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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헌문학 Oct 25. 2021

블랙 이와이 월드 속 明과 暗, 美와 悲의 양면

블랙 이와이 월드 속 明과 暗, 美와 悲의 양면

 -13년 만에 돌아온 이와이 슌지 



지난 12월 ‘이와이 슌지 전작 기획전 열려


신작 <립반윙클의 신부>(2016)이 13년 만에 개봉되었다. 특유의 투명하면서도 우울한 영상으로 돌아온 감성의 아이콘, 바로 이와이 슌지 감독이다. 그의 이 신작은 2016년 하반기 자국인 일본에서보다 먼저 국내 선개봉되어 국내 팬들의 이목과 기대가 집중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2015년 12월 10일부터 20일 11일간 ‘이와이 슌지 기획전-당신이 기억하는 첫 설렘’이 극장 아트나인에서 개최(서울문화센터와 ㈜엣나인필름의 공동 주최)되었다. 

불꽃놀이 아래서 볼까? 옆에서 볼까?, 러브 레터, 피크닉,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4월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이치카와 곤 이야기, 뱀파이어,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언두... 본 기획전을 통해 전작전(全作展)에 가깝다 할 감독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상영되면서 인기작들은 매진사례를 연출하는 등 골수 팬들의 큰 호응 속에 마무리 되었다. 이번 기획전을 맞아 방한한 이와이 슌지는 12월 11일 '뱀파이어' 상영 후, 12일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상영 후 '시네톡톡'과 '테라스톡톡' 등의 관객과의 대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어 <하나와 앨리스> 이후 13년 만의 신작인 <립반윙클의 신부>의 국내 개봉으로 가을 방한한 이와이 슌지는 감독 스스로의 근황을 전하고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소외와 단절의 상처 속 출구찾기, Black Iwai World 


<러브레터(Love Letter)>(1995),<4월 이야기>(1998), <하나와 엘리스>(2004)등의 일련의 국내 인기작들을 통해 영화 팬들에게 순정만화를 연상케 하는 팬시(fancy)한 세계, 지순한 순애보, 감각적인 감성의 뮤직 비디오같은 이미지들로 요약될 신세대적인 심미적 스타일과 소녀적 감성의 대변자로 알려지기도 했던 이와이 슌지 감독. 

하지만, 거의 전작전에 가까운 이번 기획전에서도 확인되었듯 그의 작품 세계는 ‘서정적 감성 주의자 이와이 월드’와 ‘검은 이와이 월드’의 세계의 작품들로 양분된다 할 수 있다. 그 중<언두(Undo)>(1994),<스왈로우테일버터플라이(Swallowtail)>(1996),<피크닉(Picnic)>(1996), <릴리슈슈의 모든 것(All About Lily ChouChou)>(2001),<뱀파이어(Vampire)>(2011)등의 영화들은 감독의 작품활동 초기 국내 관객들에게 사랑받아 왔던 앞서의 ‘순정한(순백의?) 이와이 월드’의 대척점에서 병든 청춘들의 이상심리나 비정한 어둠의 세계를 담고 있는 컬트적 색채 짙은 실험작들이라 할 수 있다. 아웃사이더의 내면에 대한 섬세한 공감능력과 관찰력으로 달콤하고도 잔혹한 그로테스크함의 미학을 보여주는 이 ‘검은 이와이’의 영화들에는 단절과 소통, 소외의식과 상실의 코드가 일괄된 정조로 흐르고 있다. 순정멜로의 일인자로 거론되기도 했던 로맨티스트의 심연의 이면은 어떤 모습일까? 

이와이 감독의 필모그래피들 중 가장 낮은 명도를 품고 있다 할 <피크닉>, <릴리슈슈의 모든 것> 두 편의 ‘비극’을 통해 어둠의 세계로 들어선 이와이의 분신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빛의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는지, ‘검은 이와이월드’의 어둠이 표방하는 가치와 이상을 살핀다. 




