럼 ‘젠더(gender)’와 관련된 불순한 사상적 기제로 본다면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매우 역설적인 근친상관의 테마로 전복하고, 중층적 옴니버스로 패러디한 영화 『슬리핑 뷰티』는 동화의 불순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조소하고 전복시켰을 것인가. 실제로 이 영화의 감독인 이한나 감독은 ‘거친 세상의 폭력적 키스로 깨어나길 강요받는 여성의 황량한 풍경과 그녀들의 지독한 결핍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많은 관람객들은 이 영화를 불편하고 당혹스럽게 받아들였다고 고백한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전달성이나 의미화의 도식화에 어설픈 일면이 적지 않았음에도 파급력 있는 ‘폭발성’을 지녔다는 혐의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폭발성이란 ‘대상화되던 여성의 성을 비로소 주체적으로 발화’한 유의미한 시도와 진정성, 충격적 화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여성성의 본질을 탐구하며 여성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거듭 세우기 위해 이 영상텍스트는 에브젝시옹 개념을 상기시키는 이미지들을 활용한다. 또한 신체의 감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며,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지극히 사실적으로, 나아가서는 비참하게 표현하고 있다. 미화(美化)와는 거리가 있다. 감독 역시 어쩔 수 없이 대한민국의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여성들이 가지는 필연적 수동성과 결핍에 관한 그녀의 고민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연출 화법을 들여다보자.

우선 동화 속 여성이 으레 ‘여성다운 것’으로 인식되는 부드럽고 너그러운 식물적 서정의 세계를 지향하며 청순함과 섹슈얼함으로 어필되는 존재들이었다면 『슬리핑뷰티』는 다르다. 못난이 소녀 도연이 자위를 시도하는 씬으로 시작되는 첫 장면에서부터 쭈욱 그리 어여쁘다고 할 수 없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리얼하게 여겨지는 삶을 비춘다. 게다가 그녀들이 겪는 성적 체험은 당혹스럽다. 이는 보암직하고 들음직하며 편안하고 따스한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는 것들로, 『슬리핑뷰티』는 그런 반골적 태도와 선정적인 화법으로 여성성을 탐구한다. 여성의 입으로 암묵적으로 금기시 되던 성적 발언을 발화했다는 것도 마찬가지. 이 영화의 이러한 시도들은 프랑스의 페미니즘 작가들을 중심으로 주창된 ‘몸으로 표현하기/글쓰기’의 정신과 이론을 상기시킨다. '몸으로 표현하기/글쓰기’란 기존의 언어/표현법이 여성의 체험을 풀어내기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라캉이 말한 상징계를 이루는 이성중심의 태제와 다른 새로운 언어/표현법을 만들고자 여성들의 육체의 경험과 감각을 중심으로 몸으로 표현하는 모반행위를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1970년대부터 주로 프랑스 정신분석 페미니스트 학자이자 작가인 뤼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 엘렌 식수(Helene Cixous),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의해 정의되어 체계화된 개념이다. 이 영화의 연출화법과 페미니즘의 몸의 철학이 어떠한 접점을 지니고 있는가.

이제 막 이성에 눈 떠, 외할머니 상가에서 사촌 상준을 만나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급기야는 얼떨결에 어설픈 성적 경험을 치르게 된 초등학교 졸업반 소녀 도연. 첫 번째 에피소드 『나의 사촌』에서 조숙하고 생각 많은 도연은 그의 제안으로 빈 학교에 놀려가게 되어 어설픈 성적 장난의 경험을 나눴다. 기억의 순간엔 정녕 함께 있었지만 마음에 새겨 추억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도연, 한 쪽이었던 것 같다. 상준은 하루 만에 자신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그 기억을 부정하지만 서투른 첫 경험 뒤엔 사촌에게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마당에 깎아놓은 그의 손톱을 주워 담고 있었던 것이다. 시골 뒷간에서 속옷에 초승달 모양으로 배여든 혈흔 혹은 생리혈을 확인하고 사촌에게서 자전거를 배우다 무릎이 까이고, 죽은 할머니에게서 손톱을 떼어내는 감각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기도 한다.

