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저녁 무렵이면 오랜 나무들의 숲.
보이지 않는 뿌리들의 가지들로부터 울려나오는 노래가 있다.
고요한 것들 속에는 텅 비어 울리는 소리가 있다.
그 때마다 엄습하며 내 무릎을 꺾는 흑백의 시간.
이것이 회한이라는 것인지. 산다는 것은 이렇게도 흔들리는 것인가
시인 박남준 씨가 데이비드 달링의 음악에서 영감을 얻고 썼다는
시 <저녁 무렵에 오는 첼로>의 한 구절입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지요. 사물 깊은 곳에 존재의 노래가 들리시나요.
시인은 만물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이런 저녁 무렵이면 고요한 가운데 저 마다의 뿌리서부터 울려나오는 어떤 소리들이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귀가 뜨인 시인의 귀를 지니게 되면 세상은 온통 그윽한 음정으로 차오를 수 있겠죠.
그렇게요. 우리 일상으로 재미있는 소리나 음악들이 내가 서 있는 곳의 배경인 듯 공기인 듯 흐르고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흘러나오는 BGM처럼 말이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 하루하루는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곱게 채색되고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세탁물의 재질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섬유유연제라는 게 있죠.
그러고 보면 음악이란 건 현실의 메마르고 거친 결을 비단 결처럼 부드럽게 해주는
그런 '삶의 유연제'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억제해둔 감정과 맺혀있는 응어리 따위는 음악에 내장돼있는 자정작용,
넋과 멜로디의 화학반응으로
맘껏, 양껏 모조리 풀어내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