‘검은 마리아’의 속죄동화 <피크닉>


종교 및 정신 병리학계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자 정신질환자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결벽적 시각에 의하면 세상은 하나의 거대감옥 혹은 정신병원이라 할 것이다. 영화 <피크닉>은 1996년 베를린 신문독자 심사위원상 수상작으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사생아라 할 만큼 그로데스크한 작품이다. 우연히 얻은 성경에서 요한계시록을 읽고 종말론을 믿어, 마치 휴거론자와 같이 세상의 종말을 신성하게 맞이하기 위해, 정신병원을 탈주해 길을 떠나는 세 명의 환자들의 이야기다. 영화의 이러한 종교적 코드는 우리시대 낭만주의자인듯 보이던 이와이 슌지의 이 실험적 단편이 원죄적 존재인 인간에 관한 염세적인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검은 우화이자 잔혹 동화임을 드러낸다. 


길 위에 깔린 핏빛장미를 짓뭉개며 검은 세단이 정신병원 앞 검은 까마귀 복장의 소녀, 코코를 두고 간다. 일찍이 미셀 푸코가 <감시와 처벌>을 통해 고발한 과도한 통제와 감시 속 권력사회의 내부구조가 풍자된 듯한 정신병동의 풍경은 엽기스럽고 억압적인 감옥의 모습이다. 그러한 무생명의 공간 안에서 만나 친구가 된 세 청춘. 천진하고 무심하게 장난질치듯 쌍둥이 동생을 살해해버린 철없는 코코.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일삼던 담임교사를 살해한 죄를 안고 성경을 읽는 것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츠므시. 그리고 과거가 제시되지 않으며 자의식이나 존재감 또한 약한 사또루. 이들은 자유 영혼 코코에 의해 담장 위로 선동되어 금지선을 넘어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영화는 1980년대 우리 영화 <바보선언>(이장호, 1984)이나<고래사냥>(배창호, 1984) 류의 로드무비와 닮은꼴을 하고 있다. 매력적인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묘한 연심과 호기심을 지닌 어리버리한 두 남자라는 멤버 구성, 정상이라는 진단에서 벗어난 이들 열외자들의 현실적 목적에 기대지 않은 이상향 여행이라는 설정은, 청춘의 열정과 상처치유라는 테마를 풀어나가기 용이한 낭만적이고도 은유적인 구도인 것이다. 백치 캐릭터 또한 이들의 천진난만한 순진성으로 병든 사회에 대한 비판적 알레고리를 극단의 장치로 전달할 수 있는 관습적 설정인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상징으로 제시된 축은 세상과의 단절과 소통을 상징하는 ‘담’이다. 이들의 행보가 시종 안과 밖, 하늘도 땅도 아닌 제3의 공간인 담장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이 담이라는 공간이 그들이 추방한 현실사회의 지리멸렬한 일상과, 이들을 벌하고 보호하려는 정신병원의 통제도 거부하고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희롱할 수 있는 상징적인 경계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찢어진 우산은 현실적 안위라는 보호막이 부재하는 그들의 실존적 상황을, 코코의 까마귀 깃털의 검은 날개옷과 두 남자의 흰색 환자복장은 길 잃은 어린 양이라는 억압된 주체,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자유영혼이라는 열외적 정체성으로의 대조적인 역할관계를 드러낸다. 죄와 처벌의 공간이 되어버린 정신병동에서 츠무시가 탐독하던 성경은 ‘순백의 신은 진정 현존하시는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떠난 탈주소풍에 배경이 되고 있는 초록넝쿨과 새파란 하늘은 절대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해방과 자유의 감각이 색채로 표현된 시각적 상징이 셈이다. 