 두 번째 삽화 『겨울잠』 속 이례는 겨울잠에 든 것과 같은 무력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의 무기력한 초상이다. 오리농장을 운영 중인 이례는 식욕과 성욕만 살아있는 본능 덩어리로 전락한 아버지 혹은 시아버지의 온갖 뒷수발을 들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이례는  불임 여성이거나 여성성을 제대로 꽃 피워보지 못한 채, 그저 폐경을 맞아 늙어가는 초라한 여염집 촌부다.

초경을 맞은 소녀와 폐경에 든 중년 여인, 어여쁘거나 젊지 않은 초라한 그녀들 또한 여성적 꿈, 정당한 욕구와 혼란, 분노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런 동시에 지독히도 외롭고, 이해받고 싶어하는 애처로운 존재들이다. 감독은 한 영화매체와의 인터뷰(조이씨네, 2008. 11)에서 “여자들은 스크린 안에서 왜 전부 예쁜 모습으로만 포장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게 싫었다”고 밝히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는 여성의 성이 자연스러운 인간성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데 반발해 인형(人形)의 성, 타자―식민화한 젠더 섹슈얼리티와 단절을 선언하고 이를 부숴버리고픈 욕망을 품게 한다.

여성 주체로 자연성으로서의 에로티시즘을 드러내거나, 모멸당하는 여성육체의 비루함과 고통을 드러내려는 것은 바로 그러한 허위적 성화를 깨기 위해, 이것이 바로, 근래 여성주의적 화자의 작품들이 외설과 광기를 띠게 되는 근원이라는 말이다.

여성의 몸과 내면 표정은 예쁘게 웃기만 하는 것으로 재단되어진 인형의 그것이 아닌, 그녀가 예쁘건 예쁘지 않건 고통을 느끼고, 욕망과 존엄을 품고 있는, 전인격적 자연 그 자체이자 일부였다.

 마지막 삽화 『슬리핑뷰티』는 중국 조선족 모녀가 희망을 품고 한국 땅에 들어왔는데 어머니는 눈에 눈 먼 브로커들의 중개로 재혼을 하고 딸 수진은 전적이 있는 의붓아버지 김 씨 집에 수양딸로 팔게 된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수진은 이제 임신해버린 몸으로 가사와 농장 일에 시달리며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돈으로 매매되어 성 노리개이자 하녀가 되어버린 수진, 가혹하게 닥친 운명에 체념해 버렸다는 듯, 부탄가스를 마시고 진서와 함께 드러누운 수진의 지친 얼굴을 빗물이 때리고 있다. 빗물은 눈물자욱을 지워낸다. 앞서 『겨울잠』의 주인공이던 이례의 이야기의 경우 늙고 노망난 아비 곁에서 웅크려 잠을 청하는 몸짓을 취하는 것으로 영화는 갈무리 된다. 이 때 그녀에게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울먹임이 가느다랗게 새나오는데 이는, 양식장 오리들은 생매장 당해 도살처분 되고 인간은 치매에 걸려 짐승 수준으로 추락해 딸 혹은 며느리에게 자위를 도울 것을 떼쓰는 그러한 생명존엄성과 근친 간 질서가 무너진 생활계 잔인함에 느낀 ‘의미 없음, 자기연민, 서러움’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두 삽화 속 매우 인상적이던 이 처절한 시퀀스들은 이 영화가 자칫하면 징글맞은 신파로 전락할 수 있을 위험성을 차단한다. 인간의 신체를 존엄하게 대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성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는 현실에서 감상주의를 극복하는 한, 지점인 셈이다. 게다가 수진은 결국 김 씨의 손자인 반항아 진서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김씨가 ‘할머니와 조카 사이의 근친상간’을 들먹이며 식칼을 들고 와 그녀의 임신한 배를 가르려 할 때, 격분한 진서가 그 칼을 빼앗아 김 씨를 난자하는 참극을 목격하고 만다. 인간의 신체가 싸구려나 단순한 호기심의 유발체이며 착취와 폭행, 타자적 대상으로 취급받는 현실에서 감독은 영화에서 섣불리 과잉된 연민의 시선을 거눈다. 영화는 시종 롱 테이크로 이어지고 부조리와 절말에 체념해가는 여주인공들은 어처구니없는 비극 앞에서도 점점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어갈 뿐이다. 이례와 수진, 그녀들에게 처해진 패륜의 그로테스크한 비극적 장면들은 그동안 쉬쉬하며 은폐하고 있던 처절히 자비롭지 못한 세계의 진창을 보여주며 인간존재에 안일한 선입견을 뒤흔든다.

