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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헌문학 Oct 27. 2024

‘나 하나 먼저, 보살행 풀무질

                 나 하나 먼저 미소

   홍익 사회를 위한  풀무질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내가 올곧게 살아갈 수 있었겠나흥분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닌 술이 웬수다     

세상에 화가 날 법도 한 요즘, 안 그래도 이런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제가 짤막한 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게요.     

칠흑 같은 한밤에 폭풍우를 만나서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서 집으로 향하는 뱃사공이 있었지요. 이때 사공 아버지 곁에 꼭 붙어있던 어린 딸은 계속 궁금합니다. 

'금세 위로 떠올랐다가 이내 또 물밑으로 가라앉는 저 바보 같은 작은 불빛은 도대체 뭘까?'라는 것이요. 고단한 여정 끄끝내 무사히 뭍에 도착했다지요. 

날이 밝고 아이는 못내 궁금하여 그 불빛의 정체를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어젯밤 춤추던 그 불빛은요 바로, 저 멀리 켜져 있던 등댓불이었다네요. 사나운 파도로 심히 요동치던 가판 위에선 등댓불이 마구 흔들려 보였던 거죠.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유럽 기행>에 나오는 일화인데요. 괴테는 이 책에서 이 사공 딸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현재 나의 노정 역시 격렬하게 요동하는 대양에서 항구를 향해 노 저어가는 길과 같다. 이 항해의 길에 등대 불빛이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맑은 정신으로 그 불빛을 꿋꿋이 주시해 따라가기만 한다면 결국에는 목표했던 해안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으리라" 라고요.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떤가요?      

신문을 장식하는 이야기들은 ‘니캉 내캉’, ‘요란법석’ 요지경 속 시끄럽고 암울합니다. 우리네 서민들의 살림살이지수도, 뉴스에서 들려오는 정치계 풍경이나 사회 정세도, 정의의 입상까지도 북쪽 겨울 미세먼지로 가득 찬 찌뿌듯한 하늘의 파란 빛깔만큼이나 그리 쾌청해 보이지만은 않는데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 답답함만 커져갑니다. 해답일 등대는 그러니까, 우리가 걸어가야 할 '원리와 정도'라는 건 언제나 같은 자리에 빛 밝힌 지표로 굳건히 버텨주고 있는 거고 지축 없이 마구 흔들리는 건 단지 우리 마음결의 어수선함. 바로 그것일 따름이라는 게 아닐는지요.      

자, 몸가짐부터 정비해 보지요. 마음속 나침판의 지남철 바늘을 바르게 고정을 해봐요. 심안의 반사경도 닦아내고요. 우리는 매일 밥을 먹습니다.     

고픈 밥통을 위해 삼시 세끼 밥을 먹듯이 녹슬어가는 마음 결에 풀무질이란 매일의 과제일 겁니다. 독서나 명상, 운동, 여행은 물론이고 그에 더해 건실한 관계를 위한 노력, 깊이 있는 소통, 의미 있는 나눔 같은 것들이 마음의 풀무질 작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법이기에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요. 어떤가요.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이웃 분, 회사 내 타 부서 사원들, 나와 가까워지고 싶은 듯한 눈치이던 혹은 서먹서먹 해져버린 그 사람과의 관계. 예전엔 그 존재감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시나브로 시야에 사방 걸려드는 우리 주변에 공기와도 같은 사람들….      

아무리 코로나 정국이라 한들 사람은 혼자는 살 수 없는 것을, 옆 사람과 조금만 더 부드러운 자애의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싶은데요. 솔직히 지쳐갑니다. 마스크는, 지긋지긋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럼, 짜증스러운 찡그린 얼굴을 하고 계신가요? 나 스스로의 모습은 어떨까요     

행여나 나의 호의와 봉사, 희생을 몰라주고 되레 무례한 반응으로 응수해온다 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이 무뚝뚝하거나 불친절할지라도 그런데도요. 뭐….  좀 밑지는 셈 치고 내가 먼저 웃어주는 건 어떨른지요.

