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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꾸꾸 Nov 13. 2023

노욕(老慾)의 석파정 vs 무소유(無所有)의 길상사

삶의 궤적으로 읽히는 공간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역사의 기억과 그 속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공간에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인물들의 스토리가 더해지면 영화를 보듯 빠져들게 된다. 서울은 1392년 조선건국부터 지금까지 7백여 년 동안 수많은 번영과 갈등의 역사적 사건 중심지이다.


서울에서도  나는 '부암동'을 좋아한다. 

언젠가 한번 살아보고 싶은 동네여서 날씨 좋은 평일에 뜻밖의 휴가가 생기면, 작은 배낭을 둘러매고 북악산 자락 둘레길을 걷는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한양도성길 1코스>이다.


북악산 둘레길과 인근 볼만한 곳

보통은 창의문(윤동주 문학관)에서 시작되는  돌계단으로 북악산을 올라 능선을 타고 걷다가  와룡공원에서 갈라지는 길에서 하산을 한다.


북쪽으로 나서면, 만해 한용운 선생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지 않으려고 북향집을 짓고 말년을 보내신 <심우장>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자리 잡고 있고,


성북동 고급주택가와 대사관저 사이에 작은 계곡을 품은 <길상사>가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여기가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단정하고 고요한 절 집이다.


길상사는 소설 같은 이야기로 유명하다. 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기생이며, 제3공화국 시절 고급 요정인 '대원각'의 주인이던 진향(김영한)은 법정스님의 수필 [무소유]에 감명을 받아 당시 1천억 규모이던 지금의 길상사가 있는 7천 평 대지 등 전재산을 시주한다.


그 결과 1972년 12월 법정 스님은 절을 창간하였고, 김영한의 법명인 길상화에서 <길상사>라고 명명했다.

또, 개원법회 축사는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맡으셨다.


그리고, 2010년까지 머무시다 이곳에서 입적하셨다. 길상사 가장 깊고 한적한 곳에는 소소한 유품(작은 나무의자, 돋보기, 법복 한벌..)과 자취가 남아 있다. 당시 큰 어른의 부고에 사람들이 슬퍼했던 기억이 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 만해 한용운의 <오세요> 중 -


(1)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 비하여 주기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법정 박재철의 두 가지 유언 중 -

, 창의문 쪽 높은 계단을 오르기가 힘이 드신다면.. 반대방향에서 둘레길 탐험을 시작해도 좋다. 창의문 쪽으로 북악산을 내려오면서 마주 할 경치도 환상적이다


오전에 북악산을 넘어 정오쯤 창의문 쪽으로 내려와서, '자하손만두' 등에서 식사를 하고 <석파정 서울미술관> 14:00 도슨트 프로그램에도 참여해 보시기를 권한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호 '석파'에서 유래하였는데, 미술전시관과 봄가을 절경으로 유명한 석파정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매우 독창적 문화공간이다. 


특히 봄가을 경관은 매우 뛰어나다. 색다른 현대미술 전시만으로도 가볼 만한 미술관인데, 구불구불 이어진 잘 다듬어진 석파정 정원을 산책하거나 띄엄띄엄 놓인 벤치에서 여유를 부려 보는 것까지 가능하다.


원래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홍근의 별서였는데 , 흥선대원군이 탐을 내어 고종 즉위 후 왕을 행차하도록 하였, 임금이 머문 장소에 신하가 머물 수 없다는 조선 시다의 관례를 들어 빼앗아 개인 사저로 활용했다.




만해 선생님의 심우장과 법정스님의 진영각은 여러 번 찾아도 다. 인생 전체를 통해 보여주고, 없던 듯이 떠나신 자리와 강직하고 소박한 삶의 궤적 때문일까?


단정한 글씨와 시, 그리고 유언..

남겨진 작고 소박한 공간들은 항상 큰 울림을 준다.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미안함이 넘쳐난다


하지만 멋지고 세련된 풍광과 잘 다듬어진 화려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의 석파정에서는 그만한 '감동'과 '울림'을 얻기 어렵다. 욕망과 속임수로 이룬 성취에 허탈감이 느껴진다.


누구나 헤어짐의 때는 오고야 만다. 그리고 '그냥'은 없다. 떠나고 남겨진 공간은 살다 간 사람들의 삶으로 기억된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곳을 걷고 있다.

공간은 사람을 담고, 그 사람을 닮는다.
긴 시간을 지나 남겨진 공간은
오롯이 그 사람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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