영화를 이루는 세 가지 에피소드가 동시다발로 진행된 곳은 낙후된 어느 촌마을 도시 근교 하우스였다. 이곳은 도연 외할머니와 이례 아버지, 그 외 집단폐사 된 오리 떼들처럼 늙은 생명들이 적막한 하루하루를 살거나 죽어가는 공간이다. 집단과 문명의 정신없는 속도감에서 벗어나 자연의 본능으로 화하며 문명이 도외시하는 문명사회 습지에 반인문주의적인 ‘몸언어와 근친이라는 패륜적 소재로’ 도의적 칼날을 들이댈 수 있었던 터다.

영화에는 이처럼 도발적인 섹슈얼리티를 극단적 자학적으로 표현하면서 충격을 선사하는 위악과 엽기가 주된 정조로 흐르고 있다. 세 가지 삽화는 모두 여성들의 비극적 삶과 문제의식에 접속해 이를 형상화했다. 광기, 불모, 성경험, 모성, 일부일처제, 여성신화의 허구, 여성의 생리적 체험들, 출산, 성폭력, 잔혹, 자기비하, 죽음 충동의 고백, 결혼, 반란 따위는 여성적 체험들이다. 엘렌 식수는 『메두사의 웃음』에서 이어 여성이 여성의 시각으로, 남성은 쓸 수 없는 여성의 경험과 고통을 표현할 때 여성은 비로소 타자로 주변화되지 않고 여성적 연대감과 진정한 여성미를 창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삽화에서처럼 여성이 ‘성’을 말할 때는 여성의 성은, 특히나 이 영화의 감독의 연배인 이십 대 여성들의 내면에 ‘성’이란 순연하고 행복하며 부드러운 탐미나 쾌락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왜 이토록, 내적 분열과 소통 불능의 비명 같은 것, 광기와 타나토스(thanatos;죽음에의 친화성)를 불사하는 저항의 코드들로, ‘여성의 몸과 고통’에 관한 관심이 거칠고 직접적이며 공격적으로, 상처와 치욕감 같은 것으로 표현되는 일이 많은 것일까. 이에 대해 한 여성 시인은 『남자들은 모른다』』라는 책에서 “여성들이 자기 정체성(또는 성적 권리)을 찾고 이를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자아(또는 성적 표현)가 외부사회로 표출되지 못하고 억압되고 분열되곤 하였기 때문”이라고 갈파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여성들에게 자타의도 강요되던 암묵적 침묵을 깨고 여성의 성을 더럽고 추한 것- 에브젝시옹으로 상징되는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발화한 예로 제시하려한다. 때문에 그러한 여성의 파괴되고 좌절한 성과 내면을 리얼하게 드러낸 이 영화 또한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이 외에도 영화는 육체에 대한 감각을 묘파하는 시선이 넘친다. 도연이 무릎에 상처를 입는 것, 그 피의 붉은 빛을 예쁘다고 착각하는 것, 이례가 냇물에 빠져 차가운 달을 보며 치를 떨던 것, 수진을 때리던 빗물, 부탄가스를 흡입하던 혼곤한 이미지 따위……. 그 감각들이란 절망적이고 갑갑한 상황에 육박해오는 낯선 감각이다. 여성이 표현하는 예술들이란 이러한 감각을 몸의 체험으로 그 몸의 기억과 몸에 새겨진 고통과 감각의 흔적으로 표현하는 것들이 많다. 몸을 빌어 혹은 몸을 통해, 몸의 문법으로 쓰여졌다. 자신의 추한 육체와 외모, 포르노그래피 적으로 수치심을 자아내는 상황과 표현들이 넘쳐난다. ‘여성’, ‘몸’을 소재로 여성의 몸에서 배태되는 ‘통각(痛覺)’, ‘파괴적 사랑’의 이미지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상상이 주를 이루게도 되는 것이다. 여성은 내면의 감각을 인식하는데 민감하다. 여자는 자궁을 지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존재라는 그 신비한 생리적 특성으로 자연의 물질성과 영성에 보다 닿아 있으며 여성과 감각과의 친자성이란 이로써 가능해지는 기적이다. 외부로 표출되지 못한 파토스는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게 마련인 까닭이다. 차오르고 지는 달의 생성과 소멸과 생멸을 주관하는 자궁을 지닌 몸이기에 환상을 보는 데도 더 능숙하다. 남성성이 이성을 상징하고 여성은 몸으로 분류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여성 자신의 몸’이란 니체가 주창했던 대이성(the Grand Reason of Body : Mom)이자 감각되는 세계의 축소판 그 자체다. 여성문학에서 외설이 주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경향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이러한 상황, 세 편의 에피소드에서 도연, 이례, 수진은 모두 여성들의 통과의례이기라도 하다는 듯 반복적으로 피를 흘린다. 육체적 희생(이례가 아비가 던진 거울을 치우다 유리에 배여 흘리는 피, 수진이 임신한 상태에서 농장 일을 하다 흘리는 코피), 육체적 환난의 징표(강간당한 뒤의 혈흔, 도망치기 위해 도착한 시외버스 정류장 벤치, 수진의 다리 사이 흘러내리던 유산의 하혈)이 그 것이다. 여성적 통과의례(도연이 사촌에게 자전거를 배우다 흘리는 피와 첫 생리 혹은 첫 경험의 혈흔)이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여성은 사랑의 여부나 여성 몸의 쾌락의 시스템과는 무관한 오르가즘 없는 섹스, 혈흔, 배설된 정액, 임신 혹은 새로운 생명(육아), 혹은 유산이라는 육체적 경험을 정체성과 몸 자체에 상실에 대한 실존적 흔적으로 간직하게 되어있다. 