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어려운 주제
비염이 있지만 내 코는 민감하다. 아니, 하도 민감해서 비염으로 보호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덕분에 아주 작은 입자의 냄새도 맡을 수 있어 신기했고, 동시에 괴로웠다. 빵집의 갓 구운 빵 냄새는 몸을 붕 뜨게 만들었다. 집이 1층이라 가끔 나는 하수구 냄새는 늘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냄새는 기억을 오래 붙잡는다. 잠시 코끝에 스치는 향이, 묘하게 그 시절의 기분과 장면까지 되살리곤 한다. 아, 이거! 이 냄새! 그때 맡았던 향과 똑같아. 내가 대학생 시절이었던가...
나처럼 예민한 사람들은 ‘계절 냄새’를 맡을 수도 있었다. 여름이면 습도 높은 흙냄새가, 겨울이면 마른 장작의 알싸한 냄새가 풍긴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경험,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셋째 주 글쓰기 주제는 ‘냄새’로 잡았다.
[여름에 나는 냄새]
찝찝하게 달라붙던 아스팔트 냄새, 비가 내리면 훅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 흘러내리는 복숭아 과즙의 달콤한 냄새, 새로운 휴양지에서 맞는 그곳만의 낯선 냄새, 그리고 선선한 바닷가의 냄새...
개인마다 느끼는 특유의 ‘여름 냄새’가 있을 것이다. 나에겐 상기했듯 집 근처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하수구 냄새가 바로 여름이다. 쿰쿰하고 기분 나쁜 향이 올라오면 그제야 ‘아, 이제 여름이구나!’싶은 것이다.
월요일 오전 10시, 회원분들께 글쓰기 주제를 안내했다. 예시를 많이 제시해 놓았으니 이번 주는 글쓰기가 쉽겠지? 다들 어떤 여름 냄새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올라오는 글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글은 생각만큼 빨리 업로드되지 않았다. 그때 한 회원분이 알려주셨다.
-여름 냄새라니,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뭘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다른 의미의 난관에 봉착했다. 나에게는 너무 쉬운 주제가 다른 사람에게는 손댈 수 없는 것으로 변해있었다.
-음... 각 잡고 쓰지 말고 정말 아무거나 뽑아내 보세요. 저는 여름, 하면 하수구 냄새가 생각나거든요? 또는 수박 향도 좋고, 여름에 바르는 화장품 냄새도 있잖아요.
나는 ‘아무거나 뽑아내 쓰기’가 쉽지 않은 회원들에게 아무 말이나 쏟아버렸다. 글을 써본 경험이 아주 많은 경우가 아니고서는 일단 첫 줄 뽑아내는 것부터가 높은 허들이었다. 그냥 진짜 아무렇게나 써보면 되는데. 어렵지 않은데. 회원분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모임 운영자라니!
어찌어찌 설명을 구체적으로 해드린 뒤, 시간이 흘러 하나씩 글이 업로드되었다. 글들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 모임을 운영하는 목적 또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해야 했다. 지금의 내 상태는 “글쓰기가 이렇게 쉬운데, 왜 안 해? 한 번 써봐.”였다. 유창하게는 쓰지만 잘 쓰는지는 모르겠다. 아직 출간한 책도 없는 상태다. 그렇기에 이 모임에서 나는 회원분들의 글을 ‘감정적으로’ 피드백해드린다. 교정 교열 및 윤문은 내가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평가 없는 글쓰기를 하며 쓰는 건 이렇게 재밌구나. 써보니 이런 것들을 알게 되는구나. 또 써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을 글쓰기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런데 의외의 주제로 허들을 높여버린 느낌이 들었다.
목요일이 되어 읽었던 글을 다시 꼼꼼히 읽으며 피드백을 했다. 많은 분들이 주제에 대해 고민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제는 ‘여름 냄새’인데 글의 주 내용은 그냥 ‘냄새’였기 때문이다.
-너무 어렵다 느껴지시면 ‘여름’을 빼고, ‘냄새’와 관련된 기억을 써보세요.
나의 추가 안내에 힘입어 여름과 딱히 관계없는 냄새들이 글 곳곳에 있었다. 거기엔 고양이 발바닥 젤리의 꼬스름한 냄새에 격동의 80년대, 최루탄 냄새까지 포함되었다. ‘여름’을 빼버리자 글의 범위가 아주 넓어졌다. 그만큼 관련된 기억을 꺼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는 얘기다.
-‘여름 냄새’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막막했다'
-‘이건 여름 냄새가 아니지만...’
한참을 고민하며 망설인 흔적들이 보였다.
가끔은 곤란한 주제로 글을 써보는 것은 좋은 훈련이 된다. 특히 이 모임을 만들면서, 사람들이 자주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를 만들려 노력했다. 그 경험에서 색다른 감정과 기억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 주제를 받아 들고 많이들 고민하셨겠구나. 읽은 글들에 정성껏 답글을 썼다.
앞으로 글의 주제를 정할 땐 지금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너무 추상적이어도 안된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흔한 주제 역시 별로다. 참신하고 색다르면서도 들었을 때 ‘아! 난 이것에 대해 써봐야지!’하며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솟아오르게 만드는 주제.
모든 글의 피드백을 마무리하며 책장에 꽂힌 ‘여름’ 관련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유명 작가들은 어떤 여름을 그렸을까. 작가가 아닌 나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조금이라도 빌려보려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