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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 Jan 31. 2020

15년 만에 이해한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로 더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30세대라면 이 영화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판타지 시리즈에 많이 등장하는 유럽풍의 도시로, 마법사나 저주가 등장하며 동시에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시대와 전쟁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계에서 마법사 하울과, 저주를 받아 하루아침에 평범한 소녀에서 노파가 된 소피가 만나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린 시절의 나는 판타지 소설과 만화를 좋아하던 아이였기에, 나 역시 이 영화의 그림체, 색감, 그리고 음악이 주는 몽환적 이미지에 사로잡혔다. 원래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시 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살면서 주기적으로 이 영화를 보고, 또 보았다. 몇 번을 보았는지 셀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보는 횟수가 쌓여가는 동안, 나도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었다. 처음 이 영화의 몽환적 느낌에만 빠져들었던 아이는 어느덧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볼 때마다 점차 ‘영화의 메시지’가 불투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저 마법이 존재하는 아름다운 유럽풍의 세상에서 마법사 하울과 평범한 소녀 소피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것뿐일까? 그렇다면 왜 하울은 고작 염색을 망쳤단 이유로 울며불며 못나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소피는 왜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노파의 모습으로 하울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걸까?



 몇 년 간 바쁘게 지내며 까맣게 잊고 살았던 이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무심코 다시 본 것은 바로 얼마 전이었다. 왜일까. 15년 간 수도 없이 봐도 이해되지 않았던 이야기가 문득 이 때 내 뇌리를 강하게 때리며 이해된 것은. 서론이 길었다. 이제 내가 이해한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영화에는 굵직한 세 요소가 등장한다. 
첫째는 무고한 살생만을 발생시키는 전쟁. 둘째는 노파가 된 지극히 평범한 소녀, 소피. 그리고 세 번째는 기괴한 형태로 끊임없이 걸어 다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이 세 요소를 거꾸로 하나씩 짚어볼까 한다.


 우선 하울의 움직이는 성.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이것은 하울이라는 존재와 연관되어 있다. 하울은 영화 속 세계에서 유명한 마법사이다. 뿐만 아니라 젠킨스와 펜도라곤이라는 이름의 마법사이기도 하다. 그가 젠킨스와 펜도라곤으로 성을 나설 땐 각자의 이름으로 사는 활기 가득한 도시로 문이 연결된다. 바다내음이 가득한 항구도시, 그리고 국왕이 사는 화려한 수도로.



 소피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마법사 하울을 처음 만난다. 이 신비한 마법사는 곤경에 처한 소피를 멋있게 구해주고, 허공을 함께 걸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준 뒤 사라진다. 그러나 소피가 노인이 되어 마주한 하울은, 황량한 들판을 걸어 다니는 기괴한 고물성에 사는 겁쟁이였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고작 염색을 망쳤단 이유로 울고불며 절망하는 모습을 시작으로 하울은 자신을 노리는 황무지의 마녀가 두려워 무수한 부적 뒤에 숨은 겁쟁이로 그려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마법사로서 전쟁에 참여해야 할 자신의 의무도 소피에게 거절의 책임을 떠넘긴다. 그러면서도 하울은 밤마다 전쟁터로 나가서 싸우고, 싸운다. 그러고 돌아올 때면 하울은 점차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며 괴물이 되어간다.      


 잠깐, 혹시 눈치 챘는가? 하울은 판타지 세상 속 마법사이지만, 우리가 잘 아는 누군가와 아주 많이 닮았다. 그것은 내 경우에 나였으며, 사실상 삶을 살아가는 모두의 모습과 닮았다. 마법의 문을 통과하여 젠킨스와 펜도라곤으로 사는 하울처럼, 우리 모두 여러 개의 사회적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가.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 친구들을 만났을 때의 나, 연애를 할 때 나의 모습 등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나’이다.

 

 그러나 하울의 현실은 화려한 도시에서 국왕의 부름을 받는 마법사가 아닌,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벌판의 고철덩어리 성에 있다. 하울은 영화에서 ‘악마’로 상징되는 ‘마음의 무게를 책임지지 않기’를 선택하고 자신의 책임과 짐을 모두 어딘가에 쌓아 놓은 채 그저 다른 모습으로만 살아가려 한다. 움직이는 성의 기괴한 모습은 그런 하울의 ‘방치된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삐걱대며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 그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고철덩어리 성으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하울은 동시에 세상의 일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전쟁터에 나간다. 하울은 자신을 추스르며 건강하게 세상에 나가는 방법을 몰라, 그렇게 세상에 관여한다. 그리고 점차 마음을 잃어가며 괴물이 된다. 이 괴물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존재’이다.     



 영화는 이런 삶에 ‘소피’라는 답을 제시한다. 