갓난애를 등에 업고 다방으로 출근하는 『겨울잠』의 미스 박과 아버지 애를 밴 『슬리핑 뷰티』의 수진, 이 외에도 근친상간으로 인한 죄의식과 고통, 상처, 육아는 그녀들처럼 말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겨울잠』에서 치매 걸린 아비는 이례가 알려준 대로 요강에 배설하지 않고 마루바닥에 똥과 오물을 싸놓고 전시하고 이례에게 치워줄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갓난아이의 그 것으로 정신수준이 퇴화된 이례의 아비가 똥과 오물에 집착하고 있었듯, 이례 아비의 행동들은 인간의 모성 회귀 본능이 표현된 것임과 동시에 모성에게 강요되는 맹목적 희생에 배면되어 있는 잔인한 폭력성 또한 고발하는 설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례는 또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창궐해 여인 농장의 오리들이 강제적으로 도살처분 당할 때 생매장되는 오리 떼들 사이에서 아버지 혹은 도망가 버린 남자의 사체가 누워 있는 환상을 본다. 여성의 희생이 미화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강요된 희생에 대해 느끼는 여성들의 살의가 솔직하게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여성은 인형도 천사도 아닌 인간이다. 어머니는 성적 체험이 거세되어 있는 무성적이며 성스러운 존재로 박제화하려고 하지만 실은 어머니란, 필연적으로 성적 체험과 임신과 출산이라는 행위들을 거친 성적 존재이다. 때문에 모성으로의 회귀는 조르주 바타이유 등 프랑스 문학작품들 속에 빈번하게 표현되었듯 ‘에브젝시옹’, 즉 배설물과 폐기물에 대한 집요한 천착을 동반하게 된다. 이 영화 외에도 여성주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자신의 육체에 모멸을 가하거나 육체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전시하는 자해행위로 에브젝시옹을 제시하곤 한다. 현실의 좌표 안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추잡하게 만들고 부정히 여기게 하는 태도다. 근래의 여성시인들에게는 여성 자신의 몸을 비틀고 상처를 가하고 분뇨 담을 연상케 하는 끝없이 더러운 것들을 가없이 나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때 이 ‘에브젝시옹’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개념규명한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에브젝시옹(Abject, 폐물, 폐인)란 “처참한, 참혹한 이라는 뜻으로 정체성, 체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경계, 위치, 규칙을 무시하는 것"으로 오물, 쓰레기, 고름, 체액, 시신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역겨운 느낌을 주면서도 마음을 홀리는 기묘함 또한 지니고 있다). 에브젝시옹을 구현하는 것은 탈중심화된 주체, 이행 대상 개념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에브젝시옹은 생활과 문화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배제하는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언어는 전 오이디푸스 단계의 어머니와 아이의 공생적 일체감을 깨드리고 자연에서 문화로, 개체에서 사회로의 이행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라캉이 상징계라 부른 일상에서의 언어행위 남성 중심적 담론에는 전 오이디푸스 단계를 대표하는 모성 여성성은 억압 배재 추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유아의 무의식 속에 이처럼 억압, 배재 추방된 전오디디푸스 단계의 어머니가 배설물이 된다고 주장한다. 허물벗기나 정화와 세척을 통한 신성의 획득이란 주제들은 바로 이러한 모성 곧 오염에 대한 거부라는 인간의 상상구조와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학자인 동시에 작가들이었기에 또한 이성의 도구, 거울이 바로 언어이므로, 문자화된 ‘언어’를 사용한 ‘글쓰기’를 그 표현법의 대표적 수단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모든 장르에 ‘몸으로 사유하기’, ‘몸으로 표현하기’의 범위까지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를 넘어선 모든 예술장르, 즉 영상화법에도 당연히 적용 가능한 것이다). 여성은 이러한 여성과 소외된 것들과의 친자성으로 에브젝시옹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성 몸에 가해지는 폭력성을 고발한다. 배설물, 성, 자학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한 가학적인 감성은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상상으로까지 뻗치기도 한다. 여성의 육체를 늙어가는 것 그대로, 아픈 것 그대로, 추한 것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기존 여성의 여성성의 신화에 반기를 들기 위해 이러한 에브젝시옹으로 문법을 설명하고 있는 셈인 터다.