다정도 병이라고 하냥 사람 좋기만 사람을 어떤 이들은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기도 하고 그런다죠. 하지만요. 하지만 '열린 마음'으로 행하는 양보와 미소, 인간애적 행동이야말로 자비심을 획득한,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맑게 웃는 얼굴을 최상의 덕의 보시로 친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실은 이런 미련한 듯, 속 깊은 '일상의 성자들'도 해서 이 세상이 살아볼 만한, 살기 좋은 온기 서린 곳으로 유지되는 것일 거라고, 저는 그리 믿어요. 산림 우거진 숲의 울울한 바람의 춤 닮은 청량한 등목물 한 바가지 느낌의 기분 좋은 미소 자주 지어보는 거. 그게 ‘일상에 성자되는 법’ 아닐는지요.     

바야흐로 지금은 전지구에 창궐한 바이러스로 지구인들이 점점 더 외롭게 분자화 되어버린 시절. 대화도 외침도 금지되어 달팽이 집 같은 사이버세계의 자기애의 갑옷을 둘러쓰고 진정한 소통을 시도하기를 주저해 한다.      

그렇다면 생명들은,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소통 가능한 걸까? 어떻게 소통해야 하나요? 소통이 가능하기는 하다는 걸까요?     

이런 질문 앞에서는 뾰족한 해답은 아니지만, 도미니크 밀러의 일화를 떠올려보곤 합니다. 영국 그룹 '스팅'의 전 기타리스트 도미니크 밀러는 크로스 오버 앨범작업 과정 중에요, 바흐를 알게 되고 연주하게 되면서 "난생 처음 사랑에 빠진 듯한 기분이었다" 고 했다고 하지요. 

영원한 음악의 어머니 바하. 그의 음악들은 몇백 년 전 음악이어도 후대의 우리들에게 깊은 공감을 끌어내잖아요.     

클래식 고전뿐만이 아니죠. 시간이 흘러도 언어는 달라도 시간과 공간, 장르와 언어를 초월해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반가운 멜로디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제각기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많은 이들이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다같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가슴 떨려 한다는 거. 어떨 땐 끝내 눈망울에 물기까지 맺혀버리게 하고 ‘진짜 끝내주게’ 꼴딱, 숨죽게도 한다는 거. 

사람들 영혼에게 말을 걸며 깊은 인상을 남기는 대상들이 지닌 공통의 아름다움. 그러한 감히 말하자면 초월적인 미감. 그런 거 보면 알 수 있죠.     

'그 많은 생명들을 한 마음으로 '통정'할 수 있게 하는 어떤 '마음의 공통언어'이라는 게 있구나'라는 걸요. 그 힘에 이름 붙이자면 아마도'진실, 혹은 진정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진실은 결국엔 상대의 마음까지 전해집니다. 그게 음악이든 백지 편지 한 통이든. 알아들을 수 없는 꼬부랑말이든, 일상 속 말 한마디. 가만히 흘려보낸 따스한 눈빛 한줄기로든 말이지요.     

세상은 기운으로 이루어졌고 기운의 흐름도를 축으로 세상이라는 바퀴는 돌아가는 것이기에, '진실'이란 결국엔 피가 흐르고 맥박 뛰는 인간의 심장으로 파고들어 상대의 얼까지 움직이게끔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잊기 힘든 황홀한 순간의 교신으로 기억의 지층에 화석화되어 오래 박혀있게도 되죠.

'진실' , '진정성' 이라는 가치만이 참되이 빛나며 끝내 살아남을 불멸의 생명성 지닌 존재이고 값진 의미일 겁니다.      

가히 춥디추운 나날, 모두가 힘들다고 해서 나까지 세상에 잔뜩 화가 나서 권력이 아닌 우리 이웃들에게 절망의 에너지를 품어 기싸움을 하며 썰렁한 세상 만들기에 일조할 필요 있을까요? 우리는 실상 마음 깊은 데에서는 누군가로부터의 따스함, 달콤함 감동적인 생명력을 전해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이제 바라는 것은 내가 ‘먼저 하면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상대에게 먼저 해준다면 본인의 요구사항을 얻어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급속도로 커진다고 하네요. 넘 뻔하게 지당한 논리인가요? 그렇다면 해보면 되겠네요.  

순정한 마음으로, 마스크로 가려져 잘은 알아보기 힘들다 하여도, 약간만 더 온화한 표정으로, 짜증이 아닌 생산적 건설로 미소라는 공덕을 짖고, 진실된 우애의 기운들을 발산한다면 정전기가 일어대는 요즈음의 삭막한 세상의 결은, 뭔가 좀 더 부드럽고 살갑게 따사로운 살 맛 나는 세상이 될지 모릅니다. 나 하나 바꿘다고 세상도 바뀐다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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