위태한 담장 위, 담장 아래 정상인들을 조롱하듯 새처럼 유희하며 질주하는 코코는 지극히 편안한고 유쾌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살인과 감금, 처벌로 얼룩진 생의, 마지막 여행이 백치스런 천진난만함에 의해 ‘소풍’으로 화하고 있는 풍경. 이와이 슌지의 환타지에 의한 이러한 꿈같은 반전은 유머러스함과 동시에 위태한 불안과 처연한 감상을 자아낸다. ‘담’은 사회에 부적응, 추방된 그들에게 허락된 마지막 경계선이자 탈출의 해방구였기에 이 담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비정한 정상인들의 비정한 세계로 내던져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일행에서 이탈되어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필사적으로 담장 오르기를 시도하던 사토루는 피투성이로 비참하게 죽어간다. 이는 나머지 두 주인공이 여행 중 주워 소유하게 된 상징물, 코코의 인형- 구원의 가능성일 모성과, 츠무시의 권총-자기살해와 파괴의지 따위의 고유의 자아를 지켜갈 그 어떤 방어무기격의 자기가치를 획득치 못한 이방인에 대한 지상의 비정한 화답, 즉 처단이라 할 것이다. 


결국 세상의 끝이라 여겨지는 바닷가, 등대 어귀 도달한 남은 두 사람에겐 성수(聖水)의 메타포일 소나기가 세례인 듯 내려준다. 빛으로 물든 황혼의(세기 말) 바다-자연 앞에서 죄를 고해해 씻어내고 최후의 만찬(도시락 마임)과 키스를 나누며 서로 간에 용서를 시도하는 코코와 츠무시. 그들만의 유치하지만 진지한 ‘회개의식’ 뒤에도 태양을 향해 총을 쏘아보아도 지구멸망은 도래할 리 없고 세상은 늘 그래왔듯 침묵할 뿐이다. 이에 앞서의 버려진 인형의 주인으로 상징되던 ‘검은 모성’의 코코는 츠무시 권총을 뺏어 마지막 한 발을 자신에게 쏘아버린다. 이로써 코코는 영원한 자유를, 츠무지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또 다른 형태의 진정한 세상의 종말을 맞게 된다. 코코의 이러한 돌연한 자살행위는 ‘천국은 심심할 듯 해 지옥이 좋다’라던 아웃사이더의 발칙, 발랄한 천국행 거부이거나 ‘자신의 죽음이 곧 세상의 종말’이라 말하던 이가 세상 끝에서 자유롭게 비상하려는 ‘자기파괴 권리’라는 자유의지를 실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또 ‘네가 지은 죄, 내가 씻어주겠다’고 말하던 그녀의 발언이 시사하듯 사랑하는 이의 지구멸망이라는 기대를 실현해주려 스스로를 회개의식에 제물로 바친 희생의 대속(代贖)행위일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여행 도중 만났던 사제가 그녀를 까만 천사라 명명하고, 그녀 스스로 자신을 예수라 주장하던 장난스런 에피소드를 의미심장한 복선으로 상기하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녀가 검은 까마귀 복장에 집착하던 것은 ‘검은 마리아’로서의 죄에 대한 자의식 혹은 죽음의 집행자라는 자기정체성에 기인한 행위다. 이렇게 자유를 추구하던 그녀의 마녀성과 타나토스라는 검은 운명을 상징하던 ‘검은 드레스’는 마지막 희생-속죄 혹은 비상의 죽음 후에야 비로소 최초 최후의 날갯짓으로 흩날려 그녀에게서 벗겨져지게 된다. 살인과 처벌 감금, 죄의식이라는 현실에 반항해 ‘오즈의 노란 길’처럼 소외와 단절, 자유의 상징인 담 위를 따라 떠났던 소풍은 ‘성경’, ‘지구멸망’, ‘버려진 인형’, ‘권총’, ‘바다’, ‘지구최후의 비’ 등의 ‘대속행위’라는 종교적 코드에 따른 속죄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또 다른 이름일 이 개벽-종말을 찾아 떠났던 이 피크닉의 끝은 결국 죽음이었고, 바로 이 죽음만이 이들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찬란하고 풍성한 감성

채팅 창 속 콜필드* 결벽한 예술로의 도피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슌지 감독의 2001년 작품 <릴리슈슈의 모든 것>, 영화는 페도필리아(Pedophilia, 아동성애증자) 환자라는 혐의를 받아온 감독의 주 종목인 일련의 10대 학원물 중에서도 최고 수작인 동시에 최고의 암흑 극으로 평가받는 아린 사춘의 영상 비망록이다. 