이처럼 근대 이성 중심주의에 반대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몸’, ‘무의식’, ‘여성’이라는 깊이의 기하학과 심층성과 다양성의 세계, 이 세 단어 간의 친자성은 필연적 숙명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자신의 육체에 가해지는 조소와 죽음의 그림자를 증명하고 있는 것은 불순한 전복에의 욕망, 현실세계가 숨겨온 것들의 허위를 꿰뚫고 존재의 참상을 증언하겠다는 태도다. 스스로가 아버지의 가부장 사회가 내다버린 배설물이자 폐기물이 되어서 자신을 추방한 아버지들의 이성적 자본주 세계의 완전성과 신성을 모독하고, 자해하는 것으로 복수한다, 이 것이 여성주의 예술에서, 바로 이 영화에서 포르노그래피적인 성적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영화 『슬리핑뷰티』에서 그녀들이 섹슈얼리티는 매우 도발적이며 이는 타나토스와 에브젝시옹을 대면하고 마는 치욕적인 이미지들이었다. 중언이지만 영화에는 육체를 경유하는 통증과 육체에 가해지는 시련을 묘파하는 시선이 많은데 이는, 몸이 느끼는 통각으로 실존의 무게와 현실의 비루함, 여성이 처해있는 현실의 폭력성을 환기시키고 여성적 시련을 성숙의 체험으로 환치해보려 한 의도를 품은 때문이었다. 클래식 동화들 속에 저주에 걸려 기약할 수 없는 잠에 빠져있는 공주는 왕자의 키스를 받아야만 깨어날 수 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사실 여자들은 이미 선험적 생리로 자각하고 있다. 그러한 ‘환상을 위한 환상’보다는 은폐되어 있는 여성의 몸, 엡졉션, 우주의 음기(陰氣)가 내포하고 있는 강력한 힘을 여성 스스로 발견해 내재화하고 이를 스스로 발현해 강해지는 길이 오히려 희망의 길임을.

가학적 비극적이며 파괴적인 상상력과 섹슈얼리티의 파편으로 기성관념에 길들여진 대중의 의식을 불편하게 자극하는 강력한 힘. 이 같은 모든 극단에는 삶에 대한 본질을 천착하고 허위를 벗겨내려는 치열함의 미학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버려진 것들의 본질적 주체성과 꿈틀대는 생명성과 은폐되어 있던 허위를 드디어 발화한 시도, 절제된 대사, 인간본성에 대한 냉철한 응시, 울림이 있는 주제의식, ‘본질적인 여성주체와 여성성을 본질적으로 탐구해본 매우 위험하고도 파장 깊은 시도. 이러한 요소들로 본 영화는 그런 여성성의 미(美), 울울하고 서러우면서도 순결하고 미스터리한 정조의 음기와 에너지를 품고 있는 문제적인 여성영화’였다 할 수 있겠다. 여기에 작품의 의의가 있다.   

작가의 이전글 블랙 이와이 월드 속 明과 暗, 美와 悲의 양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