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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EOUL 협객

노욕(老慾)의 석파정 vs 무소유(無所有)의 길상사

삶의 궤적으로 읽히는 공간

by 까칠한 꾸꾸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역사의 기억과 그 속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공간에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인물들의 스토리가 더해지면 영화를 보듯 빠져들게 된다. 서울은 1392년 조선건국부터 지금까지 7백여 년 동안 수많은 번영과 갈등의 역사적 사건 중심지이다.


서울에서도 특히 나는 '부암동'을 좋아한다.

언젠가 한번 살아보고 싶은 동네여서 날씨 좋은 평일에 뜻밖의 휴가가 생기면, 작은 배낭을 둘러매고 북악산 자락 둘레길을 걷는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한양도성길 1코스>이다.


북악산 둘레길과 인근 볼만한 곳

보통은 창의문(윤동주 문학관)에서 시작되는 긴 돌계단으로 북악산을 올라 능선을 타고 걷다가 와룡공원에서 갈라지는 길에서 하산을 한다.


북쪽으로 나서면, 만해 한용운 선생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지 않으려고 북향집을 짓고 말년을 보내신 <심우장>이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자리 잡고 있고,


성북동 고급주택가와 대사관저 사이에 작은 계곡을 품은 <길상사>가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여기가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단정하고 고요한 절 집이다.


길상사는 소설 같은 이야기로 유명하다. 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기생이며, 제3공화국 시절 고급 요정인 '대원각'의 주인이던 진향(김영한)은 법정스님의 수필 [무소유]에 감명을 받아 당시 1천억 규모이던 지금의 길상사가 있는 7천 평 대지 등 전재산을 시주한다.


그 결과 1972년 12월 법정 스님은 절을 창간하였고, 김영한의 법명인 길상화에서 <길상사>라고 명명했다.

또, 개원법회 축사는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맡으셨다.


그리고, 2010년까지 머무시다 이곳에서 입적하셨다. 길상사 가장 깊고 한적한 곳에는 소소한 유품(작은 나무의자, 돋보기, 법복 한벌..)과 자취가 남아 있다. 당시 큰 어른의 부고에 사람들이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 만해 한용운의 <오세요> 중 -


(1)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 비하여 주기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법정 박재철의 두 가지 유언 중 -

혹시, 창의문 쪽 높은 계단을 오르기가 힘이 드신다면.. 반대방향에서 둘레길 탐험을 시작해도 좋다. 창의문 쪽으로 북악산을 내려오면서 마주 할 경치도 환상적이다


오전에 북악산을 넘어 정오쯤 창의문 쪽으로 내려와서, '자하손만두' 등에서 식사를 하고 <석파정 서울미술관> 14:00 도슨트 프로그램에도 참여해 보시기를 권한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호 '석파'에서 유래하였는데, 미술전시관과 봄가을 절경으로 유명한 석파정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매우 독창적 문화공간이다.


특히 봄가을 경관은 매우 뛰어나다. 색다른 현대미술 전시만으로도 가볼 만한 미술관인데, 구불구불 이어진 잘 다듬어진 석파정 정원을 산책하거나 띄엄띄엄 놓인 벤치에서 여유를 부려 보는 것까지 가능하다.


원래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홍근의 별서였는데 , 흥선대원군이 탐을 내어 고종 즉위 후 왕을 행차하도록 하였고, 임금이 머문 장소에 신하가 머물 수 없다는 조선 시다의 관례를 들어 빼앗아 개인 사저로 활용했다.




만해 선생님의 심우장과 법정스님의 진영각은 여러 번 찾아도 참 좋다. 인생 전체를 통해 보여주고, 없던 듯이 떠나신 자리와 강직하고 소박한 삶의 궤적 때문일까?


단정한 글씨와 시, 그리고 유언..

남겨진 그 작고 소박한 공간들은 항상 큰 울림을 준다.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미안함이 넘쳐난다


하지만 멋지고 세련된 풍광과 잘 다듬어진 화려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의 석파정에서는 그만한 '감동'과 '울림'을 얻기 어렵다. 욕망과 속임수로 이룬 성취에 허탈감이 느껴진다.


누구나 헤어짐의 때는 오고야 만다. 그리고 '그냥'은 없다. 떠나고 남겨진 공간은 살다 간 사람들의 삶으로 기억된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곳을 걷고 있다.

공간은 사람을 담고, 그 사람을 닮는다.
긴 시간을 지나 남겨진 공간은
오롯이 그 사람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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