영화는 현대의 일본을 사는 14살 중학생의 시각에서 소년의 눈에 비친 맹목적인 이지메, 학원폭력, 원조교제, 히끼코모리, 오따쿠 문화 등으로 얼룩진 일본 청소년의 병든 자화상과 고 안에서의 좌절과 고통을 감독 특유의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스타일로 그리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농촌 소읍의 중학교의 학원생활. 휴가여행지에서 동행의 죽음을 목격한 뒤 동기들을 괴롭히는 학교 일진으로 돌변해버린 호시노. 호시노의 폭력과 사주에 의해 원조교제를 강요받는 여 동기 츠다에게 돈을 수금해오고, 짝사랑하는 쿠노가 강간당하는 것까지 방관해야만 했던 내성적인 소년 유이치, 이 모든 지독한 이지메와 외압을 견뎌내는 피아노 치는 소녀 쿠노. 영화의 비극적 내러티브의 절정은 쿠노가 빈 공장부지에서 동기들에게 강간당하던 장면이라 할 것이다. 이 목불식견의 장면엔 드뷔시 선율과 사방으로 깃털이 흩날리는 모습이 덧입혀지는데 이처럼 영화는 시종 투명한 농촌의 자연풍광과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아이들의 섬뜩한 분노와 슬픔, 불안과 열패감을 풀어놓아 불협화음을 조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의 이율배반적인 낯설게 하기 식의 영화문법은 시린 성장통에 관한 더 큰 공명의 충격과 감정의 파문을 일으켜 ‘푸른 것은 아름답다. 멍은 푸르다. 그러므로 멍든 것은 늘 아름답다.’(김승희 作 ‘시계풀의 편지‘)라는 시적 모순명제의 정당성을 수긍케 한다. 


‘인간에 있어서 최대 마음의 상처는 존재’, ‘에테르에 의해 아픔은 치유된다’-투고자 필리어. 


그렇다면 이처럼 질식될 득한 암흑의 터널에 갇힌 아이들이 빛을 향해 나아가는 길 찾기의 방식은 무엇인가? 앞서의 <피크닉>의 구원여행이 속죄와 죽음을 통한 진정한 자유획득이라는 종교적 코드에 의거하고 있었다면, 정신병동과도 유사한 부조리한 힘의 횡포가 존재하는 유폐된 학원생활 속<릴리>의 아이들은 이상화된 Star-예술성 갖춘 대중문화-음악에 탐닉하고 의존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이들 신세대들은 이젠 아예 현실이 아닌, 가상의 존재와 가상공간에서 정신적인 위안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갈래 구원찾기의 행보는 모두 아웃사이더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유사성을 지닌다. 


프로그레시브 혹은 애시드 팝쯤으로 표현될, 진보적이고 몽환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가상의 사이버 가수 릴리슈슈와 릴리슈슈가 전파하는 에테르에 열광하는 아이들. ‘순수한 영혼의 결정’을 뜻하는 ‘에테르(ether)’란 이데아, 카타르시스(정화), 아우라 혹은 미학, 에너지, 기 따위와도 동음이의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음악의 본질에 관한 은유이기도 한다. 절망과 통증의 감각을 ‘에테르’로 승화시킨 노래들로 릴리슈슈가 포교하는 정신적인 이상(理想)에 아이들은 사춘기적 결벽(潔癖)으로 천착한다. 음악(예술) 탐닉으로 전염되어진 ‘에테르’는 뮤직테라피로 기능하여 유예된 사춘의 터널에서 자아를 지켜내는 의지와 상처를 위무하는 힘이 되어준다. '음악’, 즉 ‘예술’이 일종의 종교가 되고 있는 경지인 것이다. 