어느 날 갑자기 하울의 성에 찾아온 소피는 지저분한 성 안을 쓸고 닦으며 청소한다. 그녀는 하울의 방치된 마음인 악마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며, 하울의 무책임한 태도에도 대신 나아가 그를 옹호한다. 그러자 겁쟁이 하울은 그런 소피를 위해 가장 대범한 모습으로 그녀를 구하러 온다. 결국 소피는 하울의 엉망인 고철 성을 무너뜨리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하울이 마음을 되찾을 수 있도록 소피 본인이 그 대가를 치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 속 소피는 참 따뜻한 사람이다. 그녀는 큰 딸로써 아버지가 아끼던 모자가게를 저버리지 못하고 이어받는다. 그러면서도 소피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여동생이나 엄마를 이해하며 응원한다. 또한 그녀는 하울의 나약함을 감싸 안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저주를 건 황무지의 마녀가 힘을 잃고 노파가 되자 그를 거둬주기까지 하였다.

 동시에 소피는 참 강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어떤 일이 닥쳐도 소피는 그 상황과 대상을 원망하며 주저앉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상황을 책임지며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갈 뿐이다. 그런 소피이기에 나약한 하울의 모습에도 손을 내밀어 따뜻한 지지와 사랑을 주었고, 하울이 마음을 잃게 된 과거의 내면을 보았을 때도 대신 눈물 흘리며 ‘기다림’을 시사한다.

 결국 그녀의 따뜻한 사랑이 하울의 고철 성을 부수고 그에게 마음의 무게를 지게끔 한다. 그 과정에서 계약에 메여있던 악마가 소멸되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모습은, 사실 우리는 삶을 제대로 책임지며 살아갈 때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하울을 구제한 소피는 ‘사랑’을 상징한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따뜻한 지지를 보냄으로써 상처를 감싸 안는 사랑 말이다. 그래서 소피는 노파의 모습으로 이야기에 등장한다. 젊은 남녀의 사랑으로 한정되어 보이지 않도록, 영화는 노파의 모습으로 하울의 곁에 있는 소피가 따뜻한 일상과 한결같은 사랑으로 사람을 어떻게 포용하며 성장시키는지 보여준다. 소녀였다가, 노파였다가, 점차 젊어지기도 하는 소피의 모습처럼 상처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랑’은 세상에 너무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가.      



 너무 뻔한 답 같은가?
하지만 진리는 때론 아주 단순하다. 이행하고 사는 것이 쉽지 않을 뿐. 

영화는 그런 단순한 진리가 때론 가장 확실한 정답이라는 것을 소피에 이어서 허수아비를 통해 한 번 더 이야기한다. 소피가 하울의 성을 찾아다닐 때 우연히 마주쳐 도와주게 된 순무머리 허수아비는 계속해서 소피를 따라다니며 그녀를 돕는다. 소피처럼 저주에 걸린 허수아비는 살아있는 생물같이 혼자 움직이며 의지도 가지고 있는 듯 묘사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소피의 키스로 저주의 마법이 풀리며 본 모습으로 돌아간다.



 짜잔-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의 ‘이웃나라 왕자님’이 바로 그 정체였다. 이 왕자님은 허수아비가 된 이유도, 모습을 되찾은 이유도 참 동화스럽다. ‘저주에 걸려 허수아비가 되었는데, 사랑하는 이의 키스를 받으면 풀리는 마법’에 걸린 채 지금까지 돌아다니다 소피를 만나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동화 같은 왕자님은 이웃나라로 돌아가 전쟁을 멈출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그가 소피에 대한 사랑으로 마법이 풀리고 전쟁을 멈출 수 있게 되었다.


 특별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영화가 왜 결말에 이런 뻔한 설정을 넣었을까? 영화는 허수아비 왕자님을 통해 그저 단순한 진리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복잡하고 참혹한 전쟁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이 굴러가는 폭탄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멈춰야 하는 이유는 이 왕자님에 대한 설정처럼 아주 뻔하다. “그만 되어야 하기에, 그만둬야 하는 것뿐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어느 시대든 전쟁이 벌어지는 이유에는 외교적 갈등, 국가 간 이해관계 등의 많고 복잡한 대의명분이 따라 붙어왔다. 그러나 전쟁을 멈춰야 할 이유는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 ‘무고한 희생을 더는 해서는 안 된다’등의 전 인류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이 전부일 뿐이다.     


 이처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전쟁’과 같은 인간사의 거시적인 문제와, ‘하울’로 대표되는 모든 개인의 문제에 간단한 진리로 접근한다.


 그런데 이렇게 영화를 이해하고 나자, “나에게는 ‘소피’가 있었나?”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피로 그려지는 ‘사랑’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다. 다양한 소피의 모습처럼, 그것은 특정한 한 존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을 전환하자 많은 모습들이 내 안에서 떠올랐다. 내가 살면서 만났던 이들, 가족, 친구, 그 모두가 내게 있어 ‘소피’였다. 


 살며 온전한 혼자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삶에 존재했던 많은 이들이 ‘소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받아들일 때에야 가능하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다.

 

 영화는 하울을 통해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는 사실 아주 단순한 것이란 메시지를 보여주었고, 나는 나의 삶을 받아들이는 진리를 돌아보았다. 이처럼 오래 전 누구나 한번 쯤 읽었을 케케묵은 동화책 같은 진리를, 우리는 알면서도 꺼내보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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