영화 속 이 사춘기 소년 소녀들은 릴리 팬클럽 사이트 안에 자신들만의 이상향을 구축해 그 안에 고치를 지은 채 동일한 이상을 지닌 이들과 에테르를 갈구하는 채팅을 나누며 지옥이 되어버린 학교와 소외된 가정이라는 현실의 통증을 잊는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사이버 아지트를 통한 소통과 구원의 길찾기’라는 빙식은 영화 속에선 사실 병리적 성격을 띄고 있다 해야 한다. 고독한 청춘들의 내면풍경이 시종 컴퓨터 스크린에 시적 경구처럼 떠오를 때, 현실 속 아이들이 폭력을 가하고 당하는 현실의 모습이 교차 편집된다. 이로써 관객들은 이 사이버 릴리공화국 결곡한 동맹군인 릴리 팬클럽 멤버들이 사실은 현실 속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사실을 짐작케 된다. 이러한 충격적인 진실은 현실에서는 소통불능으로 고립된 채 서로를 증오하는 존재들이 사이버세상의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만 내면을 고백하려는 ‘군중 속 고독자’의 익명의 삶의 병폐를 극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자면 분열된 자아의 퇴행심리, 인격적 결함에 가까운 것이다.


릴리에로의 도피로도, 원조교제를 강요당하던 츠다는 끝내는 투신자살하고 쿠노는 아름다운 외모를 스스로 파괴하는 것으로 외압들에 대항해낸다. 그리고 이 모든 악의 중심에서 비극을 주도한 일진 짱이자 릴리 팬클럽 아이디 푸른 고양이였던 호시노는 릴리슈슈 콘서트 장에서 팬클럽 주인이자 그의 하수인이였던 유이치에 의해 완전범죄형태로 살해된다. 폭력과 소외라는 비정한 통과의례의 터널에서 저마다 ‘단절’의 상징일 (‘담장’이 아닌) ‘헤드폰’을 끼고 드넓은 들판 속 음악으로 고통을 아우르고 또 음미하며 자신만의 절대고독 속으로 침잠해버리려는 아이들. 그렇게 14살은 흘러간다. 영화는 이렇게 소통불능과 단절, 불가피한 실존적 고독, 사춘의 성장통을 영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비참함 속에 구원 찾기의 수단이 되어 빛을 비춰주는 예술에의 본질과 그 기능에 관해 말한다. 또한 인간의 이중성과 악마성, 악을 악으로 처단한다는 명제의 정당성, 타락과 순수라는 윤리적인 물음과 ‘소통불능의 시대, 인터넷은 과연 단절된 인류의 집단 고독병을 치유해줄 희망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디지털 문화에 관한 화두 또한 복합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소년, 소녀로 존재한다는 것. 아직은 순수하고 예민하기에 삶의 부조리에 처절히 아파할 수 있다. 가장 여리고 시린 사춘의 감성은 가장 맑은 에테르- ‘구원’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청춘들은 끊임없이 또 다른 릴리의 에테르 속에서 소통과 위안, 승화의 길을 찾는다.



明과 暗, 悲와 美의 쌍생아적 공존과 성숙 


아시아권 팬들에게 동시대적 감성의 대변자이자 소녀들의 감성의 대변자로 추앙받아온 이와이의 슌지 감독. 그의 페르소나 격인 첫사랑의 설렘에 빠져있던 소녀들은 이제 위 두 편의 ‘검은 이와이’ 월드에선 검은 까마귀 옷을 입었고, 이지메를 당하며 고통 받고 있다. 이렇게 어두운 이와이 월드는 빛의 이면엔 그림자가 존재하며 빛이란 어둠이 존재할 때 그 존재 자체가 성립될 수 있고 그 것이 존재론적 진실명제임을 깨닫도록 한다. 모든 개체에 그리고 또 이와이 자신의 내면에 ‘빛과 어둠’은 실존적 쌍생아인 것이다. 이렇게 팬시한 빛의 세계에 어둠을 수용해 빛과 어둠을 조화해냄으로써 사춘기 성장단계에 고착되어 있는 몽상가로 인식되었던 이와이의 순진한 영화세계는 구원과 성숙으로 한 발 다가가 ‘아이’가 아닌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검은 이와이'의 대표작인 <피크닉>과 <릴리슈슈의 모든 것>은 1990년대 이후 일본사회를 축소 ‘엽기적 잔혹성’을 지닌 일본의 정체성을 고발하는 일종의 통렬한 자기고백이자 병든 사회에의 알레고리가 된다. 이러한 검은 이와이의 염세적인 세계관은 세기말의 허무주의에의 영향도 한 몫한다.


평소 이와이는 ‘자신에겐 꿈과 현실에의 구분이 없다’고 밝혀온 바 있다. 그런 감독은 일상에서 탈주하려는 욕망으로 현실과는 거리가 먼 환상세계 혹은 파국의 염세적인 세계로 자주 도피하곤 하는 것을 택한다. 이러한 꿈과 환상에 대한 모호한 경계의식을 지닌 감독의 환타지는 음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독히 낭만적이기도 하다. 일상이 환타지화 되고 현실과 환상이 교직되는 혼성적 구성의 반리얼리즘적인 자세는 그의 영화의 대중적 어필요소이기도 하지만 또한 최후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위의 <피크닉>과 <릴리슈의 모든 것>에서도 이러한 낭만성은 한계점으로 작용하고도 있는 듯 보인다. 상처 입은 영혼들의 구원찾기라는 서사 속 그 답으로 제시되고 있는 ‘종교성’과 ‘예술미학’이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영화에서는 그로테스함과 일렉트로닉의 신비성(환타지)이라는 특유의 탐미적인 환상성으로 미적으로만 치장해 놓았다는 회의가 드는 것이다. 두 영화는 결국엔 문제적 인물이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비극적 길 찾기는 마무리 짖는다. ‘단절의 상처치유를 위한 소통으로의 구원 찾기’라는 두 갈래의 여정에서 자살과 살인이라는 ‘죽음’의 형식만이 최종, 최선의 방식이었는가 하는 물음에도 물음표가 남는다. 두 영화를 비롯해 그의 많은 작품들 속 비극을 환상적으로 채색하려는 마지막 순간의 감상주의적 자세는 어쩔 수 없는 ‘만화적 몽상가’ 이와이의 한계점인 듯 하다. 


그러나 또 역시 분명한 것은 흰 이와이 이든 검은 이와이든 그의 영화세계는 종국엔 분명 ‘사랑의 가치’를 호소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대속 소풍이든 에티르에의 중독이든 병든 영혼의 어둠 속 희망 찾기는 실은 상처 입은 영혼만이 품을 수 있는 진정성 지닌 사랑(츠무시와 코코, 유쿠노와 유이치)이 그 동력이 되고 있다. 그의 영화엔 뛰어난 관찰력과 섬세한 감성으로 포착한 인간에의 연민과 정제된 비애가 잔잔한 파문 가운데 몽환적인 이미지 속에 깔려있다. 그리고 이것은 ‘검은 이와이 월드’에 새어든 미광이 되어 슬픔을 아름답게 한다. 바로 이 점에 섬세한 로맨티스트 이와이 슌지의 검고도 흰, 슬프고도 아름다운 양면적 영화미학이 있다. 

<하나와 앨리스> 이후 국내 선개봉을 앞두고 있는 신작 <립반윙클의 신부>(2016) 또한 특유의 여리고도 우울한 감성이 짙게 배인 작품으로 예고된 바, 투명함 혹은 블랙의 극단일지 그레이의 배합된 색채일지 여러모로 연륜이 쌓인 그의 작품색의 심화에 기대를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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